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8일 토요일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1946년 5-7월]

정판사는 원래 일제 시대에 근택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이 재빨리 접수해 당 본부 간판을 걸고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발행하였다.
 
194654일 한 위조지폐단이 뚝섬에서 검거되었는데, 경찰은 위조지폐단의 석판기 7개돠 인쇄판을 압수하고 김창선, 이재광 등 26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해방 후 위조지폐사건은 자주 일어났지만, 이 사건은 김창선이라는 인물 때문에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김창선은 조선공산당 당원이었으며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에서 평판(平版) 담당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판사 직원 14명이 검거되면서 이 사건은 엄청난 시국사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946515일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공산당의 위조지폐사건으로 발표했다. 미군정의 발표에 따르면, 815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당 자금, 선전운동 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 방면에서 자금 조달 방법을 모색하여 오던 중 조선정판사에 지폐 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공산당원인 박낙종을 내세워 정판사를 접수한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원을 찍어냈다는 것이다.
 
1946516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에 조선공산당이 개입하였다는 미군정의 발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는 단순한 위조지폐사건을 좌익세력의 탄압을 위하여 조작, 확대한 것이라는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부인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518일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729일 첫 재판이 열렸을 때 공산당원들은 법원 구내에서 돌팔매질을 하는 등 소요를 일으켜 시위대가 2명이나 숨졌다. 법정은 범인으로 체포된 공산당원 16명에겐 최고 무기징역에서 최저 10년형을 선고했다. 변호사 윤학기는 이 재판은 죽은 재판이며 연극이나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다는 발언이 문제가 돼 미군정 치하에서 징계를 받은 첫 변호사가 되었다.
 
미군정기의 최대 의혹사건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사건 발표 때부터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문제가 드러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더 이상 진위가 가려지지 못하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정치적 사건으로 보는 서중석은 조선 정판사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소량의 위조지폐를 만든 것은 사실 같지만, 이 사건에 조선공산당의 간부가 간여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 조선공산당이 돈이 궁핍했다는 자료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위폐를 찍어 사회혼란을 조장하려 했다는 부분도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에 당황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는 매우 온건한 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것은 전평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미소공위 휴회 후의 제반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당시 검찰과 사법부의 간부들은 편파적으로 현상유지 세력을 비호하고 현상변화 세력에 제동을 걸려고 하였으며, 이 점은 정치적 사건인 경우에 더욱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진영은 공개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해방 이후 견지하여 오던 전술을 정당방위를 위한 역공세라는 신전술로 바꾸면서 급진화ㆍ지하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정판사사건과 신문 발행 허가제에 이어 조선공산당의 배후 거점으로 판단한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을 폐쇄시키기로 결정했다. 소련 총영사관의 직원들은 194672일 모두 서울을 떠났으며, 영사 자리는 공석인 가운데 영사관을 이끌었던 부영사 샤브신은 평양으로 옮겼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제1, 242-246.

2023년 10월 27일 금요일

임시정부의 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 [1946년 3월 1일]

소련 측은 194612, 4, 5일의 3차에 걸쳐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
 

# 조만식을 설득하는 소련측과 북한의 지도부

 
김일성도 12월 말 빈번하게 조만식을 방문하였으며, 조만식의 오랜 제자인 최용건은 19번을 찾아가 설득하였지만 조만식은 끝내 모스크바 의정서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였다. 조만식은 결국 15일부터 연금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 조만식과 김구의 비교

 
[박명림은 남한에서 조만식에 비유될 수 있는 사람은 김구일 것이나, “이승만의 반탁이 반공과 연결된 것이었다면 김구의 반탁은 임정 헤게모니 장악과 직결된 것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조만식과 김구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 부활과 생존의 무기로 활용하려 한 한민당과 친일파를 제외하더라도 이승만의 것이 반공주의와, 김구의 것이 정권장악과 연계된 것이라면 반탁민족주의의 전형은 조만식이 가장 가까웠다. 그는 대통령을 제의받았음에도 탁치를 거부하였다. 김구가 임정의 법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탁치를 거부하였을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확언할 수 없다. 당시의 자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를 때 김구는 임정 법통을 인정받았다면 탁치 결사반대를 거둬들였을 것이다.”]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 사실상의 단독 정부

 
조선 점령군사령부는 28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북한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했다.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의 6촌 동생으로 목사)이 선출되었다.
 

