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사는 원래 일제 시대에 근택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이 재빨리 접수해 당 본부 간판을 걸고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발행하였다.
1946년 5월 4일 한 위조지폐단이 뚝섬에서 검거되었는데, 경찰은 위조지폐단의 석판기 7개돠 인쇄판을 압수하고 김창선, 이재광 등 26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해방 후 위조지폐사건은 자주 일어났지만, 이 사건은 김창선이라는 인물 때문에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김창선은 조선공산당 당원이었으며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에서 평판(平版) 담당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판사 직원 14명이 검거되면서 이 사건은 엄청난 시국사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공산당의 위조지폐사건으로 발표했다. 미군정의 발표에 따르면, 8ㆍ15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당 자금, 선전운동 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 방면에서 자금 조달 방법을 모색하여 오던 중 조선정판사에 지폐 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공산당원인 박낙종을 내세워 정판사를 접수한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천 200만원을 찍어냈다는 것이다.
1946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에 조선공산당이 개입하였다는 미군정의 발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는 단순한 위조지폐사건을 좌익세력의 탄압을 위하여 조작, 확대한 것이라는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부인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5월 18일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7월 29일 첫 재판이 열렸을 때 공산당원들은 법원 구내에서 돌팔매질을 하는 등 소요를 일으켜 시위대가 2명이나 숨졌다. 법정은 범인으로 체포된 공산당원 16명에겐 최고 무기징역에서 최저 10년형을 선고했다. 변호사 윤학기는 “이 재판은 죽은 재판이며 연극이나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다”는 발언이 문제가 돼 미군정 치하에서 징계를 받은 첫 변호사가 되었다.
미군정기의 최대 의혹사건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사건 발표 때부터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문제가 드러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더 이상 진위가 가려지지 못하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정치적 사건’으로 보는 서중석은 “조선 정판사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소량의 위조지폐를 만든 것은 사실 같지만, 이 사건에 조선공산당의 간부가 간여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당시 조선공산당이 돈이 궁핍했다는 자료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위폐를 찍어 사회혼란을 조장하려 했다는 부분도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에 당황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는 매우 온건한 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것은 전평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미소공위 휴회 후의 제반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당시 검찰과 사법부의 간부들은 편파적으로 현상유지 세력을 비호하고 현상변화 세력에 제동을 걸려고 하였으며, 이 점은 정치적 사건인 경우에 더욱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진영은 공개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해방 이후 견지하여 오던 전술을 정당방위를 위한 역공세라는 ‘신전술’로 바꾸면서 급진화ㆍ지하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정판사사건과 신문 발행 허가제에 이어 조선공산당의 배후 거점으로 판단한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을 폐쇄시키기로 결정했다. 소련 총영사관의 직원들은 1946년 7월 2일 모두 서울을 떠났으며, 영사 자리는 공석인 가운데 영사관을 이끌었던 부영사 샤브신은 평양으로 옮겼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제1권』, 242-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