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5일 목요일

이원긍 [李源兢, 1849~1919?] 독립협회 옥중신도(연동교회, 묘동교회)

이원긍(李源兢, 1849-1919?)

 
장로교 장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리(公履), 호는 취당(取堂). 충청북도 괴산 출신. 이두진(李斗鎭)의 아들이며, 국학자 이능화(李能和)의 아버지이다.
 
1849
 
  • 1849: 충청북도 괴산에서 이두진의 아들로 출생하다.
  • 정종의 넷째 아들인 신성군의 후손이다.
 
1874
 
  • 25세 때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음성현감ㆍ춘천판관을 역임하였다.
 
1891
 
  • 189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ㆍ이조참의ㆍ북청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4
 
  • 1894: 내무아문참의가 되고, 김홍집ㆍ유길준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갑오개혁 때 신설된 군국기무처의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그뒤 법부협판을 지냈는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독립협회 회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썼다.
 
1898
 
  • 1898315: 여규형(呂圭亨)ㆍ지석영(池錫永)ㆍ안기중(安沂中) 등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시종원시종 김영준(金永準)의 무고로 잡혀 투옥당하고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10년 유배형을 받게 되었는데(평북 용천), 독립협회가 인권옹호를 강경히 주장하고 정부의 횡포를 규탄함으로써 629일 석방되었다.
 
1901
 
  • 1901: 황국협회의 무고로 인한 독립협회 지도자에 대한 일련의 검거선풍으로 말미암아 3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04
 
  • 1904: 이상재(李商在)ㆍ이승만(李承晩) 등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수감되어 있을 때 미국선교사 방커(Bunker, 房巨)의 교화로 기독교신도가 되고 출옥 후 게일(奇一) 목사가 주관하던 연동교회에 잠시 다녔다.
 
1906
 
  • 1906: 황성기독교청년회 교육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다시 정부에 등용되어 경상북도 관찰사를 거쳐 법무협판을 역임하였으며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이르렀다. (아마도 19107월 이전에 관직에서 물러났을 것이라 여겨진다)
  • 1907: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계몽과 민족정신 앙양에 힘썼다. 연동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천민 출신인 이명혁은 장로장립을 받았지만 양반 출신인 이원긍은 장립을 받지 못했다.
 
1909
 
  • 1909: 연동교회 당회장인 게일 선교사는 천민 출신인 고찬익과 이명혁 장로에 이어 광대 출신인 임공진의 장립까지 서두르자 양반 교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1910
 
  • 19107: 이원긍은 함태영(咸台永)ㆍ조종만(趙鍾萬) 등과 함께 사재를 털어 지금의 봉익동에 묘동교회를 따로 세웠다. 그가 연동교회를 나온 이유의 하나는 게일의 민족적 차별주의에 대한 반감이었다. 한편으로는, 담임목사 게일(Gale, J. S., 奇一)이 천민 출신 고찬익(高燦益)ㆍ이명혁(李明赫)ㆍ임공진(林公鎭) 등을 장로로 삼는 데 불만을 느끼고, 양반 출신의 이원긍(李源兢)ㆍ함우택(咸遇澤)ㆍ오경선(吳慶善) 등을 중심으로 100여 명이 심한 반발을 한 데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11
 
  • 191143: 묘동교회를 새롭게 건축하고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이원긍은 교회가 민족운동의 센터가 되어야 한다면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만 조선이 근대화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그는 묘동교회 내의 젊은 청년들을 불러모아 놓고 자주독립만이 민족이 살고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교회 청년들을 규합하기 위해 슬로건도 내세웠다. 이원긍은 젊은 청년들은 묘동교회만의 자원이 아니라 장차 조선의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서울 중앙YMCA를 창립할 때 한 몫을 담당하였다.
  • 19117월 소위 조선목사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 온 후로 그는 친일노선 경향으로 기울었고 반()선교사 운동을 적극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2
 
  • 1912: 경기충청노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그의 신앙노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의 민족적 우월감에 반대해 연동교회에서 탈퇴한 그였기에 선교사 주도하의 장로교회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긍정적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독자적 신앙노선을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신학적, 신앙적 성숙함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일관된 신앙노선을 견지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신회(維新會)를 앞세운 일본기독교회의 한국침투에 그가 쉽게 동조할 수 있었다. 19117월 소위 조선목사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 온 후로 그는 친일노선 경향으로 기울었고 반()선교사 운동을 적극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인들의 신앙부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사경회만 개최하여 묘동교회는 사경(査經)교회란 별명을 듣기에 이르렀다.
 
1912
 
  • 1912년에는 안식일교회 목사(김시열)를 청빙해 교회를 맡기기도 했다.
 
1916
 
  • 1916년에는 장로교 간판을 떼고 경성일본기독교회와 합병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 19169: 경기충청노회는 이원긍을 소환하여 심문한 후 묘동교회를 완전 제명시키기로 결의하였다. (묘동교회는 1920년에 다시 경충노회에 복귀하였다)
  • 이원긍 장로가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는 1911년 이후 친일 노선과 반선교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역사적인 오점으로 남아 있다. 이원긍의 장남 능화는 불교도가 되어 사학자, 국학연구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차남 중화(1953년 별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묘동교회 장로가 되어 평생 교회 봉사로 일관하였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