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1777년,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교리연구회

1777년,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교리연구회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배경이자 기원이된 강학.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이 이끄는 성호학파의 신진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문 연구 모임으로, 주어사(현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와 그 너머에 있는 천진암(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소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그 중에서도 1779년 겨울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이 참석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포함한 서학이 본격적으로 연구 토론된 주어사 강학이 교회 창설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성호 이익의 제자인 녹암(鹿菴) 권철신이 이끄는 신진 학자군, 즉 녹암계는 1776(영조 52) 전후로 형성되었다. 가장 먼저 기록에 나타나는 김원성(金源星), 이기양(李基讓)의 아들 이총억(李寵億), 이존창(李存昌, 루드비코 곤자가), 홍낙민(洪樂敏, 루가),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이익의 외손인 이윤하(李潤夏, 마태오),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이벽, 권철신의 조카 권상학(權相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강학을 통해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였는데, 이러한 강학은 그 이전부터 성호학파 안에서 널리 애용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특히 이벽과 정약용은 일찍이 천진암을 자주 찾아 학문을 연구하곤 하였으며, 이 천진암은 주어사와 함께 녹암계의 강학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두 절이 모두 권철신의 집이 있던 양근의 한감개(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나 이벽이 살았던 광주, 정약용이 살았던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경기도 광주군과 여주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앵자산(鶯子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사찰 천진암 주어사(19622南相喆의 조사로 위치했던 그 정확한 터가 밝혀짐)에서 진행된 연구모임으로 권철신ㆍ정약전ㆍ이벽 등이 핵심 맴버가 되었다.
 
서학 연구와 관련해서는 이들 강학 중에서도 1779(己亥年, 정조 3) 겨울에 열린 주어사 강학을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이 해의 강학이 천진암이 아니라 주어사에서 개최된 이유는 눈이 많이 내린 탓에 권철신이 산 너머에 있는 천진암까지 가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성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이벽이 강학 소식을 듣고 산 속의 한 외딴 절을 찾아갔으나, 강학 장소가 아닌 것을 알고는 발길을 옮겨 그 산 뒤쪽의 산허리에 있는 절을 찾아가야만 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이벽은 자신이 평소 잘 알고 있던 천진암(한 외딴 절)을 찾아갔다가 산(즉 앵자봉)을 넘어 강학 장소인 주어사(산 뒤에 있는 절)를 찾은 것으로 이해된다. 또 정약용은 당시의 강학 장소를 주어사혹은 천진암ㆍ주어사로 기록하였는데, 이 모두 주어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강학 시기를 다블뤼 주교는 ‘1777으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정약용은 기해년(1779) 겨울로 기록하였고, 현존하는 만천유고안의 십계명가천주공경가의 제목 협주에는 기해년 납월(12)’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정약용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약용의 기록에 따르면, 1779년의 주어사 강학에는 녹암계의 스승인 권철신을 비롯하여 정약전ㆍ김원성ㆍ권상학ㆍ이총억 등 여러 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나 정약용 모두 뒤늦게 강학 소문을 듣고 달려온 이벽이 이 강학에 합류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들 외에 이승훈이나 정약종ㆍ약용 형제가 강학에 참석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이벽이 동 교리연구회에 참여하는 경로와 교리연구회의 진행된 모습 등을 기술하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보고서의 한 기록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유년(丁酉年, 1777; 정약용 기록의 1776년과는 차이가 있음)에 권철신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정약전 등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산골에 있는 그윽한 절에서 철리(哲理)의 깊은 뜻을 서로 토론한다 함을 듣고 이벽은 몹시 추운날에 백리나 되는 눈이 쌓이고 험한 산길을 야음(夜陰)과 호랑이떼들과 싸우면서 걸어가 그날밤으로 모임에 참가하였다.
연구회는 10일 이상을 두고 계속되어 천(), 세계, 인성(人性) 등에 대하여 서로 토론했다. 옛 성현들의 학설을 끌어내어 일일이 토의하였는데, ()이 주장하면 을()이 반박하여 그칠줄을 몰랐다. 이때 그들은 북경에서 가져온 과학ㆍ산수ㆍ종교에 관한 예수회 신부들이 지은 책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는 천주의 섭리와 영혼이 없어지지 않음을 가르치며, 칠악(七惡)을 이겨내어 덕()을 쌓는 것을 가르쳐주는 천주실의, 성리장전, 칠극등 유명한 천주교 교리서도 있었다. 여태까지의 확실치 않고, 앞뒤고 서로 맞지 않는 점의 많은 유교에 관한 책만을 읽고 있던 그들은 이 새로운 진리의 빛을 맛보자 모두 천주교가 훌륭하고 높고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것임에 감격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곧 그 가르침에 따라서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드리고 매월 7, 14, 21, 28일에는 일을 쉬고 오로지 깊이 생각하며 가만히 묵상에 잠겨 재계(齋戒)를 엄격히 지키려고 애썼다.”
 
마침내 이 모임을 통해 초기 천주교학자들의 교리 이해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고 하나씩 둘씩 단순한 학문적 체계나 새로운 사상에 대한 연구의 단계를 넘어서서 신앙적 고백, 혹은 신앙행위의 표현으로까지 발전되고 있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서양의 전교신부나 전도자의 지도로 이루어진 집회가 아니라 오로지 한국인 학자들의 자력으로 교리를 이해하고 이를 발전시켜 한국천주교의 창설의 초석을 놓았던 놀라운 사건으로 그 지니는 바 의미를 미루어 살필 수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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