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정하상(丁夏祥, 1795~1839)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동정 순교 성인. 축일은 920. 세례명은 바오로. 본관은 나주(羅州, 押海). 당색은 남인. 신유박해 순교자 정약종과 기해박해 순교자 유조이(柳召史, 체칠리아) 성녀의 아들이다. 또한 순교자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의 아우이자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의 오빠. 남은 글로는 상제상서, 1839를 비롯하여 교우들과 함께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교황에게 올린 서한이 있다.
 

1795 경기도 양근의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본래 그의 부친 정약종은 경기도 광주 땅 마재(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마현)에 있는 정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786 무렵 중형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당시 그 형제들 중에서는 정약전만이 아니라 넷째인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였다. 또 정약종은 이 무렵 같은 남인인 이수정의 딸과 혼인하여 정철상을 두었으나 얼마 뒤 부인과 사별하고, 이후로는 홀아비의 정을 지키면서 살아가려 하였으나 가족들의 만류로 유조이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가 곧 정하상의 친모이다.
 
정약종은 입교한 뒤 누구보다 열심히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1787년에 일어난 정미반회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고, 1791년의 진산사건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 폐지 행위가 크나큰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조상 제사에 대한 집안의 강요를 피하기 위해 아내와 맏아들 정철상을 데리고 한강 너머에 있는 양근의 분원으로 이주하였으니, 정하상이 태어난 곳이 바로 여기다. 이후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도층 신자로 활동하다가 신유박해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맏아들 정철상도 순교하였다.
 
박해 당시 정하상의 나이는 만 여섯 살에 불과하였는데, 모친 유조이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가산이 적몰되고 분원의 집도 파괴된 탓에 거처할 곳조차 없게 되었으므로 모친 유조이는 정하상ㆍ정정혜 남매를 데리고 정철상의 가족들과 함께 선친의 고향인 마재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집안의 비난과 조소, 핍박과 멸시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했지만 결코 천주교 신앙만은 버리지 않았다. 정하상이 청년기에 들어서는 혼인 같은 세속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 구원에 노력하면서 교회 재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도만을 강구하였으니, 당시 그가 생각했던 재건 방책은 무엇보다도 새 성직자를 조선에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정하상은 언제부터인가 마재를 떠나 교우들의 집으로 피해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집안에서의박해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좀 더 깊이 있는 교리와 한문을 배울 요량으로 신유박해 때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던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돌아온 뒤로는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북경 왕래와 성직자영입 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하상이 처음 북경으로 떠난 것은 그의 나이 만 21세 때인 1816년 겨울이었다. 당시 그가 북경 천주당을 찾았을 때, 그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용감하고 젊은 조선의 밀사를 보고 다시 한번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1811년과 1813년경 이여진이 북경을 다녀간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 대목구의 총대리는 라자로회 선교 수도회의 리베이노 누네스 신부였다. 왜냐하면 1808년 북경 대목구장의 승계한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마카오에서 북경에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베이로 신부는 정하상을 만나 성사를 준 다음, 그 소식을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하였고, 사라이바 주교는 1817년 초에 남경의 두 선교사를 선발하여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모두 조선 땅을 밟지는 못하였다.
 
당시 조선 안에서 정하상을 도와주던 신자들 중에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조숙(趙淑, 베드로)와 권 데레사(권일신의 딸)가 있었다. 그들은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하였고, 북경에 가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였다. 그리고 정하상이 북경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그 기별이 오기 하루 전날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19년에 순교하였다. 이때 정하상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탓에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조선에는 교회를 이끌어 갈 만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젊은 정하상이 모든 일이 도맡다시피 하였는데, 순교자 후손인 이경언, 현석문 등이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1824, 나이 29세 때 정하상은 북경 왕래에 훌륭한 동행자를 만나게 된다. 역관 출신 유진길이 바로 그 사람으로, 그는 한 해 전에 영세 입교한 신자였다. 이 해 정하상과 유진길은 함께 북경 선교사들을 만나고 귀국한 뒤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1824-1825년경)을 작성하였으니, 이는 조선 교우들이 18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이다. 여기에는 조선 교회의 비참한 상황은 물론,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신자들의 영신적 구원을 위해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북경에 있던 총대리 리베리로 신부는 다시 한번 선교사를 조선에 들여보내기 위해 1826년에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바로 이 해에 정하상과 유진길은 유능한 동료 한 명을 얻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하급 마부 출신인 조신철(조신철, 1795~1839)이었다.
 
정하상과 유진길이 조선 교우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은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후, 1827년 교황청(재위 교황 레오 12)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 복음화성)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16(1831-1846)로 선출된 직후인 183199, 마침내 조선 포교지가 조선교구(즉 대목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기에 이른다. 정하상과 동료들은 그동안에도 여려 차례 북경을 왕래하였으며, 183010월에는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가 입국할 수 있는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에 교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마카오에 도착한 뒤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북상하였고, 포교성성에서는 이에 앞서 중국인 유 파치피코(余恒德)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주교 영입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183414일 유진길과 조신철은 국경에서 유 파치피코 신부를 맞이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1020일 만주 땅 마가자(馬架子, 일명 펠리구)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1836112일 봉황성 책문에서 정하상과 유진길ㆍ조신철ㆍ이광렬 등을 만나 이튿날 밤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서 받은 비용으로 서울 후동(현재의 주교동, 樂善坊의 후동인 듯)에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과 여동생을 비롯하여 남이관(남이관, 1780~1839) 부부, 권진이(權珍伊, 아가다)와 다른 과부 신자들을 그곳에서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다. 또 유 파치피코 신부와 모방 신부의 명에 따라 교우촌을 돌면서 신학생들을 선발하기도 하였으며,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1796~1839, 이냐시오)를 권면하여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였다.
 
정하상과 동료 밀사들은 1836123일에 조선 신학생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228일에는 책문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인도하였으며, 183712월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를 모셔 와 후동의 집으로 안내하였다.이후 정하상은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순방하거나 신자들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았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정하상의 기여로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4년 이래 네 명의 성직자가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하상은 1839년 초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중단되어야만 하였다. 당시 그는 후동의 주교댁을 지키고 있다가 박해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체포와 순교를 예상하고는 몇몇 교우들과 협의하여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을 직접 작성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상재상서이다.
 
정하상은 1839711(61)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후동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런 다음 상재상서를 박해자들에게 제출하고, 사흘 뒤부터는 동료들과 함께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 811일에는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었으며, 모방과 샤스탕 신부도 96일에 체포되었다. 정하상은 이후 의금부로 이송되어 915일부터 여러 차례 추국(推鞫)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동요하거나 나약한 심신을 보이지 않았고, 주교ㆍ신부들과 대질 심문을 받는 중에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세 명의 선교사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다음날인 1839922(음력 815), 유진길과 함께 의금부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만 44세였다.
 
한편 정하상의 모친 유조이는 고령에 230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옥중에서 신음하다가 순교하였다. 또 여동생 정정혜는 320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옥에 갇혀 있다가 1229(음력 1124)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로부터 86년이 지난 192575일 이 순교자 가족 세 명은 복자품에 올랐고, 198456일 함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정하상의 시신은 이후 고향 인근인 배알리미(拜謁尾里, 현 하남시 배알미동)에 묻혔다가 198110월 파묘되는 과정에서 남은 유해가 거두어져 신장 성당에 안치되엇고, 그해 1231일 다시 천진암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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