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3일 토요일

[BC. 112~105]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 : 로마 공화정의 위기를 드러낸 북아프리카의 대격돌

[BC. 112~105]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 : 로마 공화정의 위기를 드러낸 북아프리카의 대격돌

 
유구르타 전쟁은 기원전 112년부터 105년까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 왕국 사이에 벌어진 군사적 충돌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영토 분쟁을 넘어, 로마 공화정 말기, 로마 원로원(Roman Senate) 내부의 깊은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로마 군사 시스템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동시에 이 전쟁은 로마의 군제 개혁을 이끌고 정치적 야망을 키운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탄생시킨 무대이기도 했다. 로마는 결국 승리했지만, 이 전쟁의 승리는 막대한 대가와 함께 로마 공화정의 불안정한 미래를 예고하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1. 전쟁의 서막 : 누미디아의 혼란과 로마의 오만

 
유구르타 전쟁의 발단은 누미디아 왕국의 왕위 계승 분쟁과 로마의 안일하고 부패한 외교 정책이 얽히면서 시작되었다.
 
누미디아 왕국의 복잡한 왕위 계승 :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강력한 고대 왕국으로, 3차 포에니 전쟁(Third Punic War) 이후 로마의 중요한 동맹국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원전 118, 누미디아의 미키프사(Micipsa) 왕이 사망하자, 왕국은 그의 두 아들인 아데르발(Adherbal)과 힘살 1(Hiempsal I), 그리고 서자 조카이자 양아들인 유구르타(Jugurtha,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104)에게 공동으로 상속되었다. 유구르타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겸비했으며, 과거 누만티아 공방전(Siege of Numantia)에서 로마군과 함께 싸우며 로마의 군사 전술과 사회 체제의 취약점을 파악했다.
 
미키프사 왕의 사망 이후, 세 명의 상속자 사이의 권력 다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유구르타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시켜 가장 어리고 용감했던 힘살 1(Hiempsal I)를 암살하며 왕위 계승 분쟁의 피비린내 나는 서막을 열었다. 힘살 1세가 제거되자 유구르타는 아데르발에게 전면전을 선포했고, 아데르발은 위협을 느껴 로마 공화국에 망명하여 원로원에 도움을 호소했다.
 
로마 원로원의 부패한 개입 : 로마 원로원은 누미디아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조사를 진행했지만, 유구르타의 막대한 뇌물 공세로 인해 공정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특히 당시 전 집정관(consul) 루키우스 오피미우스(Lucius Opimius)를 비롯한 로마의 고위 관리들은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 그의 불법 행위를 눈감아 주었다. 결국 누미디아 왕국은 유구르타와 아데르발에게 불평등하게 분할되었고, 유구르타는 더 부유하고 비옥한 서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로마의 부패하고 미온적인 태도는 유구르타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키르타 공방전의 비극 : 유구르타는 로마의 부패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야망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데르발의 영토를 끊임없이 침범하다가 기원전 113년에는 누미디아의 수도이자 천연 요새인 키르타(Cirta)까지 포위했다. 키르타 공방전(Siege of Cirta)에서 아데르발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사절단은 유구르타의 시간 끌기 전술과 뇌물에 농락당했다. 결국 성이 함락되자 유구르타는 아데르발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성안의 로마 시민들까지 예외 없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키르타에서의 로마 시민 학살 소식이 로마 본토에 전해지자 로마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특히 '트리부누스 플레비스(tribunus plebis)'인 가이우스 멤미우스(Gaius Memmius)와 같은 대중파(Populares) 정치인들이 원로원 내의 부패를 강력히 규탄하며 유구르타에 대한 전쟁을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대중의 압력에 못 이겨 기원전 112, 유구르타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2. 전쟁의 전개 : 로마의 고전과 부패의 심화

 
전쟁이 시작되자, 로마군은 유구르타의 교활한 전술과 로마 지휘부 내부의 문제로 인해 연이은 실패를 경험했다.
 
베스티아의 '굴욕적인 평화' : 로마군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Lucius Calpurnius Bestia)가 지휘하며 누미디아를 침공했으나, 그는 유구르타와 조기에 평화 조약을 맺어버렸다. 이 조약은 너무나 관대하여 다시금 유구르타의 뇌물 수수 의혹을 증폭시켰고, 로마 대중은 격노했다. 멤미우스(Gaius Memmius)의 압력으로 유구르타는 로마로 소환되어 원로원 앞에서 증언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호민관인 바에비우스(Baebius)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증언을 거부시키는 등 로마의 사법 체계를 농락했다.
 
로마에서 유구르타의 사촌인 마시바(Massiva)가 누미디아 왕위를 주장하자, 유구르타는 로마 내에서 그를 암살하는 대담한 행동까지 저질렀다. 이로 인해 로마 원로원은 그를 추방하고 베스티아(Lucius Calpurnius Bestia)와 맺은 평화 조약을 파기하며 전쟁을 재개했다.
 
수툴 전투의 치욕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Spurius Postumius Albinus)와 그의 형제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가 지휘를 맡은 로마군은 더욱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기원전 110, 아울루스 알비누스는 유구르타의 계략에 빠져 수툴(Suthul) 근처에서 누미디아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로마군은 보급로가 끊기고 퇴각할 길마저 막히면서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아울루스(Aulus Postumius Albinus)는 굴욕적인 항복 조건, 즉 모든 무기를 넘겨주고 '멍에 아래로 지나가는(pass under the yoke)' 치욕적인 의식을 치렀다.
 
