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金貞植, 1862-1937)】
기독교인 독립운동가, 청년운동가, 호는 삼성(三醒, 三省)
【1962년】
- 1862년 8월 6일 :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다.
【1898년】
- 1898년 : 독립협회운동이 기세를 올릴 당시 경무관(오늘날의 치안국장)으로 재직했는데 경무관의 신분으로 만민공동회에 참석하는 동시에 그 회원들의 신변보호에 힘썼다.
【1902년】
- 1902년 :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이상재ㆍ이승만ㆍ유성준ㆍ이원긍 등 동지들과 함께 옥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4년】
- 1904년 3월 : 석방된 뒤에 연동장로교회에 정식 입교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으로 가입했다. 1904년 YMCA에 한국인 간사가 선임될 당시에 수석간사로서 임명되었고 그후 YMCA의 초대 한인총무가 되어 YMCA의 초창기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05년】
- 1905년 : 다석 유영모가 김정식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서울 연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유영모가 아버지 외에 정신적인 아버지로 받들었던 이가 두 분 있는데 한 분은 남강 이승훈이고, 다른 한 분은 삼성 김정식이었다. 이승훈에게는 나라 사랑을 배웠고, 김정식에게는 하느님 사랑을 배웠다. 한편 일본에서 유영모는 김정식의 소개로 고당 조만식을 만났다고 한다.]
【1906년】
- 1906년 8월 : 일본 토오쿄오로 파송되어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토오쿄오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고 초대 총무가 되었다. 초창기의 주요 회원들은 조만식ㆍ장혜순 등이었다.
【1907년】
-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세계대회가 일본 토오쿄오에서 개최되었을 때 윤치호ㆍ김규식ㆍ김필수ㆍ민준호ㆍ강태응ㆍ브로크만(F.M. Brockman) 등과 함께 한국YMCA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 1909년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한석진 목사를 청빙하여 오늘날의 재일본한국기독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들을 위해 YMCA를 창설하였고 기독교선교운동으로서는 교회를 창설했는데 모두 한국에큐메니칼운동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 1909년 : 신해영(申海永)과 손잡고 유학생단체인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 육성에 힘썼다. [대한흥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09년 8월 28일 해산되었으나 다시 이를 각 지방별 학생친목회로 재건하여 학우회(學友會)로 발전할 수 있게 함으로써 1919년 동경 기독교청년회회관에서 2ㆍ8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1914년】
- 1914년 :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즉 오늘날의 한국YMCA연맹이 창설될 때에는 주공삼ㆍ이찬우ㆍ김영수 등 총대를 인솔하고 개성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1910년 한일합방과 1912년 105인 사건 등 연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1914년 일본에서 철수하여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의 우찌무라 등 무교회주의 지도자들과 친교하면서 가끔 그 집회를 주도하였고 우리나라에 무교회주의 신앙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1937년】
- 1937년 : 귀국한 뒤 YMCA의 이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봉사에 주력했고 1937년 별세했다. 다석 유영모가 『성서조선』에 추모문을 기고하였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다석사상연구회 다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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