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일 목요일

진안제 사마덕종(晉安帝 司馬德宗, AD. 382~419년) : 중국 동진 10대 황제(AD. 396~419년)

진안제 사마덕종(晉安帝 司馬德宗, AD. 382~419) : 중국 동진 10대 황제(AD. 396~419)

 
  • 사마덕종(司馬德宗) 안제(安帝)
  • 통치 기간 : 396117~ 419128(2282일간)
    • 전임 황제 : 사마요(司馬曜) 효무제(孝武帝)
    • 후임 황제 : 사마덕문(司馬德文) 공제(恭帝)
  • 출생 : 382
  • 사망 : 419128(향년 36~37)
  • 시호 : 안황제(安皇帝)
  • 능호 : 휴평릉(休平陵)
  • 재위 당시 연호
    • 융안(隆安) : 397~ 401
    • 원흥(元興) : 402~ 404
    • 대형(大亨) : 4023~ 40312(환현이 잠시 찬탈하여 사용)
    • 의희(義熙) : 405~ 419
 

기원후 382

  • 하내군 온현(河內郡 溫縣, 지금의 중국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출신이며, 진 효무제 사마요(晉 孝武帝 司馬曜)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진귀녀(陳歸女)이다. 자는 휘와 동일한 덕종(德宗)이다.
  •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 사마덕문(司馬德文, 386년생)은 총명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시간이 흐르면서 형 사마덕종을 돌보는 법을 익혔다.
 

기원후 387

  • 태원(太元) 128월 신사일(辛巳, 387916)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기원후 390

  • 어머니 진귀녀가 사망하였다.
 

기원후 396

  • 396년에는 관리 왕헌지(王獻之)의 딸인 왕신애(王神愛)와 혼인하여 태자비로 맞이하였다.
  • 태원 219월 경신일(庚申, 396116) 효무제(孝武帝)가 장귀인(張貴人)에 의해 살해되었고, 다음 날 안제(安帝)가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 그러나 안제는 선천적으로 중증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기에 말을 하지 못하고 모든 감각을 느끼지 못했으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따라서 혼자서는 목숨조차 연명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그의 동복동생인 낭야왕 사마덕문(훗날 동진 공제)이 그를 평생동안 돌봐줘야만 했다.
  • 396, 효무제의 사망으로 즉위하였으나 당연히 황제로써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에 숙부인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 364~402)가 섭정하였으나 그는 귀신에 빠져서 직무를 아예 안하며 주색에 여념이 없었다.
 

기원후 397

  • 효무제(孝武帝)가 제국 북동부의 군권을 맡긴 왕공(王恭)은 왕국보와 왕서를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397, 왕국보와 왕서는 사마도자에게 왕공과 또 다른 지방 장관인 음중간(殷仲堪)이 지휘하는 군대를 축소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왕공과 서쪽 지방을 다스리던 음중간은 군을 일으켜 왕국보와 왕서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사마도자는 이에 겁을 먹고 왕국보에게 자결을 명령하고 왕서를 처형했다. 이후 왕공과 음중간은 병력을 철수하였다. 이 사건 이후, 사마도자는 오직 자신의 십대 아들 사마원현(司馬元顯)만을 신뢰하게 되었고, 수도 병력을 사마원현에게 맡겼다.
 

