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4일 토요일

유송 소제 유의부(劉宋 少帝 劉義符, AD. 406~424년) : 유송 2대 황제(AD. 422~424년)

유송 소제 유의부(劉宋 少帝 劉義符, AD. 406~424) : 유송 2대 황제(AD. 422~424)

 
  • 송소제 유의부(宋少帝 劉義符)
  • 출생 : 406
  • 사망 : 42484
  • 재위 : 422626~ 42477(211)
  • 전임자 : 송무제(宋武帝) 유유(劉裕)
  • 후임자 : 송문제(宋文帝) 유의륭(劉義隆)
  • 연호
    경평(景平) : 423~ 4248
  • 시호(諡號) : 없음
  • 묘호(廟號) : 없음
 

기원후 406

  • 유의부(劉義符)는 의희(義熙) 2(406)에 태어났다. 이때 유유(劉裕)는 이미 44세였고, 늦게 얻은 이 아들을 매우 기뻐했다. 후에 그를 예장공(豫章公) 세자(世子)로 세웠다.
  • 그의 어머니는 유유의 첩인 장귀인(張貴人)이었고, 유의부는 유유의 장남이었다.
 

기원후 415

  • 415, 유의부는 유유의 여장공(豫章公) 작위의 세자(후계자)로 정식 임명되었고, 연주(兗州, 당시의 현대 장쑤성 중부)의 자사(지방 총독)로 임명되었다.
 

기원후 416

  • 416년에는 예주(豫州, 현대 안후이성 중부) 자사로 옮겼으며, 그해 말에는 다시 연주 자사로 임명됨과 동시에 서주(徐州, 현대 장쑤성 북부) 자사로도 임명되었다.
  • 의희 12(416) 유유가 후진(後秦)을 북벌할 때, 유의부는 중군장군(中軍將軍)을 맡아 태위(太尉) 유부사(留府事)를 감독하며 건강(建康) 유부를 지켰다. 이때 실질적인 권한은 유목지(劉穆之)가 가지고 있었다.
 

기원후 417

  • 417,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병합한 후, 유목지가 사망하자 유유는 철수하였고, 후진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은 유의부의 동생인 유의진(劉義真) 계양공(桂陽公)에게 맡겼지만, 이 역시 실질적인 통치는 장군들과 관리들이 담당하였다.
 

기원후 418

  • 418, 유유가 팽성(彭城, 현대 장쑤성 쉬저우)에 도착했을 무렵, 그는 유의부를 형주(荊州, 대략 현대 후베이 지역)의 자사로 임명하려 했지만, 장소(張邵)세자는 건강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였기에, 해당 직책은 대신 유의륭(劉義隆)에게 돌아갔다.
  • 같은 해, 유유가 송공(宋公)이라는 더 높은 작위를 수락하자, 유의부는 그 작위의 세자가 되었다.
 

기원후 419

  • 유유는 원희(元熙) 원년(419)에 송왕(宋王)으로 진봉(進封)되었고 특별한 예우를 더 받았으며, 유의부는 송왕 태자가 되었다.
  • 이 시기 즈음에 유의부는 진 공제(晉 恭帝)의 딸인 해안공주(海鹽公主) 사마모영(司馬茂英)과 혼인하였다.
 

기원후 420

  • 영초(永初) 원년(420) 유유가 진()을 찬탈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자, 유의부 또한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기원후 422

  • 422, 무제가 병이 들었을 무렵, 신하 사회(謝晦)는 태자 유의부가 능력과 덕이 부족한 인물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다고 보고, 무제에게 이를 경고하였다. 무제는 대신 노릉왕(魯陵王) 유의진(劉義真)을 태자로 삼는 것을 고려하였으나, 사회가 유의진을 직접 만나본 뒤 오히려 유의진에 대해 더 나쁜 인상을 받게 되자, 그 생각을 철회하였다.
  • 유유는 병이 위독해졌다. 유의부를 특별히 불러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단도제(檀道濟)는 재능과 지략은 있으나 원대한 포부가 없으니, 그의 형 단소(檀韶)처럼 다루기 어려운 인물은 아니다. 서선지(徐羨之)와 부량(傅亮)은 아마도 딴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사회(謝晦)는 여러 번 나와 함께 출정하며 기지가 뛰어났으니, 만약 누군가 딴마음을 품는다면 필시 그일 것이다.”
  • 유유는 서선지, 부량, 사회, 그리고 단도제 네 사람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삼고, 이후 어린 군주가 즉위하더라도 모후(母后)가 섭정하지 말고 모든 정사를 재상에게 맡기도록 명했다. 유유가 5월 계해일(626)에 세상을 떠난 후, 유의부는 같은 날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다.
  • 소제(少帝) 유의부(劉義符)는 자신의 계조모 소문수(蕭文壽)를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존봉하였고, 아내 태자비(太子妃) 사모영(司馬茂英)을 황후(皇后)로 책봉하였다. 중앙 정무는 주로 서현지(徐羨之), 부량(傅亮), 사회(謝晦)에게 맡겨졌다.
  • 북위(北魏)의 명원제(明元帝)가 무제(武帝) 유유(劉裕)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황하를 건넜다. 422년 겨울, 북위 군은 활태(滑台, 현재 하남성 안양시)를 점령했다.
 

