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 문제 유의륭(劉宋 文帝 劉義隆, AD. 407~453년) : 유송 3대 황제(AD. 424~453년)
- 송 문제(宋 文帝) — 유의륭(劉義隆)
- 출생 : 407년
- 사망 : 453년 3월 16일 (향년 45~46세)
- 부친 : 송 무제 유유 (宋 武帝 劉裕)
- 모친 : 장황태후 호도안 (章皇太后 胡道安)
- 통치 기간 : 424년 9월 17일 ~ 453년 3월 16일 (28년 180일)
- 전임 황제 : 송 소제 유의부 (宋 少帝 劉義符)
- 후임 황제 : 유소 (劉劭)
- 묘호 : 중종(中宗, 유소가 처음 올림) → 태조(太祖, 효무제가 바꿈)
- 시호 : 경황제(景皇帝, 유소가 처음 올림) → 문황제(文皇帝, 효무제가 바꿈)
- 능호 : 장녕릉(長寧陵)
- 연호 : 원가(元嘉)
【기원후 407년】
- 유의륭(劉義隆)은 동진(東晉) 의희(義熙) 3년(407년) 경구(京口, 현재 장쑤성 전장시)에서 태어났다. 무제의 셋째 아들이며 소제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거아(車兒)이다.
【기원후 410년】
- 의희 6년(410년), 노순(盧循)의 난이 발생하여 반란군이 건강(建康)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유유(劉裕)는 경구의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당시 네 살이던 유의륭에게 유수(劉粹)를 붙여 경구를 지키게 했다.
【기원후 415년】
- 의희 11년(415년), 유유의 지시로 주령석(朱齡石)이 초촉(譙蜀)을 멸망시키고 촉(蜀) 땅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자, 진 조정은 유의륭을 팽성현공(彭城縣公)에 봉했다.
【기원후 417년】
- 의희 13년(417년), 유유는 후진(後秦) 북벌에 나서 수군을 이끌고 팽성(彭城, 현재 장쑤성 쉬저우시)에서 관중(關中)으로 진격했으며, 유의륭에게 행관군장군 직위를 맡겨 유수(留守)하게 했다. 동진 조정은 그에게 사지절(使持節), 감서연청기사주제군사(監徐兗青冀四州諸軍事), 서주자사(徐州刺史)의 봉작을 추가했다.
【기원후 418년】
- 의희 14년(418년), 유유는 관중을 수복하고 팽성으로 회군한 뒤, 원래 세자 유의부(劉義符)를 형주(荊州)에 진수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유의륭에게 감사주예주지회서연주지진류제군사(監司州豫州之淮西兗州之陳留諸軍事), 전장군(前將軍), 사주자사(司州刺史)를 수여하고 낙양(洛陽, 현재 허난성 뤄양시)을 진수하게 명했다. 그러나 장소(張邵)가 세자를 외부로 내보내는 것에 대해 유유에게 간언하여 이를 중단시켰고, 유유는 대신 유의륭을 도독형익영옹량진육주예주지하남광평양주지의성송자사군제군사(都督荊益寧雍梁秦六州豫州之河南廣平揚州之義成松滋四郡諸軍事), 서중랑장(西中郎將),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삼아 강릉(江陵, 현재 후베이성 징저우시)을 진수하게 했다. 하지만 유의륭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의 모든 사무는 사마(司馬) 장소가 처리했다.
【기원후 420년】
- 영초(永初) 원년(420년), 송무제 유유가 진(晉)을 찬탈하고 황제에 오르자, 유의륭을 의도왕(宜都王)에 봉하고 삼천 호(三千戶)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얼마 후에는 진서장군(鎮西將軍)의 호를 추가했고, 이후 북진주(北秦州)와 상주(湘州)의 도독을 겸하게 되었다.
【기원후 422년】
- 무제 유유(劉裕)가 영초(永初) 3년(422년)에 사망한 후, 송소제(宋少帝) 유의부(劉義符)가 즉위했다.
- 북위(北魏)는 영초(永初) 3년 10월, 유유(劉裕)가 사망한 틈을 타 대대적으로 남침하여 호뢰(虎牢, 현재 허난성 싱양시 사수진), 낙양(洛陽, 현재 허난성 뤄양시), 활대(滑臺, 현재 허난성 화셴) 등 황하(黃河) 이남의 땅을 빼앗았다.