기원후 398

  • 398, 사마도자는 자신의 친척인 초왕(譙王) 사마상지(司馬尚之)와 그의 형제 사마수지(司馬休之), 그리고 왕유(王愉)에게도 군사 지휘권을 부여했다.
  • 그러나 왕유에게 군사권을 준 것에 대해 왕공과 음중간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왕유가 지휘하게 된 4개 군현은 원래 유해(庾楷)가 다스리던 지역이었고, 유해는 유량(庾亮)의 손자였다. 유개는 분노하여 사마도자가 왕공과 음중간까지 제거하려 한다는 주장으로 그들을 설득했고, 이로 인해 왕공과 음중간은 다시 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마도자는 왕공 휘하의 장군이자 북부 정예군인 북부병(北府兵)을 이끌던 유뇌지(劉牢之)를 회유하여 왕공을 배신하게 하였고, 결국 왕공을 체포해 처형했다.
  • 왕공의 죽음을 들은 음중간은 두려워했지만 계속 싸울지 고민하였다. 이때 사마도자는 환현(桓玄)의 사촌 환수(桓脩)의 제안에 따라 환현과 양전기(楊佺期)에게 요직을 제안하여 그들과 음중간 사이에 내분을 조장하였다.
  • 환현과 양전기는 명목상 음중간의 동맹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음중간은 병력을 철수하였고, 그의 통치 구역은 셋으로 분할되었으며, 환현과 양전기가 각각 일부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음중간은 더 이상 큰 위협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 398년 말, 사마원현의 친구였던 마법사 손태(孫泰)는 그가 중앙 정부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사마도자는 사마원현에게 그를 유인해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손태의 조카 손은(孫恩)은 주산도(舟山島)로 도망쳐 복수를 준비하였다.
 

기원후 399

  • 399년 여름, 사마원현(司馬元顯, 382~402)은 더 큰 권력을 원했고, 사마도자가 술에 몹시 취한 틈을 타서 안제(安帝)의 칙령을 위조, 사마도자의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이양하게 하였다. 사마도자가 술에서 깨어난 뒤 크게 분노했지만, 그때부터 사실상 실권을 잃게 되었고, 이름뿐인 섭정으로 전락하였다.
  • 사마원현(司馬元顯)의 섭정 시기는 아첨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시기였으며, 그는 여러 지방 군벌들의 위협을 제거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야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책사 장법순(張法順)을 깊이 신뢰했고, 많은 자신의 측근들을 조정에 등용하였다. 그에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 보였지만, 전통 사서(史書)에 따르면 그는 사치에 빠져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백성의 고통에 무관심했다고 전해진다.
  • 399년 말, 손은(孫恩)은 당시 진 제국의 실질적 통제 하에 남아 있던 유일한 지역인 양주(揚州, 현재 저장성과 장쑤 남부)가 사마원현의 부실한 통치로 피폐해진 것을 보고, 주산도(舟山島)에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양주 대부분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수도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까지 진격하였다. 손은의 반란은 곧 유뇌지(劉牢之)에 의해 진압되었고, 손은은 다시 주산도로 도망쳤지만, 이후 몇 년간 계속 위협으로 남았다. 그러나 양주는 이미 폐허가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원현은 점점 더 사치스럽고 오만해졌다.
 

기원후 401

  • 401년 말, 환현(桓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사마원현은, 환현이 399년 말 음중간(殷仲堪)과 양전기(楊佺期)를 무찌르고 그들의 영토를 장악, 진나라 영토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 상황에서, 환현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 그러나 사마원현은 유뇌지의 군대에 의존하고 있었고, 유뇌지는 사마원현을 신뢰하지 않았다. 한편, 환현은 수도로 진격하며 유뇌지에게 화친 제의를 했고, 유뇌지는 곧 사마원현을 배반하였다. 건강은 환현에게 함락당했고, 사마원현은 체포되어 측근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환현은 사마도자(司馬道子) 또한 유배시키고 살해한 후, 제국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 하지만 환현은 배신한 유뇌지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군권을 박탈하였다. 유뇌지는 이에 다시 반란을 시도했으나, 지속된 반란에 지친 그의 부하 장교들이 이탈하면서 자살하게 되었다.
 

기원후 402

  • 환현(桓玄)은 처음에는 제국 정부 개혁을 시도했고, 백성과 관리들은 그가 도입한 변화에 만족했다. 또한, 402년 전투에서 패해 자살한 손은(孫恩)의 뒤를 이어 등장한 매형 노순(盧循)과의 화해를 시도하며, 그에게 군()의 태수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 그러나 환현은 곧 사치에 빠지고, 자신의 뜻대로 법률을 변경하기 시작했으며, 황실에 제공되는 물자까지 줄어들어 심지어 안제(安帝)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릴 정도였다고 한다.
 