기원후 423

  • 북위가 423년 봄에 낙양(洛陽)을 점령하였다. 이에 단탄도제(檀道濟)가 북방의 도시들을 지키기 위해 파견되었고, 산동반도는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으나, 423년 여름까지 호뢰(虎牢, 현재 하남성 정주시)와 서창(許昌)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그제야 북위는 진격을 멈췄다.
  • 423년 가을, 소제는 자신의 어머니 장귀인(張貴人)을 황태후(皇太后)로 존봉하였다.
 

기원후 424

  • 424년이 되자, 서현지, 부량, 사회는 점점 소제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소제가 선황(先皇) 무제의 삼년상을 지내는 기간 중에도 예에 따르지 않고, 공부나 정사에는 관심 없이 오락과 쾌락에만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하 범태(范泰)가 여러 차례 바른말로 충언했지만, 소제는 따르지 않았다.
  • 이 세 정권 실세들은 소제를 폐위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으나, 당시 무제의 둘째 아들 유의진(劉義真) 또한 문제였다. 유의진은 재능은 있었으나 더욱 경박한 행동을 일삼으며, 사영운(謝靈運), 안연지(顏延之)와 같은 재주 있지만 품행이 방탕한 이들과 어울렸고, 자주 조정에 재정 지원을 요구하였다.
  • 이에 세 정권 실세들은 소제와 유의진 사이에 있던 원한을 부추기고, 유의진에게 죄가 있다고 참소하였다. 소제는 유의진을 백성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신안군(新安, 대략 지금의 절강성 항저우 부근)으로 유배 보냈다.
  • 유의진을 제거한 후, 그들은 소제를 폐위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도제와 왕홍(王弘)의 군세를 두려워하여 먼저 두 사람을 수도로 불러들인 뒤, 그들에게 계획을 알렸다. 그리고 먼저 황궁의 친위대에게 저항하지 말도록 설득한 후,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 소제는 아직 아침에 일어나기도 전에 병사들이 침전으로 들이닥쳤고, 간단히 저항했지만 붙잡혔다. 이후 그는 자신의 예전 궁으로 되돌려 보내졌고, 대신들과 대신들 명의로 장태후(張太后)가 칙서를 내려, 소제의 과실을 열거한 뒤, 영양왕(潁陽王)으로 강등시키고, 그의 동생 유의륭(劉義隆) 의도왕(義都王)에게 제위를 양위하도록 하였다.
  • 유의부(劉義符)는 오군(吳郡, 대략 현재의 강소성 소주시)으로 유배되어 철저한 감시 아래에 놓였다.
  • 월 계축일(84), 서선지(徐羨之)는 자객 형안태(邢安泰)를 보내 폐제를 암살하도록 하였다.
  • 유의부는 여전히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오군의 수도에서 탈출을 시도하며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문고리로 머리를 맞아 넘어졌고, 끝내 살해되었다.
 

기원후 432

  • 유의부는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지만, 원가(元嘉) 9(432)에 이르러 유의공(劉義恭)의 장남 유랑(劉朗)을 남풍현왕(南豐縣王)으로 봉하여 유의부의 후사(後嗣)로 삼았다.
 

가족 관계

  • 부친 :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 유유(劉裕)
  • 모친 : 영양국 태비(營陽國太妃) 장씨(張氏)
  • 황후(皇后) : 사마무영(司馬茂英)
  • 형제 :
    • 유의진(劉義真) : ()에서 계양공(桂阳公)에 봉해짐(시대에 노릉왕(庐陵王)에 봉해짐관직은 사도(司徒)에 이름소제 시대에 서선지 등에 의해 서인(庶人)으로 폐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됨후에 복위됨
    • 유의륭(劉義隆) : 송문제(宋文帝), (시대에 팽성공(彭城公)에 봉해짐(시대에 의도왕(宜都王)에 봉해짐관직은 진서장군(鎮西將軍),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이름서선지의 추천으로 황제가 됨
    • 유의강(劉義康) : 팽성왕(彭城王)에 봉해짐관직은 사도(司徒), 녹상서사(錄尚書事), 영양주자사(領揚州刺史)에 이르러 조정의 정사를 맡음그러나 후에 강주(江州)로 좌천되고범엽(范曄)의 모반 사건으로 서인(庶人)으로 폐위됨후에 호탄세(胡誕世등이 유의강을 받들어 모반하려 한 사건으로 송문제에게 살해됨
    • 유의공(劉義恭) : 강하왕(江夏王)에 봉해짐관직은 태재(太宰)에 이름송전폐제(宋前廢帝시대에 유원경(柳元景)과 밀모하여 폐제를 계획하다가 전폐제에게 사지가 절단되어 살해됨
    • 유의선(劉義宣) : 남군왕(南郡王)에 봉해짐유소(劉劭)의 부친 살해 및 자립 사건을 토평하는 데 참여함관직은 중서감(中書監)에 이름후에 형상이주자사(荊湘二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병사를 일으켜 모반하다 사건이 발각되어 체포되고 옥중에서 자살함
    • 유의계(劉義季) : 형양왕(衡陽王)에 봉해짐관직은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에 이름유의강이 폐위된 후 매일 술에 취해 지냄서주자사(徐州刺史시절에는 북위(北魏)가 남침해도 술만 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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