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최초의 한국인 세례자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한 사람. 세례명은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이고,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이승훈은 1756(영조 32) 9월 한양 반석방(盤石坊) 중림동(中林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제물포에서 거주하다가 조부 이광직(李光溭, 1692-1769)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부친 이동욱(李東郁, 1738-1794)이 이용휴(李用休)의 딸인 여흥 이씨와 혼인하면서 뒷날 남인의 중심 인물이 되는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 이승훈의 외숙이 되었다. 그 결과 이승훈은 외가쪽인 성호 이익의 학문을 잇게 되고, 이익의 제자인 녹암 권철신이나 이가환의 학문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또 자신은 양근 마재(馬峴)에 살던 정재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정약전ㆍ약용 형제와 처남ㆍ매부 사이가 되었다.
 
일찍부터 이승훈은 외숙 이가환의 영향을 받아 서학서들을 접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서양의 천문ㆍ역상ㆍ특히 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1783년 말에 동지사 서장관으로 입연(入燕)하는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천주교 교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지우 이벽이 이승훈을 찾아왔고, 북경에 가면 선교사들로부터 영세를 받고 서양 서적을 얻어오도록 부탁하였다. 이때 이승훈은 그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하였다. 1221일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즉시 북당(北堂)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특히 궁정의 수학자로 활동하였던 예수회 선교사 그랑몽(J. J. de Grammont, 梁棟村) 신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필담을 통해 그에게 서양 수학을 설명해 주면서 동시에 교리도 가르쳐 주었으며, 이러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이승훈은 점차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들어갈 수 없었던 조선의 젊은 학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랑몽 신부는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7842월경 이승훈으로부터 부친의 동의를 확인한 뒤, 그의 세례명을 베드로로 정하고 세례를 주었다. 이로써 그는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3월 말에 귀국하면서 북경에서 얻은 서양 기기와 교회 서적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그 중에서 교회 서적들은 초기의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반면에 한편으로는 이승훈의 죄목이 되기도 하였다. 1784년 겨울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의 주도로 첫 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으니, 이것이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다. 당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벽과 권일신ㆍ정약용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친지들에게 교리를 전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홍낙민, 최창현, 김범우 등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권철신을 비롯하여 충청도의 이존창, 전라도의 유항검도 영세를 하였다. 이제 천주교의 종교 운동은 이승훈과 이벽의 주도 아래 빠르게 정착되어 갔고, 김범우가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해 줌으로써 초기의 신앙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이전되었다.
 
1785년 봄 명례방에서 있던 집회가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면서 이승훈을 비롯하여 권일신ㆍ이벽ㆍ정약종ㆍ이윤하 등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고, 김범우가 단양으로 유배된 추조 적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친이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분서의 시를 짓자, 이승훈은 벽이문벽이시를 지어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뜻을 주변에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이승훈은 다시 신앙생활을 회복하였고, 1786년 봄에는 동료들과 함께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가장 먼저 이승훈이, 그리고 홍낙민ㆍ권일신과 정약전 등이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최창현은 교회의 총회장이 되었다. 또 이존창ㆍ유항검도 신부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이후 가성직자단은 1787년에 정약전이 그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해체되었고, 이승훈과 지도층 신자들은 교회를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이승훈은 1787년 반촌(泮村)에서 정약용과 교리를 연구하다가 이기경에게 발각되었는데, 이 사실이 이듬해 봄 홍낙안의 폭로에 의해 밝혀지면서 다시 한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것이 이른바 반회사건(泮會事件)이다.
 
이승훈은 25세 때인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1790년에서야 음서로 의금부 도사가 되었으며, 다음에 서부도사를 거쳐 624일 평택 현감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이 해에 진산사건이 일어나면서 이승훈은 평택에서 소환되어 문초를 받아야 하였고, 그의 서양 서적 구입과 반회사건을 탄핵하는 상소가 연이어 나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1791118일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은 1792년 초 불배성묘(不拜聖廟) 문제로 다시 한 차례 곤욕을 치러야만 하였다. 이 사건은 그가 평택에 부임한 뒤 향교의 문묘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통문이 나돌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실제로 당시 교회 안에서는 북경 주교의 지시에 따라 공자 숭배와 조상 제사가 금지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이승훈은 점차 교회 활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794년 말에 이루어진 주문보 신부의 입국 때에도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주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들은 이승훈은 이 사실을 고변하려고도 하였으며, 회두하고 교회 활동에 참여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음해 여름 을묘박해가 일어나 주 신부가 피신하고 윤유일 등이 순교하자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배척하는 이들은 이승훈과 함께 이가환ㆍ정약용을 사학의 3으로 지목하였고, 서적 구입과 반회 사건, 서적 간행 등을 이승훈의 3대 죄안으로 거론하면서 공격하였다. 결국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 725일 이가환을 충주 목사로, 정약용을 금정 찰장으로 좌천시켰다. 이승훈은 1795년 예산으로 유배되어 천주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유혹문을 지어 널리 배포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는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자 주자백녹동연의를 지어 유학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애써 밝히려 하였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승훈은 다시 사학의 원흉으로 지목되었으며, 210일에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후 18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국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특히 예산 유배 이후의 일을 거론하면서 발명하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226(양력 48)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이승훈의 시신은 제물포의 반주골(현 인천 남동구 만수동)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80년 뒤인 1981년에 현지에서 그의 유해가 발굴되어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반주골의 무덤 자리 앞에는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한편 그의 셋째 아들 신규는 1816년경 정하상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나 여러 차례 시련을 겪다가 1868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동시에 그의 아들 재겸도 유배 도중에 사망하였다. 또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의는 1837년 정하상의 인도로 세례를 받은 뒤 앵배르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한때는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기해박해 후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1868년에 체포되어 신앙을 거부하였지만 처형되었다.
 
이승훈은 1801년의 문초 과정에서 천주교의 지도층을 밀고하도록 강요받았지만, 결코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신앙을 분명하게 증거한 적도 없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문초 과정에서 1794-1795년 당시의 이승훈에 대해 반교’(叛敎)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이는 신앙을 저버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정약종은 이와 관련하여 이승훈은 1791년 이후 신앙에 전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황사영은 이승훈의 순교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였다. 따라서 그의 순교 여부는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여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