-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 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후사를 한문(寒門) 출신의 서선지(徐羨之), 부량(傅亮), 단도제(檀道濟),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기원후 424년】
- 소제 유의부가 상중(喪中)에 무례한 행동과 여러 과실이 많아, 경평(景平) 2년(424년)에 고명대신(顧命大臣) 서선지(徐羨之), 부량(傅亮), 그리고 사회(謝晦)를 주축으로 한 정변으로 폐위되었다. 그는 유폐되었고 사람을 보내 살해되었다. 유의부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유의부의 다음 동생인 유의진(劉義真)이 마땅히 즉위해야 했다. 그러나 서선지가 그를 군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폐제 전에 유의진을 먼저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후에 사람을 보내 살해했다. 황제를 폐위한 후, 시중(侍中) 정도혜(程道惠)는 무제(武帝)의 다섯째 아들 유의공(劉義恭)으로 바꿔 세울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서선지는 유의륭(劉義隆)을 염두에 두었고, 백관은 상소를 올려 무제의 셋째 아들인 유의륭을 황제로 맞이했다.
- 이때 부량은 행대(行臺)를 이끌고 강릉(江陵)으로 가서 유의륭을 맞이하여 입경(入京)했다. 때는 이미 7월 중순이었고, 강릉에서는 이미 소제(少帝)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유의륭과 일부 관리들은 맞이하러 온 이들을 의심하여 동쪽으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화(王華), 왕담수(王曇首), 그리고 도언지(到彥之)의 권고에 따라 출발을 결정했다.
- 그는 8월 8일(8월 병신일, 424년 9월 16일) 건강(建康)에 도착했고, 다음 날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年號)를 “원가(元嘉)”로 바꾸었다.
- 유의륭은 강릉에서 동쪽으로 내려올 때부터 서선지(徐羨之) 등을 계속 경계했다. 그가 동쪽으로 내려오는 여정에서, 수행하는 형주 주부(州府) 관리들은 모두 엄중히 자신을 방어했고, 행대(行臺)의 백관들은 접근할 수 없었다. 중병참군(中兵參軍) 주용자(朱容子)는 수십 일 동안 내내 칼을 품고 선실 밖을 지켰다. 즉위 후에는 측근인 왕화(王華)와 왕담수(王曇首)를 불러들여 조정의 관직에 임명했다. 그는 서선지가 당시 잠시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하던 도언지(到彥之)를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임명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굳이 그를 불러들여 중령군(中領軍)으로 삼아 군사를 통솔하게 했다. 부량(傅亮)과 사회(謝晦) 또한 왕화 등과 교류하며 안심하려 했다.
【기원후 425년】
- 서선지와 사회는 원가(元嘉) 2년(425년)에 상소를 올려 정권을 돌려주고 유의륭이 정식으로 친정(親政)하게 했다. 그러나 왕화와 공영자(孔甯子)는 그때 여러 차례 유의륭에게 서선지 등을 모함했고, 유의륭 또한 권신들을 주살하려는 뜻을 품었다. 사회가 당시 형주자사로서 형주 요충지에 앉아 있는 것을 고려하여, 북벌과 능묘 참배를 핑계로 선박을 수리했다. 이때 조정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이어서 음모가 거의 누설될 뻔했다.
【기원후 426년】
- 원가 3년(426년), 유의륭은 서선지, 부량, 사회가 소제 유의부(劉義符)와 유의진(劉義真)을 함부로 살해한 죄를 선포하고, 서선지와 부량을 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는 친정(親征)으로 직접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옹주자사 유최(劉粹), 남연주자사 단도제(檀道濟), 중령군 도언지에게 먼저 출병하도록 명했다. 서선지는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으며, 부량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회는 병력을 이끌고 반항했지만, 단도제가 유의륭을 도와 토벌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불안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단도제가 도착하자 조정 군대의 군세는 매우 강성했고, 사회의 군대는 와해되었다. 사회는 도망치려 했으나 사로잡혀 처형되었으며, 이로써 세 권신 세력은 제거되었다.
- 유의륭(劉義隆)이 서선지(徐羨之)를 죽인 후, 양주자사(揚州刺史) 직위는 사도(司徒) 왕홍(王弘)이 맡았다. 그러나 왕홍은 줄곧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자신과 함께 정사를 장악하게 하려 했고, 이는 당시 낭야왕씨(琅邪王氏) 인물들이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 예봉을 거두기 위함이었다.