기원후 403

  • 403년 가을, 환현은 안제로 하여금 자신을 초왕(楚王)으로 책봉하고 구사(九錫)를 내리게 했는데, 이는 즉위가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행위였다. 겨울, 그는 사마보(司馬寶, 임천왕)를 시켜 안제에게 양위 조서를 직접 쓰게 했다고 전해지지만, 안제의 심각한 장애를 고려하면 실제로 직접 썼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 원흥 원년(元興元年, 402)에 사마원현은 안제로 하여금 연호를 원흥(元興)”으로 고치게 하고, 환현(桓玄)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을 준비하였으나, 같은 해 환현에게 패배하였고 이후 조정 권력은 환현에게 넘어갔다.
  • 환현은 먼저 원흥 연호를 폐지하고, 다시 융흥(隆興) 6으로 돌린 뒤, 다시 연호를 대형(大亨)”으로 바꾸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여 왕위 찬탈을 준비하였다.
 

기원후 404

  • 12월 임진일(壬辰, 40411), 이후, 환현은 스스로 초나라 황제에 즉위하였고, 안제를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시켰으며, 안제와 그 동생 사마덕문(司馬德文, 원래 낭야왕, 이후 시양공으로 강등)을 감금 상태로 두었다.
  • 404년 봄, 환현의 장수였던 유유(劉裕)는 환현에게 실질적인 재능이나 민심이 없음을 간파하고, 경구(京口, 현재 장쑤성 전장시)에서 여러 장수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며칠 만에 건강(建康)에 도달하자, 환현은 안제와 사마덕문을 데리고 자신의 본거지인 강릉(江陵, 현재 후베이성 징저우시)으로 후퇴했다.
  • 유유는 진 왕조의 부흥을 선포했고, 여름에는 유의(劉毅), 하무기(何無忌), 유도규(劉道規, 유유의 동생) 등의 군대가 강릉 근처에 도달하여 환현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환현은 다시 도망치려다, 모거(毛璩) 장군의 부대에게 살해되었다.
  • 왕강산(王康產)과 왕등지(王騰之)는 강릉에서 안제가 복위했음을 선포했지만, 환현의 조카인 환진(桓振)이 기습 공격을 감행해 강릉을 점령, 안제를 다시 인질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그를 황제로 예우했지만,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
 

기원후 405

  • 405년 봄, 유의의 군대가 강릉을 탈환하자, 환진은 도주했고, 안제는 건강으로 다시 환영받아 복귀했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는 유유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유유(劉裕)는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환현(桓玄)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너무 성급히 움직이지 않고 더 많은 승리를 통해 권위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환현을 무너뜨릴 때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여러 장수와 관리들의 연합을 이끌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 따라서 그는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초기에는 하무기(何無忌), 유의(劉毅) 등과 권력을 분담했다. 이후 몇 년간은 자신의 관직을 사임하겠다고 여러 차례 제안했는데, 이는 조정 관리들이 감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임을 정확히 판단한 것으로, 이를 통해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 더욱 굳히려는 전략이었다.
  • 405년 봄, 익주(益州, 현재 쓰촨성과 충칭 일대) 출신의 모거(毛璩) 휘하 병사들이, 처음에는 환현, 그 다음은 환진과의 전쟁에 장거리 원정을 다녀온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군인 초종(譙縱)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모거를 격파해 살해하고, 성도(成都, 현재 쓰촨성 청두)를 점령한 뒤, 서촉(西蜀)이라는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 같은 해, 404년에 환현과의 전쟁 중 남쪽으로 진군하여 번우(番禺, 현재 광둥성 광저우)를 점령했던 노순(盧循)은 조정에 조공을 바치며 화평을 제안했다. 유유는 당시로서는 노순을 물리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광주(廣州, 현재 광둥성과 광시)의 자사로 임명했으며, 노순의 매형이자 부장인 서도복(徐道覆)을 시흥(始興, 대략 현재 광둥성 사오관 일대)의 자사로 임명했다.
 

