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제 사마덕문(晉恭帝 司馬德文, AD. 386~421년) : 중국 동진 11대 황제(AD. 419~420년)
- 사마덕문(司馬德文) — 진공제(晉恭帝)
- 통치 기간 : 419년 1월 28일 ~ 420년 7월 7일 (재위 1년 161일)
강제로 선위(禪位)함 - 전임 : 진안제 사마덕종(晉安帝 司馬德宗)
- 후임 : 유유(劉裕)의 찬위(篡位) → 송나라(劉宋) 건국
- 출생 : 386년
- 사망 : 421년 11월 2일 (향년 34세 또는 35세)
- 능묘 : 충평릉(冲平陵)
- 연호(年號) :
- 원희(元熙) — 419년 ~ 420년 6월
- 시호(諡號) :공황제(恭皇帝)
【기원후 386년】
- 효무제 사마요의 아들이며 안제 사마덕종의 동복 동생으로 태어났다.
- 하내군 온현(河内郡 温县, 현재 중국 허난성 자오쭤시 온현) 출신이다.
【기원후 392년】
- 태원(太元) 17년 11월 경인일(庚寅日, 392년 12월 27일)에 낭야왕(琅邪王) 으로 봉해졌고, 이후 중군장군(中軍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기원후 398년】
- 융안(隆安) 2년(398년)에 위장군(衞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전임되었다.
【기원후 399년】
- 399년에 시중(侍中)으로 옮겨졌으며, 사도(司徒)를 겸임하고, 상서육조사(尚書六條事)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았다.
【기원후 402년】
- 환현(桓玄)이 사마도자(司馬道子) 부자를 격파하고 조정을 장악하자, 사마덕문(司馬德文)을 태재(太宰)로 임명하였다.
【기원후 404년】
- 404년 1월 1일, 환현이 황위를 찬탈하고 제위를 선포하자, 진안제(晉安帝)는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되었고, 사마덕문 역시 작위가 강등되어 석양현공(石陽縣公)으로 봉해졌다.
- 그 후 환현은 안제를 심양(尋陽, 현재의 장시성 구이저우시)으로 옮겼고, 사마덕문도 그를 따라갔다.
- 유유(劉裕)가 군을 일으켜 환현을 토벌하였고, 환현은 패하여 심양으로 도주하였다. 그곳에서 곽창지(郭昶之)로부터 군수품과 병력을 제공받은 후, 다시 진안제를 협박하여 함께 강릉(江陵, 현재의 후베이성 장링현)으로 향했다.
- 그러나 환현은 익주(益州)로 도망가는 도중에 패사하였고, 이후 진안제는 형주별가(荊州別駕) 왕강산(王康產)과 남군태수(南郡太守) 왕등지(王騰之)에 의해 남군의 관저로 맞이되었다. 이때 사마덕문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 하지만 유유의 군대가 강릉에 도착하기 전에, 환진(桓振) 등 환씨(桓氏)의 잔당이 빈틈을 타 기습하였고, 결국 강릉성이 함락되었다. 왕강산과 왕등지는 살해되었으며, 환진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성 안으로 들어와, 환현의 아들 환승(桓昇)의 행방을 물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자 환진은 크게 분노하며, 그들이 환씨를 몰살시킨 것에 대해 질책하였다.
- 이때 사마덕문이 나서서 변호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형제들의 뜻이겠습니까!”라고 하였고, 환겸(桓謙)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환진은 결국 안제를 해치지 않았다.
- 이후 환진은 계속해서 강릉을 장악하였고, 사마덕문을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임명하며, 유의(劉毅)가 이끄는 토벌군과의 대항을 이어갔다.
【기원후 405년】
- 405년에 유의의 군대가 강릉을 점령하였고, 사마덕문은 안제와 함께 하무기(何無忌)의 호위를 받아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으로 귀환하였다. 건강으로 돌아온 후, 사마덕문은 대사마(大司馬)로 승진하였다.
【기원후 416년】
- 416년, 유유(劉裕)가 후진(後秦)을 북벌할 준비를 하면서, 당시 유유는 진(晉) 왕실의 명분으로 북방 민심을 달래고자 하여, 사마덕문(司馬德文)의 이름을 앞세워 출병하려 했다. 이에 사마덕문은 진 왕조의 능묘(山陵)를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할 것을 상주하였고, 결국 유유는 사마덕문과 함께 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기원후 417년】
- 417년, 유유는 후진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같은 해 말에 동쪽으로 회군하였다. 사마덕문도 이에 동행하였다.