【기원후 429년】
- 마침내 유의강은 원가(元嘉) 6년(429년)에 사도, 녹상서사(錄尚書事) 신분으로 왕홍과 함께 정사를 도왔다. 그러나 당시 왕홍은 늘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정사를 유의강에게 넘겼고, 이에 유의강은 점차 정사를 전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기원후 430년】
- 430년에 전서법(錢署法)을 두어 4주전(鑄錢)을 주조하여 일시에 화폐 경제를 부흥시켰다.
- 원가(元嘉) 7년(430년) 3월, 유의륭은 도언지(到彥之)를 주수(主帥)로 삼고, 왕중덕(王仲德)과 연주자사(兗州刺史) 죽령수(竺靈秀)에게 수군을 이끌고 황하로 가게 했으며, 단굉(段宏)에게 8천 정예 기병을 주어 호뢰를 공격하게 했다. 도언지의 군대는 하루에 약 십 리 정도만 행군하여 7월에야 수창(須昌, 현재 산둥성 둥핑현 서북쪽)에 도착했다. 이때 북위는 각기 병력이 적은 착고(碻磝, 현재 산둥성 임평 서남쪽), 활대, 호뢰, 그리고 낙양의 사진(四鎮)에 대해, 수비대장들에게 먼저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송군(宋軍)은 이로 인해 쉽게 사진을 탈환했다.
- 그러나 10월에 북위가 반격에 나섰다. 위장 안힐(安頡)은 낙양 금용성(金鏞城)을 공격했고, 수비대장 두기(杜驥)는 성벽이 허물어져 있었고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한편 호뢰 또한 함락되었다. 이어서 위장 숙손건(叔孫建)과 장손도생(長孫道生) 등은 11월에 황하를 건넜다. 도언지는 여러 군대가 연이어 패하는 것을 보고 원호지(垣護之)가 청주를 지원하라는 간언을 듣지 않은 채, 역성(歷城, 현재 산둥성 지난시 역성구)으로 남하한 후 배를 불태우고 곧장 팽성(彭城)으로 향했다. 수창을 지키던 죽령수 또한 퇴각했고, 호륙(湖陸)에서 숙손건에게 크게 패했다. 위군은 또한 활대를 공격했고, 단도제(檀道濟)는 비록 11월에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구원에 나섰지만, 이듬해 정월부터 숙손건 등의 방해로 활대를 지원할 수 없었다. 활대는 결국 2월에 함락되었고, 단도제는 전군을 이끌고 철수했다. 이 북벌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왕현모(王玄謨)는 종종 북벌 전략을 제시했고, 유의륭은 이를 듣고 마음이 동하여 한때 은경인(殷景仁)에게 “왕현모의 말을 들으니 나 또한 랑거서산(狼居胥山)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싶어진다”라고 말했다.
【기원후 431년】
- 원가 8년에는 군현에 조칙을 내려 경작과 양잠에 부지런한 농가를 장려하고 올바른 농업 방식을 가르치며, 특히 뛰어난 농가들을 보고하도록 했다.
【기원후 432년】
- 원가 9년(432년) 왕홍이 사망한 후, 유의륭은 유의강에게 양주자사를 더해주었고, 유의강은 단독으로 정사를 장악했다.
- 이때 유의륭은 자주 병을 앓았고, 정사는 사실상 모두 유의강이 처리했다. 게다가 유의강은 옷을 벗지 않고 허리띠를 풀지도 않은 채 유의륭을 돌보았고, 이에 내정(內廷)과 외조(外朝)의 일이 모두 유의강에게 장악되었다.
【기원후 436년】
- 원가 13년(436년), 유의륭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유의강은 유의륭이 사망할 경우, 공이 높고 재능이 뛰어난 사공(司空) 단도제(檀道濟)를 통제할 사람이 없을까 염려했다. 이에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송문제의 동의 아래 단도제 일가와 그의 심복 장수들을 주살했다. 그러나 유의강은 스스로 황제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고 여겨 제멋대로 행동했고, 일 처리에서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군신 간의 예절도 지키지 않았다.
- 이때 유의강의 측근 유담(劉湛) 등은 유의강을 황제 자리로 올리려 했다. 유의륭이 병이 위중할 때 장자(長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의조(儀曹)에서 동진(東晉) 진강제(晉康帝)의 형 종제 급(兄終弟及,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나아가 국가에 충성하며 유담 일당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대신들을 무고하기도 했다. 유의륭은 병에서 회복된 후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형제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기원후 438년】
- 438년 유학, 현학, 문학, 사학의 4학을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어 동진의 유민 도연명과 사령운, 안연지 등이 시문세계에서 활약했고, 토번, 하서왕 등과 교류하였다.
