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식(金昌植, 1857-1929)】
감리교 목사, 한국인 최초 목사
【1857년】
-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에서 출생하다.
【1867년】
- 한학을 수학하면서 가업으로 농업에 종사하다.
【1872년】
- 서울로 올라와 전국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히다.
【1886년】
- 29세에 박노덕과 결혼하다.
【1888년】
- 당시 서양인들이 조선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야만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선교사 올링거(Ohlinger, 1845-1919)의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들로부터 오히려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 뒤 올링거와 아펜젤러에게서 마태복음을 비롯한 4복음을 배웠으며, 올링거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91년】
- 12월 : 내한한 의사이며 목사인 미감리회 선교사 홀(W. J. Hall, 1860-1894) 박사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
【1892년】
- 1892년 봄 : 홀 박사의 협조를 받아 순회 전도사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1894년】
- 홀 박사는 평양시 서문통에 기생집을 구입하여(1893년 4월) 1894년 봄부터 학교(광성)와 병원을 개업함과 동시에 교회도 시작하여 김창식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헌신하게 하였다.
- 1894년 9월 : 김창식은 평양에서 전도하다가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핍박을 감수하면서도 평양제일교회당(이후 남산현교회)을 설립하였다.
【1900년】
- 미감리회 신학과정 4년급을 수료하였다.
【1901년】
- 1901년 5월 14일 : 서울 상동교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부터 평양지방 순행목사로 남포, 삼화와 강서, 황해도 수안, 신계교회 등 여러 교회를 순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으로 ‘한국의 사도바울’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1904년】
- 1904년 : 평북 영변지방 감리사로 6년간 시무하였다(1910년까지).
【1910년】
- 1910년 : 경기도 수원지방 순행목사로 시무하다(1921년까지).
【1912년】
- 1912년 3월 : 평양지방 감리사로 헌신하다. 그가 평양남북도의 운산ㆍ영변ㆍ덕천ㆍ개천ㆍ양덕ㆍ맹산 등과 함남의 원산, 충북의 제천, 황해도 등에서 새로 설립한 교회는 48개처나 된다.
【1921년】
- 1921년 : 해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1924년까지).
【1924년】
- 1924년 9월 : 정년퇴직하다.
【1929년】
- 1929년 1월 9일 : 별세하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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