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5일 목요일

이상재(李商在, 1850년 10월 26일 ~ 1927년 3월 29일)

이상재(李商在, 18501026~ 1927329)

 

1850
 
  • 18501026: 충청남도 서천군(당시 한산군)에서 이회택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 그의 조상 중에는 고려 시대 학자 겸 정치가인 목은 이색, 사육신 이개가 있다.
 
1864
 
  • 1864: 조혼 풍습에 따라 강릉유씨와 결혼하였다.
 
1867
 
  • 1867: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자(落榜擧子)가 되었다.
  • 친족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로 일하였다.
 
1881
 
  • 1881: 박정양의 추천으로 신사유람단(박정양ㆍ어윤중ㆍ조준영ㆍ김옥균 등 10명으로 구성)의 수행원으로 유길준ㆍ윤치호ㆍ안종수ㆍ고영희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1884
 
  • 1884: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의 총판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
 
  • 1887: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 이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담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1892
 
  • 1892: 전환국 위원
 
1894
 
  • 1894: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무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 이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ㆍ중학교ㆍ소학교ㆍ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5
 
  • 189512: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서재필을 대한제국 중추원의 의장, 외무부의 협판으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점차 미국시민권자를 자칭하며 조선인을 냉담하게 대하는 서재필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 점차 그에게 반감을 품게 된다.
 
1896
 
  • 1896: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 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 이 해 7월 서재필(徐載弼)ㆍ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ㆍ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
 
  • 18981225: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1902
 
  • 1902: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2월 석방되었다.
  • 석방 직후 이상재는 정동제일교회를 찾아갔지만 거부됐다. 이상재는 이승만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승만은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서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정치색이 강한 이상재가 등록할 경우 정치적 분란이 생길 것을 우려해 거부했던 것이다. [☞ 《월간중앙20201117, 202012]
  • 이에 이상재와 감옥동지들(이원긍ㆍ홍재기ㆍ유성준ㆍ김정식)과 옥중시절 도와준 선교사 게일(James S. Gales)을 찾아가 함께 세례를 받고 게일이 세운 교회인 연동교회(蓮洞敎會, 일명 연못골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 이어 질레트(G. A. Gillet) 등이 세운 종로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YMCA의 전신, 이하 YMCA로 약칭)를 찾아가 교육사업에 전념할 뜻을 밝혔다.
 
1904
 
  • 19042: 석방된 이상재는 이승만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이승만이 석방된 후에 미국 유학을 할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5
 
  • 1905: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이듬해 6월까지 의정부참찬에 머물렀다.
  • 이 기간 동안 그는 연동교회 장로인 궁내부 협판 박승봉(朴承鳳)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화의(萬國平和會議)에 밀사 파견을 추진하였다.
 
1906
 
  • 19066: 통감부(統監府)에 의해 체포되어 두 달간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의정부참찬에서 물러난 그에게 힘든 시기가 닥쳤다(1905년 박정양의 분사(憤死), 1907년 부인과 장남 승윤의 사망, 1908년 둘째아들 승인의 죽음). 이로 인해 그는 한때 자결을 고민하였으나, 질레트와 김정식의 만류로 이후 YMCA에 투신하면서 제2의 인생을 걷게 된다.
 
1907
 
  • 1907: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1910
 
  • 19106: 청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학교별로 YMCA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을 질레트를 통해 불러들여 19123월까지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1‘105인사건이 터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총무 질레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1913
 
  • 1913: YMCA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4
 
  • 1914: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ㆍ배재ㆍ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ㆍ출판ㆍ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1916
 
  • 1916: 1916YMCA 총무직을 윤치호에게 넘겨준 그는 명예총무로 물러났다. 이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기독교 전도와 민족의식 고취, 독립사상 촉구 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천도교 청년회 등을 망라한 각 종교단체의 단합을 추진하여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한 민족운동 기반을 닦기도 하였다.
 
1919
 
  • 1919: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초, 국내에서는 31운동 거사계획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논의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 논의에 이상재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 역할 분담 차원에서 이상재는 1차 계획이 실패할 경우, 이를 책임질 대표자로 선정되어 있었다. 191939일 현순(玄楯)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31(중략)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대표자는 손병희(孫秉熙)ㆍ이상재ㆍ길선주(吉善宙) 3씨를 파송하였다는 내용이나,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 수립에 깊이 관여하였던 이규갑(李奎甲)의 증언에서 단체 대표로서 (중략) 월남 이상재 선생과 박승봉씨를 내정했는데 후에 만약 일본정부와 우리나라 독립문제로 담판하는 경우가 생겼을 때 민족대표로 추대하기 위하여 일부러 뺐었다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 그는 4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에 조직에도 관여하였다. 이때 이승만을 집정관(執政官) 총재(總裁)’로 적극 추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고, 이후에도 이승만의 영원한 후원자였다. (이승만이 상해의 통합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후 끊임없는 재정 후원을 하였고, 1923년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대통령불신임안이 제출되자 이승만을 적극 옹호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임시정부와 별도로 친위조직인 하와이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하자, 1925년 국내에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조직하고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여 생을 다할 때까지 지지ㆍ후원하였다. 이러한 것은 그와 이승만이 기호파(畿湖派)와 기독교인(基督敎人)이라는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920
 
  • 1920: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 이른바 제2독립운동ㆍ물산장려운동ㆍ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ㆍ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강연회ㆍ토론회ㆍ일요강좌ㆍ농촌운동ㆍ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
 
  • 1922: 신흥우(申興雨)ㆍ이대위(李大偉)ㆍ김활란(金活蘭)ㆍ김필례(金弼禮)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23
 
  • 1923: 조선기독교창문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924
 
  • 1924: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25
 
  • 1925415: 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
 
  • 1927215: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 192747: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한때 같이 활동하였던 선교사 에비슨(O. R. Avision, 한국명 어비신魚丕信)은 조문하면서 그를 가리켜 한국의 거인(Grand Man of Korea)’이라고 칭송하였다.
  • 1957: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신도비(神道碑)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 지었으며, 묘비(墓碑)의 비문은 변영로(卞榮魯)가 지었다.
  •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조] 우리역사넷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