- 원가 15년(438년)에는 뇌차종(雷次宗)을 불러 경성(京城)의 계롱산(雞籠山, 현재 난징시 북극각)에 “유학관(儒學館)”을 열어 학문을 강의하게 했고, 이로써 유학(儒學)은 현학(玄學), 문학(文學), 사학(史學)과 함께 “사학(四學)”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후 440년】
- 결국 유의륭은 원가 17년(440년)에 유담 등을 주살했고, 유의강의 퇴진 상표를 받아들여 그를 강주(江州)로 좌천시켰다. 이후 유의륭은 사도, 녹상서사, 그리고 양주자사를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과 상서복야(尚書僕射) 은경인(殷景仁)에게 각각 부여했다. 그러나 유의공은 유의강이 좌천된 것을 보고, 비록 실질적인 재상 역할을 했지만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단순히 문서 업무만 처리했다. 이에 유의륭은 안심했고, 주상(主相) 간의 다툼은 권력이 유의륭에게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 유의륭은 서선지(徐羨之) 등 권신들을 제거한 후 조칙을 내려 대신들을 사방으로 파견하여 지방 관리들의 우열을 보고하게 하고,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나이가 많고 배우자를 잃었거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중병을 앓아 생활이 어려운 자들은 군현에 도움을 요청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공표했으며,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백성들이 유익한 의견과 모책을 올리는 것을 환영했다. 유의륭은 또한 여러 차례 연현당(延賢堂)에 가서 형사 소송을 청취했다. 원가(元嘉) 17년에는 평민들이 사용이 금지되었던 산과 강가 지역을 개방하도록 명령했으며, 늙고 약한 자들을 군인으로 징발하여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조치를 금지하고, 모든 관리들이 법령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여러 차례의 천재지변 시에는 구휼품을 지급하거나 그해의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을 위무했다.
- 원가 17년에는 농민들이 정부에 빚진 “모든 체납금”을 적절히 감면하도록 명령했다.
【기원후 442년】
- 19년(442년)에는 국자학(國子學)을 세우도록 조칙을 내렸다.
【기원후 443년】
- 모든 종실 주자(冑子)들이 모인 후 국자학을 다시 세웠다.
【기원후 444년】
- 원가 21년에는 원가 19년 이전의 모든 체납금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 또한 농사에 참여하고 싶으나 물자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종자와 식량을 빌려주도록 했으며, 천 이랑의 밭을 개간하는 관민에게는 포백(布帛)을 주어 장려했다.
- 원가 21년 여름에 연속된 비로 인해 수해(水害)가 발생하여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을 때, 유의륭은 구휼품을 지급하는 것 외에도 가을에 관리들에게 농민들이 벼와 보리를 경작하도록 강력히 장려하고, 다음 해 농사를 위해 밭을 개간하도록 했다.
【기원후 445년】
- 원가 22년에는 호숙(湖熟)의 천 이랑에 달하는 황폐한 밭을 다시 개간하도록 했다.
- 원가(元嘉) 22년(445년), 좌위장군(左衞將軍) 겸 태자첨사(太子詹事) 범엽(范曄)과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 공희선(孔熙先) 등이 유의강(劉義康)을 옹립하여 모반을 꾀하려 한 사실이 발각되어 모두 주살되었다. 유의륭(劉義隆) 또한 이로 인해 유의강을 서인(庶人)으로 폐했다. 유의륭의 두 번째 북벌 실패로 위군(魏軍)이 과보(瓜步)까지 이르렀고, 이때 그는 폐위되어 서인이 된 유의강을 누군가 옹립하여 난을 일으킬까 염려했다.
【기원후 446년】
- 원가 23년에는 국자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시(策試)를 시행했다
【기원후 450년】
- 북벌(北伐)의 이유로 인해 유의륭은 원가 27년(450년)에 다시 국자학을 폐지했다.