기원후 407

  • 407, 유유는 자신의 친구이자 유뇌지(劉牢之)의 아들인 유경선(劉敬宣)을 임명하여 서촉의 초종 정권을 공격하는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408, 서촉 장수 교도복(譙道福)의 방어에 막혀 군이 진격하지 못했고, 식량이 바닥나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후 408

  • 당시 조정은 유유를 수장으로 하여, 의희 4(408) 왕밀(王謐)의 사망 후 양주자사(揚州刺史) 및 녹상서사(錄尚書事) 자리를 이어받아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였다.
 

기원후 409

  • 409, 남연(南燕)의 황제 모용초(慕容超)는 악사(樂師)로 훈련시킬 남녀 포로들을 확보하기 위해 진()의 북방 변경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이에 대응해, 유유(劉裕)는 대부분의 조정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연을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 원정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환현(桓玄)을 타도할 때 동맹이었던 맹창(孟昶)이 이를 지지했다.
  • 유유는 409년 말 남연의 주력군을 빠르게 격파하고, 남연의 수도 광고(廣固, 현재 산둥성 칭저우)를 포위했으나, 광고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유유가 광고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서도복(徐道覆)은 유유와의 대립을 꺼리던 노순(盧循)을 설득해 북상하게 했다. 서도복은 결국 유유가 먼저 공격할 것이고, 지금 그가 광고를 포위 중일 때 함께 나머지 제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원후 410

  • 410년 봄, 유유는 광고를 함락시켜 남연을 멸망시켰으며, 후진(後秦)을 정벌할 준비를 고려하던 중, 노순과 서도복이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어, 곧바로 건강(建康, 현재 난징)으로 귀환했다.
  • 그 사이, 하무기(何無忌)는 서도복을 공격하기 위해 예장(豫章, 현재 장시성 난창)으로 함대를 이끌고 갔으나 패배하고 전사했고, 유의(劉毅)가 지휘한 제2군도 노순과 서도복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유의의 군사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혀 유유가 건강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노순은 겁을 먹고 철수를 고려했으나, 서도복의 주장에 따라 계속 진군했다.
  • 당시 일부 조정 신하들(맹창 포함)은 진안제(晉安帝)를 장강 너머로 피신시키자고 제안했으나, 유유는 거절하고 건강에서 항전하기로 결정했다.
  • 건강에 도착한 노순은 서도복이 제시한 몇 가지 고위험 고수익 전략들을 거절하고, 대신 유유 군을 위협해 무너지게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량이 바닥나자 노순은 퇴각, 심양(尋陽, 현재 장시성 주장)으로 향했다. 유유는 추격하는 동시에, 장수 손처(孫處)와 심전자(沈田子)에게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통해 번우(番禺)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유유는 노순을 반드시 격파하고, 그가 본거지로 도망갈 길을 차단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 한편, 서도복은 형주(荊州, 현재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를 공격했지만, 유유의 동생 유도규(劉道規)에게 패배하고 노순과 합류, 유유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기원후 411

  • 411년 새해 즈음, 이들은 대뢰(大雷, 현재 안후이성 안칭)에서 유유와 교전했으나, 유유는 불화살로 그들의 함대를 전멸시켰다. 노순과 서도복은 번우로 도망쳤지만, 이미 손처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 노순은 번우를 포위했으나, 심전자가 다른 지역을 공격하다가 되돌아와 손처와 함께 노순을 격파했다. 노순은 교주(交州, 현재 베트남 북부)로 도망쳤지만, 교주자사 두혜도(杜慧度)에게 패배했다. 이에 노순은 아내와 첩을 죽인 후,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 노순(盧循)이 제거되어 국가가 안정된 이후, 유유(劉裕)는 다시 대외 원정에 관심을 돌렸다. 군사적 승리를 통해 자신이 황위를 차지할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옛 동맹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기원후 412

