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황사영(黃嗣永, 1775-1801)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신유박해 순교자. 세례명은 알렉시오. 자는 덕소(德紹). 호는 비원(斐園). 일명 시복(時福). 본은 창원(昌原)이고 당색은 남인. 공조판서 준()의 증손자이며 부정자 석범(錫範)의 아들. 백서(帛書)의 저자로 유명하다.
 


황사영은 서울 아현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모친인 평창 이씨 윤혜(允惠)와 증조부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1790(정조 14) 15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시 부분 1)에 합격하였다. 이때 정조가 그의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였으므로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바로 이 해에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命連, 마리아, 일명 蘭珠)과 혼인한 뒤 정씨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1791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교리에 관해 더욱 깊이 연구하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 직후 신해박해가 발발하자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천주교를 배척하였지만, 그는 천주교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이라고 확신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함으로써 세속의 영광을 뒤로하는 등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어 1794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다음해에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은 뒤 그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의 집을 그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를 위한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약종ㆍ홍낙민ㆍ최필공ㆍ최창현ㆍ강완숙 등 지도층 신자들의 활동을 도우면서 신자들을 가르치거나 가족과 친지들에게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고,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널리 전하였으며, 조선 교회의 선교사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801의 신유박해 이전에 그는 이미 높은 교리 지식과 적극적인 교회 활동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권철신ㆍ정약종ㆍ홍낙민 등을 체포하는 한편 황사영에 대해서도 체포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18011월말부터 도피길에 나서 김연이의 집, 삼청동, 석정동, 송재기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김한빈의 제안에 따라 여주, 원주를 거쳐 충북 제천의 배론 옹기점촌에 은거하였다. 당시 서울 신자들은 그에게 머리를 깎고 중으로 변장하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는 천주교와 불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를 마다한 뒤 이씨로 변성명하고 상인(喪人)으로 변장하였다. 이때 상복은 여러 신자들이 마련해 주었다.
 
황사영은 배론에서 큰 옹기로 덮은 토굴에 은신한 채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시를 짓거나 고공 김세귀ㆍ세봉 형제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18013에는 김한빈을 서울로 보내 박해의 진행 과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4월 초에 배론으로 돌아온 김한빈이 지도층 신자들의 죽음과 주문모 신부의 자수 소식을 알려오자, 황사영은 큰 충격을 받게되었다. 그가 교회 재건 방안을 구상하고 백서의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이어 826()에는 밀사 황심(黃沁, 토마스)이 배론으로 찾아와 다시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였고, 황사영은 그에게 백서의 초고를 보여 주었다.
 
그에 앞서 6월에 교회 밀사 옥천희(玉千禧, 요한)가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의주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신문 과정에서 황심의 이름이 나와 915()에 그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황심의 자백으로 황사영은 물론 그의 은거지 배론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황사영은 922() 백서를 완성하여 황심의 이름으로 북경 주교에게 보내기로 하고 옥천희를 통해 동지사 행차 때 이를 전달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929() 배론으로 달려온 포졸들에 의해 황사영과 김한빈, 집 주인 김귀동이 모두 체포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황사영이 몸에 지니고 있던 백서도 압수되고 말았다. 결국 황사영은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109일부터 112일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국문을 받았다. 그런 다음 18011210(음력 115) 대역부도죄의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 처참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순교 후 친척들이 황사영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던 가마골(현 경기도 남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안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무덤은 1980년 현지에서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편 순교 이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숙부 석필은 경흥으로, 모친 윤혜는 거제로, 부인 명련(난주 마리아)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집안의 노비들은 갑산ㆍ산수ㆍ위원ㆍ홍양 등지로 각각 유배되었고, 두 살짜리 아들 경한(景漢)은 어린 탓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되었다. 이때 명련이 유배를 가던 도중 추자도 예초리의 바닷가 바위 위에 남겨 놓은 경한은 예초리의 오씨 집안 사람에게 발견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명련은 1838년에 사망하여 대정읍 모슬봉 북쪽의 한굴왓에 묻혔으며, 경한은 사망후 예초리에 안장되었다. 현재 제주교구에서는 명련의 무덤이 있는 대정 성지예초리의 경한 무덤을 순례지로 조성해 놓고 있으며, 생전에 그녀가 거처하던 대정의 김씨 집안에 의해 명련이 1839년 예초리의 경한에게 보낸 두 통의 서한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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