-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가 너무 간결했기 때문에, 유의륭은 배송지(裴松之)에게 주(註)를 달도록 명했고, 완성된 후에 친히 열람하며 “이것은 불멸(不朽)의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 원가 27년(450년) 2월, 북위는 보병과 기병 십만 명을 이끌고 남침하여 천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의 현호(懸瓠, 현재 허난성 여남현)를 맹공했다. 수비대장 진헌(陳憲)은 고군분투하여 성을 지켜냈고, 유의륭은 장질(臧質)과 유강조(劉康祖)를 보내 구원하게 하여 위군을 물러나게 했다. 당시 유의륭은 또한 서연(徐兗) 두 주(州) 자사(刺史) 유준(劉駿)에게 병력을 보내 여양군(汝陽郡)을 점령한 위군을 공격하게 했으나, 파견된 유태지(劉泰之)의 군대는 위군에게 참패했고 유태지는 전사했다. 위군이 4월에 철수한 후, 유의륭은 즉시 북벌을 계획했다. 그는 측근 서담지(徐湛之), 강담(江湛), 그리고 왕현모의 지지를 얻었으나, 심경지(沈慶之)는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보병이 기병과 맞서는 것은 언제나 열세에 놓이므로 출정을 포기해 주십시오. 더욱이 이전에 단도제는 다시 싸웠으나 아무 공 없이 돌아왔고, 도언지는 심지어 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지금 왕현모 등은 이 두 장군만 못하고, 군대의 전투력도 그때만 못하니, 이는 다시 패배하여 뜻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의륭은 말했다. "우리 군대가 패배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이는 단도제가 적을 방임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기 때문이고, 도언지는 행군 도중 병이 발작했기 때문이다. 북쪽 오랑캐들이 믿는 것은 오직 말뿐이다.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강이 잘 통하니, 배를 보내 북쪽을 공격하면 착고의 적군은 분명 물러날 것이고, 활대의 수비군 또한 쉽게 격파할 수 있다. 이 두 성을 점령한 후 식량을 보내 백성들을 위문하면 호뢰와 낙양의 민심은 저절로 불안해질 것이다. 겨울이 되어 성 사이의 방비를 굳건히 하고 북쪽 오랑캐의 기병이 강을 건널 때까지 기다리면 일망타진할 수 있다."
- 이에 유의륭은 심경지, 태자 유소(劉劭), 그리고 소사화(蕭思話)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그 해(450년) 7월에 북벌 조칙을 내렸다. 청기(青冀) 두 주 자사 소빈(蕭斌)을 6만 군대의 주수(主帥)로 삼고, 그의 지휘 아래 왕현모(선봉)가 심경지와 신탄(申坦)을 이끌고 주력군으로 황하에 진입했으며, 다른 네 군대를 동서로 나란히 진격하게 하여 대대적으로 위(魏)를 정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위 착고의 수비군은 성을 버렸고, 왕현모는 활대를 공격했으나 수개월간 강공에도 불구하고 함락시키지 못했다. 10월에 백만으로 일컬어지는 북위 원군이 황하를 건너자 그는 비로소 철수했으나, 추격전에서 크게 패하여 만여 명의 병사를 잃었다. 유의륭은 왕현모의 패배와 위군이 깊숙이 진격해오는 것을 보고, 공격 중이던 각 방면의 군대를 소환했다. 결국 위군이 과보(瓜步, 현재 장쑤성 난징시 륙허구 과부진)까지 남하하여 한때 장강(長江)을 건너 건강을 공격하려 위협했고, 유의륭은 화의를 맺고 전쟁을 중단하기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위군은 이듬해 과보에서 철수했고, 당시 팽성에 진수하던 태위 유의공(劉義恭)은 착고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성을 지키던 왕현모에게 역성으로 물러나도록 명했고, 착고는 결국 상실되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왔을 뿐 아니라, 위군이 장강까지 침략하여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다. 《자치통감》에는 “장정은 즉시 참살하고, 갓난아이는 창 위에 꿰어 춤을 추게 하며 놀이로 삼았다. 지나간 군현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황무지가 되었으며, 봄 제비가 돌아와 숲의 나무에 둥지를 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마을은 황폐해졌고, 원가의 정치는 쇠퇴했다.”
【기원후 451년】
- 원가 28년(451년) 정월에 유의강에게 사사(賜死)를 내렸다. 동시에 태자 유소(劉劭)는 북벌 실패의 죄책을 그날 북벌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반대 의견을 가진 심경지(沈慶之)와 논쟁했던 서담지(徐湛之)와 강담(江湛)에게 돌렸다. 비록 유의륭은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지만, 유소는 이미 그 두 사람과 극도로 불화했다.
