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일 목요일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윤동주(尹東柱, 19171230~ 1945216)
 

1917
 
  • 1230,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尹永錫)과 김용(金龍)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그의 증조부(윤재옥)가 함북 종성에서 북간도 자동(子洞)으로 이주한 것이 1886년이었고 명동으로 옮긴 것은 1900년이었다. 이 해는 명동을 민족운동의 한 거점으로 만든 네 가문이 이주한 바로 다음해였다. 이것은 윤동주의 선조들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뭉친 동지들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장로는 명동의 기둥들 가운데서는 학문이 별로 없는 편이었지만, 무장의 기골과 천병만마를 덕으로 거느릴 수 있는 장군의 금도를 지닌 극히 서민풍의 인물이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金躍淵) 목사는 만독한 유학자였지만, 그도 무고나 가문의 출신이었다. 명동의 초대 개척자들은 거의 동학을 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학으로 이루지 못한 민족의 구원을 기독교가 업고 들어온 신학문으로 이룩하려고 했다.
  •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ㆍ김약연ㆍ남종구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 네 가문의 식솔 140여 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1925
 
  •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
 
  •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였다.
 
1931
 
  •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
 
  • 달라즈[大拉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용정촌 은진중학교는 영국 조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학급회나 학우회 등 온갖 모임을 애국가 합창으로 시작해도 좋은 곳이었다.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혼연일체가 된 명동의 연장이었다.
  • 4,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 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
 
1934
 
  • 1224, 은진중학교 2학년 시절 삶과 죽음, 초 한 대라는 시 두편을 썼다.
  •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로 시작되는 삶과 죽음이라는 시에는 노래의 끝의 공포가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역사의식에 존재론적-실존적 차원의 깊이가 일찍부터 더해진 것이다.
  • 초 한 대에서 그는 예수의 탄생을 생각하면서 그를 위대한 향내를 남기면서 심지까지 타들어가는 깨끗한 제물이라고 고백한다. 이 시는 이미 그 자신이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에 흡수되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시대를 내다보는 역사의식마저 번뜩이고 있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팔락이는 촛불에 쫓겨 창구멍으로 도망치는 것을 그의 눈은 이미 보고 있었다.
 
1935
 
  • 9,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해 여름 숭실중학교 가을학기 편입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자격밖에 얻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936
 
  • 1, 일제 총독부 당국이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윤산온 선교사를 교장 직에서 파면하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학교가 무기 휴교에 들어갔다.
  • 4, 학생들은 아침 예배시간에 들고 일어났다. 그는 퇴학처분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 3,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용정에서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는 문익환의 회고처럼 그들이 편입한 광명학원은 대륙낭인 출신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였다.
 
1938
 
  • 2, 광명중학을 졸업하였다.
  • 아버지의 반대를 꺾고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그를 의사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반대를 꺾고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41
 
  • 12,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 그는 연전을 졸업하면서 18(정음사판 제1부에 수록됨)을 골라 자선시집을 내려고 준비하였다. 출판이 여의치 않자, 자필로 3부를 만들어 한 부는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한 부는 사랑하는 후배 정병욱 교수에게 주고 한 부는 자기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정 교수가 일본군에 징병되어 들어가면서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것이 해방 후에 출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1942
 
  • 3,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윤동주가 진학한 릿쿄대학은 성공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 10, 도쿄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입학하였다. 도시샤 대학은 윤동주가 좋아하던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1943
 
  • 7,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쿄오토제대 사학과에서 역사를 공부하던 고종 송몽규와 함께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 그의 죄목은 송몽규와 함께 한국 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 특고경찰은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5
 
  • 216, 숨을 거두었다.
  • 36,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8
 
  •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 세워졌다.
 
1990
 
  • 815,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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