【기원후 418년】
- 418년 여름에 유유가 팽성(彭城,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에 도착하자, 사마덕문은 먼저 건강(建康)으로 돌아갔다. 그 직후 유유는 구석(九錫)을 받으며, 송왕(宋王)으로 봉해졌다.
【기원후 419년】
- 당시 유유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왕소지(王韶之)를 시켜 진안제(晉安帝)를 암살하고, 사마덕문을 즉위시켜, “창명(昌明) 이후로 두 명의 황제가 더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맞추려 했다.
- 그러나 사마덕문은 식사나 잠잘 때나 항상 진안제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왕소지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 해 말에 사마덕문이 병을 앓아 자리를 비우자, 왕소지는 그 틈을 타 진안제를 살해하였다. 유유는 유언(遺詔)을 위조해, 사마덕문을 후계자로 삼아 황제로 즉위시켰다.
- 형 사마덕종이 사망하자 형의 뒤를 이어 동진의 11대 황제가 되었으나 형인 사마덕종과 마찬가지로 유유의 괴뢰 황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덕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전혀 없었고 동진은 사실상 유유가 지배했다.
- 그는 419년 봄, 자신의 아내인 저씨(褚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였다. 또한 당시 송공(宋公) 의 작위를 가지고 있던 유유(劉裕)를 송왕(宋王)으로 진봉하였는데, 유유는 처음에는 이를 사양했지만 419년 가을에 받아들였다.
【기원후 420년】
- 420년 7월 5일, 유유가 조정에 들어오자, 부량(傅亮)은 사마덕문에게 제위를 양위하라는 뜻을 돌려 말하며, 미리 준비해 둔 양위 조서의 초안을 그에게 올렸다. 사마덕문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직접 붓을 들어 조서를 베껴 쓰며 말했다 :
“환현(桓玄)이 찬탈했을 때 이미 진 왕조는 천하를 잃었고, 유공(劉公)께서 그 국운을 20년 가까이 연장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은 저의 진심입니다.” - 이틀 뒤, 사마덕문은 낭야왕부(琅邪王府)로 물러났고, 백관들이 진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동진(東晉)은 이로써 멸망하였다.
- 그 후 3일 뒤, 유유는 정식으로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고, 사마덕문에게는 영릉왕(零陵王) 작위를 내렸다. 또 장쑤성 강녕현(江寧縣)에 있는 말릉현(秣陵縣)의 옛 관청을 그의 저택으로 삼게 하였다.
- 이때 연호, 수레, 복식 등 모든 예법을 진 왕조 시절과 동일하게 하였고, 이는 마치 진(晉)이 위(魏)를 찬탈했을 때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었다. 또한 유준(劉遵)에게 병력을 파견시켜 사마덕문의 거처를 호위하게 하였다.
- 유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낭야낭중령 장위에게 독을 잔뜩 섞은 술단지를 쥐어준 뒤 이것을 사마덕문에게 먹여 자결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장위는 “이렇게 착한 황제를 독살하는 건 인간이 할 짓이 못된다”고 하면서 그 술을 자기가 먹고 자결함으로써 사마덕문을 대신해 죽었다.
【기원후 421년】
- 이에 유유는 사마덕문의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을 시켜 죽였고 이 때문에 사마덕문은 두려운 나머지 항상 저영원과 같이 지냈다. 이 때문에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던 유유는 저영원의 오빠인 저숙도와 저담지 형제를 보내서 저영원과 만나게 했다. 저영원은 오빠들을 만나기 위해 별실로 가는 사이 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유의 병사들은 사마덕문을 붙잡고 자결을 강요하자 사마덕문은 “불교에서는, 자살하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없으니 내가 죽기를 원한다면 살해해주게”라 말했다. 이에 병사들은 사마덕문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워서 질식사시켰다.
- 사마덕문은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6척 높이의 금불상을 제작하여 친히 와관사까지 10여 리를 걸으면서 금불상을 맞이했다. 또한 성품이 신중하고 선량해서 지적장애를 앓고있는 형 사마덕종을 평생동안 돌봐줬다. 이러한 사마덕문의 훌륭한 인품 덕에 장위와 같이 그를 대신해서 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가족 관계】
- 배우자
- 공사황후 하남 저씨(恭思皇后 河南 褚氏, 384~436년)
- 이름 : 저영원(褚靈媛)
- 해염공주(海鹽公主, (403~439년)
- 이름 : 사마무영(司馬茂英) — 장녀
- 유의부(劉義符, 406~424년)와 혼인함
- 부양공주(富陽公主) — 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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