 
수툴에서의 참패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 대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로마 원로원 내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렉스 마밀리아(Lex Mamilia)' 법안이 통과되어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원로원 의원들이 처벌받는 등 일련의 정치적 심판이 이루어졌다.
 

3. 메텔루스에서 마리우스로 : 전쟁의 전환점

 
로마군은 계속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사기가 저하되었고, 유구르타는 자신의 전술이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로마는 새로운 지휘관을 필요로 했다.
 
메텔루스의 등장과 군대 재정비 : 기원전 109, 로마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자 유능하고 강직한 인물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91)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유구르타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메텔루스가 누미디아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은 사기가 저하되고 규율이 문란해져 있었다. 그는 철저한 군율과 훈련을 통해 군대의 기강을 재확립하고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무툴 전투와 유구르타의 전략 변화 : 재정비된 로마군은 무툴 강(Muthul River)에서 유구르타와 맞붙었다. 이 무툴 전투(Battle of the Muthul)는 전술적으로 무승부였지만, 유구르타의 매복 전술에 로마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메텔루스의 탁월한 지휘와 그의 레가투스(legate)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의 활약으로 로마군은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전투 이후 유구르타는 로마군과의 정면 대결을 완전히 피하고 게릴라 전쟁 전략으로 전환했다.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는 유구르타의 보물 요새인 자마(Zama)를 포위했으나, 유구르타의 기습적인 교란 전술로 인해 함락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후 메텔루스는 또 다른 요새인 탈라(Thala)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지만, 유구르타는 탈라가 함락되기 전 탈출하며 로마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마리우스의 지휘권 인수와 군제 개혁 : 전쟁의 장기화와 메텔루스의 더딘 진격에 지친 로마 대중은 마리우스(Gaius Marius)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로마로 돌아가 집정관직에 출마했다.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메텔루스로부터 넘겨받았다 .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로마 군대에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재산 기준을 무시하고, 재산이 없는 시민들, '카피테 켄시(capite censi)'까지 병사로 징집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들은 국가에 봉사하며 보상과 퇴직 후 토지를 받을 수 있었기에 마리우스에게 충성심이 높았다. 이 개혁은 로마 군대의 규모와 질을 크게 향상시켰고, 이후 로마 군대의 전문화와 주요 장군들의 사병화에 기여하게 된다.
 

4. 전쟁의 종결 : 술라의 활약과 유구르타의 몰락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재편성된 군대를 이끌고 유구르타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그는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Cirta)와 탈라(Thala) 등 주요 거점을 함락시키며 유구르타의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물루차 요새 공방전 : 기원전 106,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유구르타의 중요한 보물 창고인 물루차(Muluccha) 요새를 포위했다. 이곳은 험준한 지형에 둘러싸여 공성 장비 사용이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로마군은 계속 실패했지만, 한 병사가 우연히 발견한 비밀 통로를 통해 마리우스는 나팔수와 소규모 병력을 침투시켜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교활한 작전을 구사했다. 이 작전으로 물루차 요새는 함락되었고, 유구르타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보크수스의 배신과 유구르타의 체포 : 마리우스(Gaius Marius)의 지속적인 압박은 유구르타의 장인이자 동맹이었던 마우레타니아(Mauretania)의 왕 보크수스 1(Bocchus I)를 움직이게 했다. 보크수스는 자신의 왕국이 황폐화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마리우스의 부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기원전 78)가 보크수스 왕에게 특사로 파견되어, 유구르타와의 동맹을 끊고 로마 편에 설 것을 설득했다. 보크수스는 위험한 협상 끝에 유구르타를 자신에게 오도록 유인했고, 술라는 유구르타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05, 유구르타는 술라에게 체포되어 로마에 끌려갔고, 로마의 개선식에 끌려다니는 굴욕을 겪은 뒤 지하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써 길고 복잡했던 유구르타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유구르타의 체포
유구르타의 체포

5. 전쟁의 여파와 역사적 의의

 
유구르타 전쟁은 로마에게 큰 승리였지만, 동시에 로마 공화정 말기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미래의 격변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 로마 원로원의 부패 노출 : 전쟁을 통해 로마 원로원 내 일부 인사들의 부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로마 사회 전체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대중파가 원로원 귀족들을 비난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 마리우스의 재산 없는 시민들을 병사로 징집하는 개혁은 로마 군대의 병력난을 해결하고 전문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는 병사들이 국가보다 특정 지휘관에게 충성하는 '사병화(privatization of army)' 경향을 심화시켰고, 이후 공화정 말기 내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마리우스와 술라의 라이벌 관계 시작 : 유구르타를 체포한 공로는 사실상 술라가 세웠지만, 모든 영광은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술라는 자신의 공로를 기록하고 선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훗날 마리우스와 술라 간의 치열한 정치적, 군사적 라이벌 관계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 공화정을 피로 물들인 내전의 서막이 되었다 .
  • 로마의 지중해 패권 강화 :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안정과 통제를 확고히 했다. 이는 로마가 지중해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유구르타 전쟁은 로마의 제국주의적 확장이 낳은 갈등의 결과이자, 로마 공화정의 내부 모순이 폭발한 전장 중 하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승리를 쟁취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약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 경험은 이후 로마 역사를 격동으로 이끌 중요한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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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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