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28일 미ㆍ소ㆍ영 세 나라 수도에서 발표된 모스크바 결정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국내에서 격렬한 ‘찬ㆍ반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동아일보』 최악의 오보
『동아일보』의 최악의 오보는 12월 27일에 나왔다. 12월 27일자 머리 기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할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가 공식 발표된 것이 서울 시각으로 12월 28일 오후 6시이니 이 기사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 주한미국 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나온 이른바 관측보도였다. 이 기사는 삼상회의 당시 미ㆍ소 양측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 보도였다.
# 실수인가 의도적인가?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그 당시부터 국제적 모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후 일부 연구자들은 배후가 있었거나 최소한 당시 언론기관을 통제했던 미국의 고의적인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오보와 다른 신문들의 선동이 가세한 후, 남한 사회는 말 그대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 들썩였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신문들의 오보와 선동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위력은 컸다.
# 임시정부 요인들의 신탁통치 반대입장
임시정부 요인들은 28일 밤 경교장에서 주석 김구를 중심으로 철야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을 결정했다. 29일엔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관 조소앙 명의로 “탁치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위배되므로 결사 반대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미국과 영국, 소련과 중국 등 4대 강국 원수들에게 발송했으며, 국민 앞으로 “탁치 순종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수호하자. 외국 군정 철폐를 주장하자”는 등의 9개 행동강령을 시달했다.
# 신탁통치 반대의 방법론에 있어서 임시정부파와 한민당파의 입장
12월 29일 밤 경교장에선 좌우를 망라한 각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대표 약 200명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는데... 그날 회의에선 신탁통치 반대엔 이견이 없었지만 반대의 방법론에 있어선 미군정을 임시정부가 접수하자는 임시정부파와 미군정은 부인하지 말고 국민대회를 열어 반대여론을 미국에 알리자는 한민당파가 격돌했다.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진 뒤, 임시정부가 주권을 행사하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는 한편 상인들도 모두 출시해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이 대세로 자리잡아갈 무렵 송진우가 냉정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강원용은 송진우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 송진우의 냉정을 촉구하는 발언
“여러분의 그런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우리가 경박해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의정서의 내용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ㆍ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에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간의 전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는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것을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 송진우 암살당하다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였던 송진우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한현우 등 6명이었고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범행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으며, 배후는 없지만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의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다는 주장은 29일 밤 경교장 회의에서 나온 송진우의 발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송진우의 이같은 발언엔 하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2월 29일, 하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자문위원인 송진우를 불러 임시정부에 대한 설득을 당부하였는데, 하지는 후일 “송진우가 떠난 다음에 그의 친우들에게 자신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죽고 말았다”고 말했다. 하지는 한현우의 배후로 임정 세력을 지목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제1권], 145-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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