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4일 수요일

브뤼기에르(Bruguiére, Barthélémy, 1792-1835) - 조선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Bruguiére, Barthélémy, 1792-1835

 
브뤼기에르, 바르텔레미(Bruguiére, Barthélémy, 1792-1835)
주교. 초대 조선 대목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한국 성은 소().
 

1792212 프랑스 나르본(Narbonne) 근처의 레삭(Reissac)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공부한 후 카르카손(Carcassone)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는 성적이 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심이 참되고 대담 솔직하여 스승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또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부제가 된 뒤에는 소신학교 3학년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151223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다음날 대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고, 후에는 일선 사목도 경험하였다. 한편 그의 외방 선교에 대한 열망은 대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자라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열망은 1825917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뒤 동양선교사로 임명됨으로써 실현되었다.
 
182625(Siam, 지금의 태국) 왕국으로 가기 위해 보르도 항을 출발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그해 64일 샴의 수도 방콕에 도착하여 그곳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당시 샴의 교구장은 소조폴리스(Sozoplois) 명의 주교인 플로랑(Florent) 주교로, 성직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이에 브뤼기에르 신부는 유럽으로 자주 편지를 보내 선교사 지원자들을 모집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조선 포교지의 상황을 전해 듣고 그곳으로 성직자를 파견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1827 포교성성(지금의 인류 복음화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로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장차 독립하게 될 조선 포교지를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때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조선의 실상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동양 선교사들에게 서한을 보냈고, 그 결과 브뤼기에르 신부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뤼기에르는 1829519자 편지를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지원자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파견하도록 요청하였고, 지원자가 없으면 자신이 조선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829년과 1830년에는 거듭 포교성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교황의 허락을 얻어 주도록 간청하기도 하였다. 당시 플로랑 주교는 샴 교구가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계획에 찬성하여 1829620자로 여기에 동의하는 서한을 포교성성으로 보냈다. 아울러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면서 주교 임명을 수락하고, 1829629 방콕에서 갑사 주교 명의로 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는 말레이 반도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페낭으로 가서 활동했으며, 1831년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활동지역이었다가 1827922일자로 샴 교구에 병합된 싱가포르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183199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반포한 소칙서에 의해 조선 포교지가 대목수로 설정되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그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다음해인 1832725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어 북경의 남당(南堂)에 거처하면서 북경 교구장을 겸임하고 있던 남경 주교 피레스 페레이라(G. Pirés-Pereira, 畢學源)로부터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 신학교에 다녔던 왕() 요셉과 함께 그해 912일 배를 타고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당시 샴 교구의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으며, 이탈리아 나폴리 신학교 출신으노 조선 선교를 희망하고 있던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劉方濟) 신부와 다른 학생 하나가 포교성성의 명령에 따라 브뤼기에르 주교를 수행하도록 결정되었다.
 
같은 해 1018일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교성의 마카오 대표인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를 만났고, 1021일에는 교황 친서를 받았으나 그를 태우러 오기로 된 배가 도중에 해적을 만나 다시 복건(福建)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예정대로 복건에 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교회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섣불리 길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는 먼저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 여항덕 신부를 만나고 조선 신자들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220일경 사천(四川) 선교사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등 5명과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183331에야 복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복건에 도착한 지 8일 만인 39일에 모방 신부는 조선 선교를 희망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도 이를 받아들여 사천 교구장에게 모방 신부의 임지 변경을 요청하는 편지를 작성하여 보낸 다음 423일 모방 신부와 헤어져 다시 배를 타고 복건을 출발하였다. 515일 남경 근처에 상륙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곳에서 남경교구의 총대리 카스트로(Castro)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한편 1833217일 북경에 도착한 왕 요셉은, 410일에 여항덕 신부를 서부 달단(韃靼) 지역 즉 서만주 지역까지 인도한 다음 요동(遼東) 지역에 주교의 거처를 마련하고 626일 강남으로 와서 주교와 재회하였다.
 
1833720 강남 지방을 떠나 728일 양자강에 도착한 그는 피로와 더위, 부족한 음식, 발각될 위험을 극복하면서 계속 북상하였으나 강남을 떠날 때부터 앓고 있던 열병으로 많은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도중에 이질까지 걸린 몸을 이끌고 안휘성, 황하, 산동성을 거쳐 북경 인근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곳에서 왕 요셉과 헤어져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북서쪽의 산서성으로 가서 1010일 산서 주교를 만났으며, 그 후 북경과 산동성을 돌아온 왕 요셉과 재회하였다. 1018일에는 조선 신자들과의 연락을 위해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냈으나, 여항덕 신부가 북경으로 가던 조선 신자들과 함께 183414일 조선에 입국하였기 때문에 왕 요셉은 조선 신자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이때 변문(邊門)에서 여항덕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안내한 밀사는 정하상과 조신철(趙信喆)이었다. 한편 북경의 남당에서 페레이라 주교의 보호를 받고 있던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명을 받고 183468일 서부 달단으로 출발하였으며, 샴 교구에 있던 샤스탕 신부도 1833년 마카오에 도착한 이래 달단과 조선 국경까지 갔다가 산동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1834829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유진길의 1833126(1025)자 서한을 받았다. 이에 98일에는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고 돌아온 왕 요셉을 만나 그와 함께 달단의 국경에 있는 변문을 탐색하고 다시 산서로 돌아왔으며, 108일에는 조선 신자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북경과 가까운 서부 달단 즉 요녕성의 서만자(西灣子, 일명 Sivang)에 있던 라자리스트회 신학교로 거처를 옮겨 모방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왕 요셉을 다시 북경으로 보냈는데, 왕 요셉은 1835119일에 조선의 밀사 현석문(玄錫文)을 만나 남이관(南履灌) 등이 작성한 편지를 가지고 126일에 서만자로 돌아왔다. 이어 조선의 유진길ㆍ조신철ㆍ김방제 등은 1835121(18341223)자와 215(118)자로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연말에는 반드시조선으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하였다.
 
서만자에 머무르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해 6월에 몇 차례나 박해의 위험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그는 중국인 신자를 변문으로 보내 인근에 있는 집을 빌리도록 하였고, 107일에는 마침내 서만자의 신학교를 출발하여 변문으로 향하였다. 당시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중국인 라자리스트 고 신부와 몇몇 보행군들이었다. 1019일 마가자(馬架子) 즉 펠리구(Pie-li-keou)로 불리는 서부 달단의 한 교우촌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곳에 머무르던 중 남경 주교의 편지를 받고 요동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의 과로로 인해 그해 1020(829)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서만자에서 이 소식을 들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잇기로 결심하고 즉시 마가자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121일에 장례식을 치른 다음 그 시신을 인근의 신자들 묘역에 안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이어 그는 길을 재촉하여 교회의 밀사들과 함께 1836113(18351125)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편 마가자에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의 용산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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