  • 412, 유유는 형주자사(荊州刺史)였던 유의(劉毅)가 그의 사촌 유번(劉藩, 연주자사) 및 친구 사혼(謝混)과 함께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에 따라 유번과 사혼을 체포하고, 유의를 기습 공격해 손쉽게 격파하였다. 유의는 도망치다가 사망했다.
  • 412년 말, 유유는 서촉(西蜀)의 초종(譙縱)을 공격하기 위해 장수 주령석(朱齡石)을 파견했다. 그는 단거리 노선인 부강(涪江)이 아닌, 장거리 노선인 민강(岷江)을 따라 성도(成都)를 기습하도록 비밀 지시를 내렸다.
 

기원후 413

  • 주령석의 군은 초도복(譙道福)과 초종을 기습해 413년에 성도를 함락, 서촉을 다시 동진의 영토로 병합했다.
  • 413, 유유는 자신이 유의를 공격하러 건강(建康)을 비운 사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의심되던 장수 제갈장민(諸葛長民)을 기습적으로 처형했다.
 

기원후 414

  • 414, 유유는 형주의 새 자사 사마휴지(司馬休之)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진() 황실 일원이자, 아들 사마문사(司馬文思)가 초왕(譙王)에 봉해졌고 수많은 모험가들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유는 414년 봄, 사마문사의 동료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사마문사를 사마휴지에게 넘겨, 그가 직접 아들을 처형함으로써 충성을 증명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사마휴지는 왕위를 박탈해달라는 청원만 했을 뿐,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기원후 415

  • 415년 봄, 유유는 사마휴지(司馬休之)의 다른 아들 사마문보(司馬文寶)와 조카 사마문조(司馬文祖)를 체포해 자살을 명령한 뒤, 사마휴지를 공격했다. 이에 사마휴지는 옹주자사 노종지(魯宗之)와 연합했다. 초반엔 사마휴지와 노종지가 유유의 사위 서규지(徐逵之)를 물리치는 등 성공을 거두었으나, 유유 본인이 출정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유유는 강릉(江陵)을 함락시켰고, 사휴지와 노종지는 후진(後秦)으로 도망쳤다. 이제 유유에게 진() 조정 내에 실질적인 반대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기원후 416

  • 416, 유유는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이 최근 사망한 틈을 타 후진 정벌을 시작했다. 그는 건강의 정무는 보좌관 유목지(劉穆之)에게 맡기고, 자신의 후계자 유의부(劉義符)에게 명목상 통치를 맡겼다.
  • 416년 겨울, 유유의 장수 단도제(檀道濟)가 낙양(洛陽)을 함락시켰다. 이에 따라 유유는 진안제로부터 송공(宋公) 책봉과 구석(九錫)을 수여받았다. 이는 유유가 황제를 노리고 있다는 의도를 명확히 한 것이지만, 그는 그 시점에서는 겉으로는 이를 사양했다.
 

