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東晉, AD. 317~420년)의 역사와 역대 군주
동진(東晉, 317년 ~ 420년)은 중국의 왕조로, 서진이 유연의 한나라(훗날의 전조)에게 멸망한 후, 사마예에 의해 강남에 세워진 진(晉)의 망명 왕조이다.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고 부른다.
1. 건국
317년, 황족 사마예(司馬睿)는 건강성(建康城, 현재 장쑤성 난징시)에서 진왕(晋王)을 칭했으며(318년에 황제로 즉위), 그가 진 원제(晉元帝)이다. 역사는 그를 동진(東晉, Eastern Jin)이라고 부른다.
동진 자체는 강력한 실력을 가지지 못했다. 주로 장강(長江)이라는 자연적인 험준함을 바탕으로 강남(江南)에 치우쳐 안주했으며, 승상 왕도(王導)가 남쪽으로 피난 온 중원(中原)의 사대부들을 규합하고, 남방의 대족(大族)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방과 북방의 대족들 사이에는 늘 충돌이 일어났고, 내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동진 정권은 불안정했다. 한편, 원래 북방에서 진(晋) 왕조에 충성했던 세력들도 빠르게 멸망하거나 스스로 독립적인 정권을 세웠다.
2. 혼란의 시대 : 오호십육국
서진(西晉) 말 유연(劉淵)이 한조(漢趙)를 세운 이래로, 남흉노(南匈奴), 갈(羯), 백노(白奴), 정령(丁零), 철불(鐵弗), 노수호(盧水胡), 탁발선비(拓跋鮮卑), 우문선비(宇文鮮卑), 단씨선비(段氏鮮卑), 모용선비(慕容鮮卑), 독발선비(禿髮鮮卑), 걸복선비(乞伏鮮卑), 구대석호(九大石胡), 대월지(大月氐), 소월지(小月氐), 그리고 파저(巴氐), 강(姜), 부여(夫余), 오환(烏桓), 고구려(高句麗)가 중국 북부의 황하(黃河) 유역 일대에 차례로 62개의 할거 정권을 세웠다. 한족(漢族)이 세운 정권과 합쳐서 비교적 중요한 16개 국가를 역사에서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고 부른다.
3. 북벌(北伐)
북방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온 백성들은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따라서 뜻있는 인사들이 여러 차례 북벌을 감행하여 북방의 국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조적(祖逖)은 동진(東晉)에서 제일 먼저 북벌을 감행한 장군이다. 그는 한때 황하(黃河) 이남 지역을 수복하기도 했으나, 동진 내부의 불화가 생기고 조정은 그의 북벌 성공 후 높아질 위상을 우려하여 지원을 아꼈다. 그 결과 공적을 거의 이루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조적은 321년에 근심과 분노로 죽었다. 이전에 수복했던 땅은 다시 오랑캐(胡人)들에게 점령당했다.
조적에 이어서 환온(桓溫)이 354년, 356년, 그리고 369년에 세 차례 북벌을 감행했다. 그는 한때 낙양(洛陽)을 수복하기도 했으며, 여러 차례 조정에 수도를 낙양으로 다시 옮길 것을 요청했으나 대족(大族)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동진의 군신(君臣)들은 또한 그의 권세가 너무 커져 통제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하여 이를 실현할 수 없었다. 그 후 유유(劉裕)의 북벌 또한 낙양과 장안(長安)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4. 위기(危機)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前秦)은 부견(苻堅) 재위 시 한족(漢族) 왕맹(王猛)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대대적으로 정치를 개혁하고 교화를 베풀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었다. 전진은 강력해져서 오호(五胡)가 점거했던 화북(華北) 대부분 지역을 통일했다. 383년, 부견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동진을 단번에 멸망시키려 했고, 이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비수대전(淝水之戰)”이 발생했다. 비수대전 이후 전진은 와해되었고, 북방은 크게 혼란에 빠져 다시 장기적인 분열 상태에 들어섰다. 오랑캐(胡人)들은 남쪽을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동진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약승강(弱勝強)으로 상황이 잠시 안정되었다.
5. 멸망(滅亡)
동진(東晉)의 종실(宗室)과 사족(士族)은 자주 권력을 다투고 이익을 챙겼으며, 백성의 삶은 매우 곤궁하여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비수대전(淝水之戰) 후, 남방 백성은 잠시 안정을 찾았으나 정치적 혼란과 탐관오리의 부패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동진의 대신 환온(桓溫)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환현(桓玄)은 진안제(晉安帝)에게 선위(禪位)하도록 강요하고 국호를 초(楚)로 바꾸었으며, 역사는 이를 “환초(桓楚)”라고 부른다.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환현을 토벌하고 죽여 동진의 통치를 회복했으며, 촉(蜀) 지방을 할거(割據)하던 초종(譙縱)도 진압했다.
그러나 유유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이 있었고,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지방 고관들도 제거했다. 그리하여 유의(劉毅)는 제거되었고, 노종지(魯宗之), 사마휴지(司馬休之) 등은 후진(後秦)으로 도망갔다. 북벌을 일으켜 후진과 남연(南燕)을 멸망시킨 후, 유유는 마침내 안제(安帝)를 시해(弑害)하고 공제(恭帝)를 세웠으며, 결국 420년에 진 공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송(宋)으로 바꾸었다. 역사는 이를 “유송(劉宋)”이라고 부른다. 동진은 이로써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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