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명도회(明道會)

명도회(明道會)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중국 북경에 있는 단체를 모방하여 설립한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
 
명도회의 목적우선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그 다음에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데 있었다(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이것은 명도회가 조선 교우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임을 알려주는 것이고, 교리 연구와 전교가 명도회의 설립 배경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1923년에 간행된 서울교구 지도서, 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에서는 명도회를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Confraternitas doctrinae Christianae)로 번역하고 그 기원은 16세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회는 한국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마다 설립되었는데 한때 대단히 번창하였고 그 목적은 1) 그리스도교 교리를 더 부지런히, 더 완전히 배우는 일, 2) 그것을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는 일, 3) 어린이와 무식한 이들에게 경문과 문답을 가르치는 데 신부를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후, 청년회가 있던 본당에서는 명도회를 설립하여 그것을 대신하도록 권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교리 지식에 뛰어난 정약종을 초대 명도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교리 교육에 대한 주문모 신부의 열의를 짐작하게 한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직전까지 조선에서의 전교는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보다 많은 사람을 입교시키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문모 신부는 회장제(會長制)를 도입하여 교회의 조직화를 도모하였고, 이어 명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그 결과 신앙이 상인층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 4,000명 정도로 추산되던 신자가 1만여 명으로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문모 신부는 이러한 배경과 목적에서 명도회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명도회는 17965월에 1798년 중순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창설시기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황사영 백서추안급국안25황사영 공초경신년(1800) 4월에 명회에서 (신입자) 이름을 보고한 다음”(庚申年四月 明會報名之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명도회가 이때나 혹은 그 얼마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799년 후반부터 18004월까지는 주문모 신부가 지방에 피신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주문모 신부가 명도회를 창설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또 명도회의 활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아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에 창설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79412월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관헌의 추적을 받지 않고 활동하였던 시기는 입국 초창기 6개월 정도였고, 비록 관헌의 눈을 피해 여러 집을 전전하였지만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17965월부터 1798년 중순까지였다. 또 이 기간 동안 그는 북경 교구와 긴밀히 연락하였고, 서울에서도 활발하게 신자들과 접촉하였다. 따라서 주문모 신부가 이러한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주문모 신부는 명도회의 초대 회장에 정약종을 임명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로 교리 지식이 풍부하였으며, 그가 지은 주교요지는 주문모 신부도 중국 교리서인 성세추요보다 요긴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따라서 정약종은 명도회의 목적에 가장 알맞은 적임자였다.
 
명도회에는 남성들만 아니라 여성들도 가입하였다. 이것은 주문모 신부가 명도회에 대해서 회합 장소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할 지도자를 임명하며, 남녀가 따로이 참석할 것을 정하는 등 모든 것을 무게있고 절도있게 조절하였다는 기록이나, 1801년에 순교한 양제궁의 송씨(宋氏)와 자부 신씨(申氏)가 명도회에 가입했다는 기록, 그리고 명도회의 영향으로 입교한 사람 중에 3분의 2가 부녀자였다는 사실에서 여성 지도자의 양성과 관련하여 여성들도 명도회 회원으로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문모 신부 순교 후 명도회 조직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즉 핵심 인물의 순교로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명도회는 박해 이후에도 회원들에 의해 재편되어, 조선 교회의 재건과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정해박해(1827) 때 순교한 이경언(李景彦)의 서한이다. 이 서한은 그가 명도회원에게 보낸 것으로, 이를 통해 명도회가 이 시기까지 지속되었고, 또 각지의 회장에게 안부를 묻는 것으로 보아 지방에까지 확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초기 명도회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1926년 폴리(Polly, 沈應榮)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가 있다. 한편 오늘날 각 교구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도회또는 명도원과 같은 단체는 이름만 같을 뿐 초기 명도회와 직접 관계는 없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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