# 김일성에 대한 폭탄테러 미수사건

 
194631,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여기서 김일성에 대한 폭탄테러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
 

# 임시정부와 백의사

 
이 테러 미수사건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염동진이 이끄는 백의사(白衣社)라고 하는 전문 테러단체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에 따라 저지른 것이었다. 백의사는 3명의 테러 요원을 평양에 보냈는데, 그날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가나 김형집이라는 열여덟 살 소년이었다.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도 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양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
 
암살단은 임정 내무부장(신익희) 명의로 215일에 발급된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신임장을 갖고 있었다. 이 테러가 임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더불어 이승만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 김구와 이승만을 비난하는 북한측

 
만고에 용서할 수 없는, 조선민족을 조선놈 자기들 손으로 살해하는 팟쇼테로강도단의 철천의 죄악은 조선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인민의 가슴속에 영영히 씻을 수 없는 슬픔과 원한과 분노를 남기고 있다. 팟쇼테로강도단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도당들이냐?”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조선 봉건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제1], 228-231.

2023년 10월 26일 목요일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쟁 [미군정기]

사회주의자들과 찬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기보다는 민족해방운동에 좀더 충실했던 세력이었으며 자주독립의 옹호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 논쟁을 계기로 친일파를 포함한 우익은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로 전개되어온 식민지 시기 이래의 정치지형을 좌익 대 우익의 대립으로 바꿔놓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우익은 사회주의자들이 거의 배타적으로 향유해 온 민족적 대변자로서의 위치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한홍구)
 
반탁의 상징 김구

반탁은 김구로 상징되었고, 김구는 반탁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반탁은 의심의 대상이 되질 못했고, 찬탁은 타도 이외의 다른 대접을 베풀기 어려운 매국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찬탁 세력에겐 찬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진정정이 없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제1], 202-203.

신탁통치에 대한 반응과 송진우 암살

19451228일 미ㆍ소ㆍ영 세 나라 수도에서 발표된 모스크바 결정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국내에서 격렬한 찬ㆍ반탁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동아일보최악의 오보

 
동아일보의 최악의 오보는 1227일에 나왔다. 1227일자 머리 기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할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가 공식 발표된 것이 서울 시각으로 1228일 오후 6시이니 이 기사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 주한미국 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나온 이른바 관측보도였다. 이 기사는 삼상회의 당시 미ㆍ소 양측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 보도였다.
 

# 실수인가 의도적인가?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그 당시부터 국제적 모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후 일부 연구자들은 배후가 있었거나 최소한 당시 언론기관을 통제했던 미국의 고의적인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오보와 다른 신문들의 선동이 가세한 후, 남한 사회는 말 그대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 들썩였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신문들의 오보와 선동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위력은 컸다.
 

# 임시정부 요인들의 신탁통치 반대입장

 
임시정부 요인들은 28일 밤 경교장에서 주석 김구를 중심으로 철야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을 결정했다. 29일엔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관 조소앙 명의로 탁치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위배되므로 결사 반대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미국과 영국, 소련과 중국 등 4대 강국 원수들에게 발송했으며, 국민 앞으로 탁치 순종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수호하자. 외국 군정 철폐를 주장하자는 등의 9개 행동강령을 시달했다.
 

# 신탁통치 반대의 방법론에 있어서 임시정부파와 한민당파의 입장

 
1229일 밤 경교장에선 좌우를 망라한 각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대표 약 200명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는데... 그날 회의에선 신탁통치 반대엔 이견이 없었지만 반대의 방법론에 있어선 미군정을 임시정부가 접수하자는 임시정부파미군정은 부인하지 말고 국민대회를 열어 반대여론을 미국에 알리자는 한민당파가 격돌했다.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진 뒤, 임시정부가 주권을 행사하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는 한편 상인들도 모두 출시해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이 대세로 자리잡아갈 무렵 송진우가 냉정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강원용은 송진우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 송진우의 냉정을 촉구하는 발언

 
여러분의 그런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우리가 경박해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의정서의 내용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ㆍ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에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간의 전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는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것을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 송진우 암살당하다

 
1230일 새벽 615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였던 송진우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한현우 등 6명이었고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범행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으며, 배후는 없지만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의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다는 주장은 29일 밤 경교장 회의에서 나온 송진우의 발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송진우의 이같은 발언엔 하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229, 하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자문위원인 송진우를 불러 임시정부에 대한 설득을 당부하였는데, 하지는 후일 송진우가 떠난 다음에 그의 친우들에게 자신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죽고 말았다고 말했다. 하지는 한현우의 배후로 임정 세력을 지목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제1], 145-153.