기원후 417

  • 417년 봄, 단도제와 장수 심림자(沈林子)는 후진 황제 요홍(姚泓)의 삼촌 요소(姚紹, 노공)와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한 달간의 접전 끝에 요소는 패배 후 분노로 사망했다. 요소의 사망 이후, 후진 군은 진군을 막지 못했다. 유유의 수군은 왕진악(王鎮惡, 왕맹의 손자)이 지휘했고, 요홍은 심림자의 동생 심전자(沈田子)가 이끄는 측면 병력을 먼저 제거하려 했지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심전자에게 대패, 장안(長安)으로 퇴각했다.
  • 곧 왕진악의 함대가 도착해 후진의 마지막 저항을 격파하고 장안 입성, 요홍은 항복했다. 유유는 요홍을 건강으로 압송해 처형, 후진을 멸망시켰다.
  • 후진(後秦)이 멸망한 후, 사람들은 유유(劉裕)가 서북 지역에 남아 있는 여러 국가들, 즉 하(), 서진(西秦), 북량(北涼), 서량(西涼)을 계속 정벌하거나 복속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당시 서진의 군주 걸복치반(乞伏熾磐), 북량의 군주 저거몽손(沮渠蒙遜), 서량의 군주 이고(李暠)는 모두 유유에게 형식적으로나마 복종의 뜻을 보일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 그러나 바로 그때, 유유의 심복 유목지(劉穆之)가 사망했고, 유유는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스스로 건강(建康)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1세 된 아들 유의진(劉義真)과 장수들인 왕진악(王鎮惡), 심전자(沈田子), 모덕조(毛德祖), 그리고 관리 왕수(王脩) 등을 장안(長安)에 남겨 수비를 맡겼다.
  • 유유가 장안을 떠나자, ()의 황제 혁련발발(赫連勃勃)은 장안을 점령할 기회로 보고, 아들 혁련괴(赫連璝)와 혁련창(赫連昌), 장수 왕매덕(王買德)에게 3방향에서 장안으로 진격하게 하고, 동시에 낙양(洛陽)과 장안을 잇는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 한편, 장안 수비를 맡은 왕진악과 심전자는 이전부터 서로 질투심이 깊었고, 심전자는 왕진악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살해했다. 이에 왕수는 심전자를 처형했지만, 이번에는 유의진이 왕진악이 실제로 반역을 꾀했고, 왕수도 공모했다고 믿고 왕수를 처형했다.
  • 왕수가 죽자 유의진은 감시할 인물이 사라졌고, 하군(夏軍)을 두려워한 그는 군대를 장안 성 안으로 모두 철수시켰다. 하의 군대는 곧 장안을 포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유는 주령석(朱齡石)을 파견해 유의진을 대신하게 하고, 유의진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유의진의 군대는 장안에서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철수가 지연되었고, 결국 청니(青泥, 현재 산시성 시안 부근)에서 하군에게 전멸을 당했다. 거의 전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유의진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탈출했다. 장안 지역은 하의 영토가 되었고, ()은 낙양 일대만 유지하게 되었다.
 

기원후 418

  • 418년 여름, 유유는 마침내 송공(宋公) 작위와 구석(九錫)을 받아들였고, 안제(晉安帝)에게 송왕(宋王) 작위를 요청하도록 했으나, 표면적으로는 이를 사양하였다. 한편 그는 다음과 같은 예언에 대한 믿음을 굳히게 되었다:
    “창명(昌明) 이후 두 명의 황제가 더 있을 것이다.”
    ‘창명은 안제의 아버지 효무제(孝武帝)의 자(), ‘새벽을 의미한다.
  • 이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유유는 안제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러 차례 시종들을 시켜 안제를 독살하려 했지만, 안제의 동생 사마덕문(司馬德文)이 항상 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기원후 419

  • 그러던 중, 419년 초, 사마덕문이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가 요양하게 되자, 유유는 자객 왕소지(王韶之)에게 기회를 주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왕소지는 천으로 꼰 끈으로 안제를 목졸라 살해했다고 한다.
  • 이후, 유유는 사마덕문을 황제로 옹립하였으며, 그는 바로 공제(恭帝)가 되었다.
  •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바보로 태어난 탓에 비운의 인생을 산 장본인이다. 또한 사마덕종의 극에 달하는 멍청함으로 인하여 제후들이 서로 자기가 실권을 쥐겠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동진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결국 그 다음대인 동진 공제의 대에 이르러서 유유에 의해 동진은 멸망하고 말았다.
 

가족관계

  • 부친 :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 모친 : 안덕황태후(安德皇太后) 진씨(陳氏)
  • 배우자 : 안희황후(安僖皇后) 왕씨(王氏)
  • 동생 : 사마덕문(司馬德文) - 공제(恭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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