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김범우(金範禹, 1751-1787)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인 김범우(토마)와 아우인 이우(履禹, 바르나바, ?-1801), 현우(顯禹, 마태오, ?-1801). 김범우의 자는 정지(正之), 본관은 경주. 이우와 현우는 김범우의 서제(庶弟)로 여섯째와 일곱째였다.
 

김범우는 1751(영조 27) 서울 남부의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성당 부근)에서 중인 역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역임했으나, 부친 의서(義瑞)가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사역원의 역원 판관(譯院判官)에 오르면서 역관 집안으로 이름을 내게 되었다.
 
김범우는 집안의 장남으로 16세 되던 1767년에 천녕(川寧) 현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듬해 인고(仁考)를 낳았다. 그리고 1773년 역과 증광시에 합격하여 종6품인 漢學偶語別主簿)에 올랐으며, 1783년에는 셋째 아우 적우(績禹)가 역과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이벽, 이승훈 등 초기의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이 세례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라고 설명되는 9()의 세례식에 이어 두 번째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와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존창, 최창현, 최인길, 지홍(池洪) 등이었다.
 
세례를 받은 뒤 김범우는 즉시 윤지충, 최필공, 김종교, 홍익만, 변득중, 허속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다. 또 아우인 이우와 현우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으며, 스스로 교리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1784년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하였다. 이후 초기 신자들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785년 봄 이벽의 주도로 집회를 갖던 이승훈, 정약전ㆍ정약용 형제, 권일신ㆍ권상문 부자, 김범우 등은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다.
 
당시의 형조판서 김화진은 압송되어 온 사람들이 대부분 남인 양반 집안의 자제들인 것을 알고는 대부분 훈방 조치하였지만, 중인인 김범우만은 그대로 투옥하고 형벌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 앞에 나가 압수한 성상을 돌려주고 김범우와 함께 자신들을 처벌해 달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최인길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으나 형조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형조판서는 김범우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유배형을 언도하였다.
 
당시 김범우의 유배지로 결정된 곳은 충청도 단양(또는 경상도 밀양의 단양)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사망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 인고는 경상도 밀양군 삼량진읍 굴암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한편 김이우는 장성한 뒤에도 혼인하지 않고 최필제, 이용겸, 손경윤, 현계흠 등과 교류하면서 전교 활동에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아우 김현우와 함께 그를 만나 성사를 받고, 주 신부가 지방으로 피신하기 전에는 얼마 동안 자신의 집에 피신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형제가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후 이우는 포청의 옥에서 문초를 당하다가 장사(杖死) 순교하였고, 현우는 72(522) 강완숙, 강경복, 문영인 등 8명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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