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윤유일(尹有一), 1760~1795

윤유일(尹有一), 1760~1795

 
을묘박해 순교자. 한국 교회 최초의 밀사. 세례명은 바오로. 또 다른 이름은 윤인박.
 

1760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윤장(尹鏘)을 따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한강개로 이사하였다. 그는 한 마을에 살던 권철신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86년 이승훈 등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항검에 이해 평신도의 성사 집전이 교리에 위배된다는 의문이 제기되자, 이승훈 등은 이 문제를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기로 하고, 1789년 예비 신자였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할 밀사로 선정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윤유일은 1790130일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던 그랑몽 신부를 만나기 위해 북당(北堂)으로 갔다. 그러나 예수회가 중국에서 철수하게 되어 그랑몽 신부는 이미 광동으로 떠나고 없었다. 윤유일은 대신 라자로회의 선교 단장인 로(Raux, 羅廣祥) 신부를 만났고, 이어 남당(南堂)으로 가 구베아(Gouvea, 湯士選) 북경 주교에게 이승훈의 편지와 함께 조선 교회의 탄생 소식을 알렸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179029, 북당에서 로 신부로부터 조건부 세례를 받았고, 같은 날 구베아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도 받았다. 대부는 예수회원이며 화가인 판지(Panzi) 수사였는데, 그는 윤유일의 모습을 그려 로마로 보내기도 하였다.
 
17907월 윤유일은 다시 한번 북경에 파견되었다.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은 조선 교회에서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재차 윤유일을 북경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라는 예비 신자와 함께 성절사겸 사은사(聖節使兼謝恩使)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간 그는 구베아 주교를 만나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의 두 번째 방문을 받고 마침내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윤유일은 1791년 봄 동지사행이 돌아가는 길에 책문(柵門)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179011월 미사 경본ㆍ성작ㆍ제의 등과 포도주 담그는 법을 배워 귀국하였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17913월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선발하였다. 1791년 봄 윤유일은 약속대로 레메디오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책문까지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 가운데 1793년 말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신부 영입을 위해 다시 한번 지황(池璜)과 백요한(혹은 박요한)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그 결과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었는데, 이때 윤유일은 의주까지 마중을 나갔고, 지황ㆍ최인길 등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안내하여 17951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179545일 부활축일에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고, 윤유일ㆍ최인길 등과 함께 양근ㆍ전주ㆍ내포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한영익(韓永益)의 고발로 조정에 알려지자, 비밀리에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는 교우들의 연락을 받고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으며, 그를 대신해 윤유일ㆍ지황ㆍ최인길이 체포되었다. 결국 윤유일 등 3명은 1795628일 포청에서 비밀리에 장살된 뒤 강물에 버려졌다. 현재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마을)에 그의 가묘가 세워져 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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