- 후에 유소와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은 여무(女巫) 엄도육(嚴道育)의 말을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유의륭이 더 이상 알고 책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고(巫蠱)를 행했다. 함장전(含章殿) 앞에 유의륭을 상징하는 옥으로 조각된 인형을 묻었다. 이 일에는 황문경국(黃門慶國)도 참여했는데, 그는 후에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유의륭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유의륭은 이를 알고 놀라면서도 탄식했다. 그는 다른 공모자 왕앵무(王鸚鵡)를 체포하도록 명령했고, 그의 집에서 유소와 유준이 쓴 수백 장의 저주가 적힌 종이를 발견했으며, 그 인형 또한 찾아냈다. 유의륭이 두 사람을 질책하자, 두 사람은 두려워 말이 없었고, 그저 계속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유의륭은 이에 태자를 폐하고 유준에게 사사할 계획을 세우고, 강담, 서담지, 그리고 왕승작(王僧綽)과 상의했다. 그는 건평왕(建平王) 유굉(劉宏)을 세우고 싶어 했으나, 서담지는 자신의 사위인 수왕(隨王) 유탄(劉誕)을 지지했고, 강담은 자신의 매부인 남평왕(南平王) 유석(劉鑠)을 지지하여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왕승작은 기밀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유의륭에게 빨리 결정을 내릴 것을 권했으나,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기원후 452년】
- 원가 29년(452년), 유의륭은 북위 태무제(太武帝)의 사망을 계기로 소사화에게 기주자사(冀州刺史) 장영(張永)을 독려하여 착고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7월부터 공성을 시작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고, 8월에는 위군이 공격 장비와 병영을 불태웠다. 소사화는 병력을 이끌고 증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여 일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병량 부족을 이유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호뢰를 공격하던 노상(魯爽) 등은 소사화가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철수하면서 북벌은 끝났다.
【기원후 453년】
- 원가 30년(453년) 2월, 유의륭은 유소와 유준이 여전히 엄도육과 왕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유소의 태자 지위를 폐하고 유준에게 사사할 것을 결정했다. 유의륭은 이 사실을 유준의 생모 반숙비(潘淑妃)에게 알렸고, 반숙비는 다시 유준에게 알렸다. 유소는 유준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 2월 20일(3월 15일) 밤, 유소는 소빈(蕭斌)과 원숙(袁淑)을 궁으로 불러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다음 날 아침 행동에 옮길 것이라고 밝혔다. 소빈은 유소의 위협 아래 동참하기로 결정했고, 단호히 거부한 원숙은 살해되었다.
- 유소와 소빈은 다음 날 아침(3월 16일) 날이 밝을 때 칙명(敕命)을 받았다고 말하며 군대를 이끌고 만춘문(萬春門)을 통해 금궁(禁宮)으로 진입했다. 그날 밤 유의륭은 서담지와 밤새도록 일을 논의하고 있었고, 유소의 군대가 공격해 들어올 때까지 촛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유소의 제사(齋帥) 장초지(張超之)는 칼을 들고 전각으로 들어와 유의륭을 베려 했고, 유의륭은 탁자를 들어 저항했으나 다섯 손가락이 잘리고 장초지의 칼에 복부를 찔린 후 쓰러져 사망했다. 향년 47세였다. 옆에 있던 서담지는 북쪽 창문을 통해 도망치려 했으나, 창문을 열기도 전에 살해되었다. 강담도 살해되었다.
- 유소는 이어서 황제에 올랐고, 유의륭에게 시호(諡號) 경황제(景皇帝), 묘호(廟號) 중종(中宗)을 올렸다. 3월 20일(3월 계사일, 4월 14일), 유의륭을 장녕릉(長寧陵)에 안장했다. 같은 해 송효무제(宋孝武帝) 유준(劉駿)이 거병하여 유소를 죽이고 즉위한 후, 유의륭의 시호를 문황제(文皇帝), 묘호는 태조(太祖)로 고쳤다.
