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1773년 예수회 해산 - 클레멘스 14세, Clement XIV, 1705-1774(재위 1769-1774)

1773년 예수회 해산 - 클레멘스 14, Clement XIV, 1705-1774(재위 1769-1774)

 
예수회를 금지시키는 데 동의했기 때문에 주로 논란이 있어 왔던 교황 클레멘스는, 비록 매우 원칙적이고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기는 했어도,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과의인 로렌초 강가넬리와 안젤라 세라피노의 아들인, 지오반니 빈센초 안토니오 강가넬리는 17051031일에 이탈리아 리미니 근처의 상트 아르칸젤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클레멘스 14세로 176964일부터 1774922일 로마에서 죽던 날까지 통치했다.
 

어려서 고아가 된 지오반니는 친척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리미니의 예수회 학교와 우르비노의 피아리스트회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그의 친척 중 하나인 프란체스코수도회 수사와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그 수사의 영향을 받아 17235월 그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1년 후에 우르비노에서 그의 아버지 이름인 프라로렌초로서 엄격한 서약을 행했다.
 
그는 로마의 보나벤투라대학에서 철학과 신학부분의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런 다음 아스콜리ㆍ볼로냐와 밀라노에서 9년 동안 가르쳤다. 1740년에 그는 성 보나벤투라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는 그가 수도회에서 전체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 그를 교황청의 자문으로 앉혔다. 그의 동료들은 1753년과 1759년에 두 번씩이나 그를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했으나 그때마다 그는 거절했다. 그는 1759924일에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받았다. 새로 추기경이 된 그는 파니스페르나에 있는 그의 명의 교회인 성 로렌초교회 근처에서 살았으며, 프란체스코수도회의 청빈한 생활을 계속 실행해 나갔다.
 
이 당시 교회로서는 골치아픈 문제들이 많던 시기였다. 가톨릭이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국가종교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대부분의 정부들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조차 그들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얀센주의자들, 볼테르주의자들 및 백과전서파들은 교황청에 대한 반대운동을 선동했다. 부르봉가(프랑스ㆍ스페인ㆍ나폴리ㆍ프라마의 지배자들)는 공동정책을 펴서 교황의 세력을 구속했다. 교황의 첫 번째 지지그룹인 예수회파가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예수회를 금지시키는 문제는 클레멘스 13세의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1769215일에 소집된 추기경 교황선거회의 논의주제였다. 대단한 세력을 가진 성직자들은 예수회를 지지하는 편과 지지하지 않는 편의 추기경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 명단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 “좋지 못한 자”(즉 예수회 지지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판이 매우 좋은 자로 구분되어 있는데, 추기경 강가넬리의 이름은 그 중 첫 번째 명단에 선출되었다. 1769518, 그는 47표 중 46표로 선출되었다. 그 반대표 하나는 그 자신이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조카인 추기경 카를로 레존니코에게 던진 표였다.
 
예수회에 대한 그의 태도가 추기경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기록상에는, 예수회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어떠한가를 묻는 질문에 클레멘스는 금지조치는 가능하며, 한편 이로울 수도 있으나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 이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답변함으로써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선출된 교황은 528일에 주교로 임명을 받고, 176964일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로 권좌에 올랐다. 교황은 가톨릭 군주들에게 자신의 교황직 수행의 목표를 알리는 글을 친히 썼다. 즉 반종교의 흥세에 대항하여 그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평화를 유지해 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평화유지란 대단한 양보를 의미했다. 그는 스페인 법정의 총신인 추기경 오피지오 팔라비시니를 그의 국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포르투갈과 10년 동안의 관계 단절을 마무리짓고 로마교회와 다시 화합시켰다. 포르투갈 사람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클레멘스는 그들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심지어는 반성직자의 수상인 폼발의 형제인 파울로 드 카르발로 에 멘도자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성직자들은 특히, 클레멘스를 설득하여, “교회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여”(그가 말했듯이), 1773721일자 예수회 금지교서인 Dominus ac Redemptor(주와 구세주)를 발표했다.
 
[예수회의 해산은 프랑스에서 계몽사상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에 계몽사상가들의 승리를 의미했다. 18세기에 예수회는 계몽사상가들의 가장 큰 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수회는 그들의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 교회 내외의 다양한 적들에 둘러싸이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결국 그들의 축출을 이끌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고립은 그들의 종교관과 사상의 차이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예수회가 희생된 면도 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한 예수회는 당시 경쟁자인 얀센주의자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열린 종교를 추구했다. 또한 지상에서의 행복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인정, 그리고 신의 산물로서 인간의 진보에 대한 긍정 등은 당시 계몽사상과도 유사하였다. 그러므로 예수회와 당시 계몽사상가들의 갈등 그리고 예수회의 추방은 일종의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17747월에 클레멘스 14세는 또 다른 부르봉가인 루이 16세를 지지하며, 그에게 베산콘, 오랑쥬, 브리타니 및 부르군디의 주교관구에 주교들을 임명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프랑스에서는 바로 그 당시에 수도회들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왕의 칙령, 교황의 훈령 및 개혁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수도회들에게 더 이상 수련수사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다른 수도회와 합병하거나 또는 그들의 엄격한 조직을 완화시키라는 통고가 주어졌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 전종호, “예수회의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 le Grand)’와 프랑스의 계몽주의”, 서강인문논총41, 2014.
- 전종호, “18세기 프랑스문학과 예수회”, 서강인문논총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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