2024년 2월 19일 월요일

전명운 [田明雲, 1884~1947] 스티븐스 저격

전명운(田明雲), 1884-1947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로 노동 이민하여 항일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친일 외교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1884
 
  • 625, 서울 종현(鐘峴, 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아버지 전성근(田聖根)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 사이의 13남매 가운데 7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죽암(竹嵒)이고,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1898
 
  • 189810월 종로 네거리에서 개최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참관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주권 수호와 근대적 민권 확대를 위해 정부 대신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 민중대회를 보면서, 선생은 신학문 수용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따라 관립 한성학교(漢城學校)에 입학하였다(1902년 두 해의 수업 과정을 마쳤다).
 
1903
 
  • 19031월 도미 유학 길에 올라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같은 해 918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905년에 하와이로 이민갔다고 기록하였다]
 
1904
 
  • 1904923일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SanFrancisco : 桑港)로 이주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906년에 이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905
 
  • 19054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청년회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 190511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조국이 준()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자, 선생은 각종 토론회가 개최될 때마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면서 강력한 국권회복운동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8
 
  •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1908321<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francisco Chronicles)> 등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망언을 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인 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예전 정부의 학대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인들을 환영한다.”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서는 곧바로 공립협회 회관인 공립관(共立館)에서 양회 합동으로 공동회(共同會)를 개최하였다. 이 공동회에서는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항의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공립협회의 최정익(崔正益)ㆍ정재관(鄭在寬), 대동보국회의 문양목(文讓穆)ㆍ이학현(李學鉉) 4인을 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 대표들은 페어몬트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신문에 보도된 망언에 대한 해명과 정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부하고 한국에 이완용(李完用)같은 충신과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오 동양에 대행(大幸)이라고 하면서, “태황제(太皇帝 : 高宗)는 실덕(失德)이 태심(太甚)하고 수구당은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고 백성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은즉 일본에게 강탈하지 아니하면 러시아에게 빼앗겼을 것이라고까지 극언하였다. 이에 격분한 항의 대표단은 스티븐스를 집단 구타한 뒤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공동회에 보고하자, 재미 한인동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 1908323일 오전 930, 권총과 스티븐스의 사진 한 장을 준비, 오클랜드 선창에서 대기하였다가 하차하는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쏘았으나, 불행히도 불발로 끝났다. 이에 권총자루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강타하고 격투 중, 역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해 기다렸던 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유탄에 어깨 부분을 관통당하고 쓰러졌다.
  • 전명운은 즉시 장인환과 공범자로 체포되었다.
  • 국내에서도 대한매일신보1908325일부터 417일까지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두 의사의 옥중 인터뷰까지 게재하여 국방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기에 노력하였다.
  •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때 통역은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의 변호를 통역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함에 따라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 190843일 선생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처음으로 법정에 출두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의거의 소신을 밝혔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고 공언하더니 끝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를 약탈하였다. 부녀자들을 강간하며 재정을 말리우고 고관직을 차지했고 헌병과 순검이 경향에 가득하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없애려 하였고 자유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나는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가지고 대한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는데 스티븐스가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찬조하며 우리의 조국을 배반하는 일을 했다.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탐지한즉, 오늘 상항(桑港)을 떠난다고 하기에 육혈포와 그 놈의 사진을 가지고 선창에서 기다렸다. 마침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나가지 않으므로 턱 밑을 냅다 때리고 상황이 급박하여 도망을 가려고 한 것이다. 그 때 뒤에서 총소리가 났으며 나는 전에는 장인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 선생의 이와 같은 애국심에 불타는 당당한 의거의 변()은 배심원들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일제가 선생을 사형 또는 무기 징역을 받도록 책동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08628일 사건발생 97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 이후 선생은 재미 일본인들에 의한 위해(危害) 가능성을 고려하여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한 뒤, “장인환 의사의 재판이 진행 중에 미국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190812월 노령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장인환 의사는 재판 결과 노역 없는 25년 금고형을 선고 받았으나 수감 중 애국심 등을 인정 받아 10년 만에 출감했다.)
 
1909
 
  • 연해주에서 전명운 선생은 1909년 봄 안중근(安重根)과 만나 국권회복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후, 의기 상통하여 그가 조직한 동의회(同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따라서 같은 해 1026일에 결행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도 선생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19097월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전명운은 결혼하여 12녀를 두었다.
  • 19097월 연해주에서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선생은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대한인국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31운동 직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7
 
  • 19277월 부인 조순희 여사가 병사하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929), 선생은 이듬해 슬하의 12녀를 데리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선생은 생계가 어려워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대한인국민회와 이승만(李承晩) 계열의 민족운동 단체인 동지회(同志會)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조국 독립의 저변을 넓혀 갔다.
  • 맨티카 지방에 정착하여 세탁업을 했다. 이후 맨티카지방회 회장을 맡고 독립운동 자금 후원을 하다
 
1947
 
  •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비참한 생활고 끝에 19471119일 사망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위티어(Whittier) 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19944월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가족으로는 부인 조순희, 장남 알프레드 전(6세에 요절), 장녀 전경숙(로즈마리 전), 차녀 전경영(마거릿 전)이 있다.
  • 전경숙은 1942년 유학생 이태모와 결혼했는데, 이태모는 OSS 참가로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참고]
1996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디지털동작문화대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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