【가족 관계】
- 조부 : 류교(劉翹) ― 효황제(孝皇帝) (류유(劉裕)에 의해 추존됨)
- 부 : 류유(劉裕) ― 고조 무황제(高祖 武皇帝)
- 모 : 호도안(胡道安) ― 장황태후(章皇太后)
- 형제
- 류의부(劉義符) ― 소제(少帝)
- 류의진(劉義真) ― 여릉 효헌왕(廬陵孝獻王)
- 류의강(劉義康)
- 류의공(劉義恭) ― 강하 문헌왕(江夏文獻王)
- 류의선(劉義宣) ― 남군왕(南郡王)
- 류의계(劉義季) ― 형양 문왕(衡陽文王)
- 자매
- 류흥제(劉興弟) ― 회계 선언장공주(會稽宣長公主)
- 류혜원(劉惠媛) ― 의흥 공장공주(義興恭長公主)
- 광덕공주(廣德公主) ― (이름 미상)
- 황후
- 원제후(袁齊媯) ― 문원황후(文元皇后) (사후 추존)
- 후궁 및 빈첩
- 효무소태후(孝武昭太后) 노혜남(路惠男)
- 명선태후(明宣太后) 심용희(沈容姬)
- 반숙비(潘淑妃, ?~453년)
- 오숙의(吳淑儀)
- 고수의(高修儀)
- 강수의(江修儀)
- 은수화(殷修華, ?~459년) : 사후 장녕원숙비(長寧園淑妃)로 추봉
- 진수용(陳修容)
- 조첩여(曹婕妤)
- 사용화(謝容華)
- 양수의(楊修儀)
- 형미인(邢美人)
- 채미인(蔡美人)
- 동미인(董美人)
- 안미인(顏美人)
- 진미인(陳美人)
- 순미인(荀美人)
- 라미인(羅美人)
- 장미인(蔣美人, ?~446년)
- 아들들 (총 19명)
- 유소(劉劭, 424~453년) ― 태자(太子), 문원황후 원씨 소생, 부친을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
- 유준(劉濬, 429~453년) ― 시흥왕(始興王), 숙비 반씨 소생, 유소에게 가담
- 유준(劉駿) ― 효무소황태후 노씨 소생, 제4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 유삭(劉鑠, 431~453년) ― 남평 목왕(南平穆王), 숙의 오씨 소생
- 유소(劉紹, 432~452년) ― 여릉 소왕(廬陵昭王), 수의 고씨 소생
- 유탄(劉誕, 433~459년) ― 경쟁왕(竟陵王), 수화 은씨 소생
- 유굉(劉宏, 434~458년) ― 건평 선간왕(建平宣簡王), 첩여 조씨 소생
- 유의(劉祎, 436~470년) ― 동해왕(東海王), 수용 진씨 소생
- 유창(劉昶, 346~797년) ― 의양왕(義陽王), 용화 사씨 소생, 유송 멸망 전 봉호는 단양왕(丹陽王)
- 유혼(劉渾, 439~472년) ― 무창왕(武昌王), 수의 강씨 소생
- 유욱(劉彧, 439~472년) ― 명선황태후 심씨 소생, 제6대 황제 명제(明帝)
- 유휴인(劉休仁, 443~471년) ― 건안왕(建安王), 수의 양씨 소생
- 유휴우(劉休佑, 445~471년) ― 산양왕(山陽王), 미인 형씨 소생
- 유휴무(劉休茂, 445~461년) ― 해릉왕(海陵王), 미인 채씨 소생
- 유휴업(劉休業, 445~456년) ― 파양 애왕(鄱陽哀王), 미인 동씨 소생
- 유휴천(劉休倩, 446~454년) ― 임경충왕(臨慶沖王), 미인 안씨 소생
- 유이부(劉夷父, 447~452년) ― 신야 회왕(新野懷王), 미인 진씨 소생
- 유휴범(劉休範, 448~474년) ― 계양왕(桂陽王), 미인 순씨 소생
- 유휴약(劉休若, 448~471년) ― 파릉 애왕(巴陵哀王), 미인 나씨 소생
- 딸들 (총 11명 이상)
- 류영아(劉英娥) ― 동양 헌공주(東陽獻公主), 문원황후 원씨 소생
- 해염공주(海鹽公主) 미인 장씨 소생
- 장성공주(長城公主)
- 류영원(劉英媛) ― 임천 장공주(臨川長公主)
- 회양장공주(淮陽長公主)
- 류영미(劉英媚) ― 신채공주(新蔡公主)
- 남양공주(南陽公主)
- 낭야정장공주(琅邪貞長公主)
- 남군헌공주(南郡獻公主)
- 심양공주(尋陽公主)
- 여강공주(廬江公主)
- 딸 : 저령구(褚令璩) — 남제 황제 소보권(蕭寶卷)의 황후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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