박태선ㆍ문선명ㆍ나운몽... 신흥종교의 성장 [1950년대]

1950년대 중반 신흥 종교의 성장은... 기성 교회의 직무 유기가 촉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신흥종파운동의 성공 요인

 
대표적인 신흥 종교는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운동 등이었다. 노치준은 이런 신흥종파운동이 신도들을 끌어들인 4대 요인으로 신흥 종파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성격, 신도들이 경험한 신비스러운 특수 체험, 신흥 종파가 제공한 공동체적 분위기, 한국 민족의 자부심 혹은 사명의 강조 등을 지적하였다.
 
노치준은 한국 전쟁 후의 위기 상황에 처한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요구하였고, 그러한 요구에 성공적으로 응한 신흥 종파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 박태선과 신앙촌

 
박태선은 19551월부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박태선은 안수를 통해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났는데, 윤치영과 임영신 등 저명 인사들이 그러한 체험에 대한 간증을 하기도 했다. 1955년 한 신도는 박태선의 설교하는 외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얼굴은 희고 맑고 키는 커다랗고, 정열에 빛난 눈으로 수만 군중을 노려보며 강단에 우뚝 서 있을 대에는 마치 하늘 천사 미카엘이 거기 서 있는 듯, 마귀도 당장 물리칠 듯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안심과 흥분을 준다.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때도 많다. 입을 열면 그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 인간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놀라운 광경을 나는 눈으로 보았다.”
 

# 문선명과 통일교

 
문선명은 195114후퇴 때 남하하여 부산에서부터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19545월에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설하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문선명의 한 신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증거해주신 그분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감격스러워 자력에 끌리는 듯 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발등을 문질러주고 싶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져주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습니다.”
 

# 나운몽과 용문산 기도원

 
나운몽은 625전쟁 시기에 전도 운동을 시작해 교세를 확장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집회를 이끈 어느 교회의 뜨거운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설교를 마치면서 통성기도 시간에는 온 장내가 뒤덮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모두 꿇어앉아 드리는 기도이면서 엉덩방아를 안 찧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꾸두등거리는 소리와 아울러 우는 소리, 가슴을 치는 소리, 이 모든 소리는 아집과 죄악성이 무너지는 소리라고나 해야 마땅할 것이다.”
 

# 카리스마 지도력, 신비스러운 체험

 
이 신흥 종교 지도자들의 카리스마도 신비스러운 특수 체험과 관련돼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러 종류의 특수 체험들이 주장되는 게 이 신흥 종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었다.
 
19553월에 열린 남산 부흥집회를 박태선이 인도할 때 썩은 뼈 타는 냄새가 나다가 백합화 향기가 가득하고 이슬이 내리는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 아버지가 통일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박해해 소나무에다 한 처녀를 철사줄로 꽁꽁 묶어 놓았는데 한밤중에 사도 바울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철사줄이 흐느적거리면서 풀어져버렸다는 이야기, 용문산 집회에서는 하늘을 향해 올라간 사다리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사진에 찍혔다는 이야기 등등.
 

# 기성교회에 대한 불만

 
신흥종파운동이 기성 교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공동체적 분위기를 제공한 것도 신도들을 끌어들인 주요 이유였다. 신흥종파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기성 교회의 개신교들이었다. 예컨대, 전도관에 온 신도의 89%가 개신교인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기성 교회의 냉랭함과 부패를 비판했다.
 

# 한국 민족의 자부심 혹은 사명 강조

 
신흥종파운동이 한국 민족의 자부심 혹은 사명을 강조한 것도 전쟁 중 구겨질대로 구겨진 민족적 자존심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박태선은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시고 새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이며 신앙촌은 지상천국을 이루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원지라고 주장했으며, 통일교에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동방의 나라가 한국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맥락에서 신흥종파운동에서는 일제 36년과 625전쟁도 더 큰 복을 주기 위한 시련으로 설명되었다. 노치준은 전쟁, 가난, 원조, 억압 등의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와 사명을 가르쳐주는 교리는 확실히 그 종파로 끌어당기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 341-343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