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13] 키르타 공방전 : 유구르타 전쟁의 서막과 로마의 굴욕적인 복수극
고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이 지중해의 패권을 굳건히 해나가던 시기,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 왕국에서는 한 편의 비극적인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기원전 113년에 발생한 '키르타 공방전(Siege of Cirta)'은 단순한 왕위 계승 전쟁이 아니었다. 이는 로마의 외교적 무능력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의 부패가 낳은 비극이자, 결국 로마가 대규모 군사 작전인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을 시작하게 만든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키르타의 피 비린내 나는 함락과 그 과정에서 로마인들이 겪었던 굴욕은 로마 공화정 말기, 그들의 윤리적 위기와 군사적 맹점들을 여실히 드러냈다.
![]() |
초록색으로 표시된 누미디아 왕국과, 키르타의 위치가 함께 나타나 있음. |
1. 전쟁의 배경 : 누미디아의 혼란과 로마의 오만
키르타 공방전의 배경에는 누미디아 왕국의 복잡한 내부 사정과 로마의 오만하고 부패한 외교 정책이 얽혀 있었다. 누미디아는 현재의 알제리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으로, 카르타고(Ancient Carthage) 멸망 이후 서부 지중해에서 로마의 중요한 동맹국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누미디아의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 : 기원전 149년, 누미디아의 친로마 정책을 이끌었던 마시니사(Masinissa, 기원전 238년-기원전 148년) 왕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미키프사(Micipsa, 기원전 149년-기원전 118년 통치)가 왕위에 올랐다. 미키프사에게는 두 명의 적자, 즉 아데르발(Adherbal, 생몰년 미상)과 힘살 1세(Hiempsal I, 생몰년 미상)가 있었다. 하지만 왕에게는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와 비견될 만큼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야심을 지닌 서자 조카 유구르타(Jugurtha,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104년)가 있었다. 유구르타(Jugurtha)는 과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기원전 185년-기원전 129년)가 지휘하던 누만티아 공방전(Siege of Numantia)에서 로마군과 함께 싸우며 로마의 군사 전술과 정치적 배경을 이해하게 된 인물이었다. 미키프사는 이러한 유구르타(Jugurtha)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아들들에게 위협이 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입양하고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공동 상속자로 지명했다.
미키프사 왕이 사망하자, 세 상속자 간의 권력 다툼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왕국을 세 지역으로 분할하는 것에 합의하려 했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무력 충돌로 비화되었다. 유구르타(Jugurtha)는 가장 어리고 용감했던 힘살 1세(Hiempsal I)를 자신의 추종자들을 시켜 암살하며 왕위 다툼의 피비린내 나는 서막을 열었다.
로마의 부패한 개입 : 힘살 1세(Hiempsal I)의 죽음 이후, 유구르타(Jugurtha)는 아데르발(Adherbal)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데르발(Adherbal)은 로마에 망명하여 원로원(Roman Senate)에 도움을 호소했다. 로마 원로원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집정관(consul) 루키우스 오피미우스(Lucius Opimius)가 이끄는 10인의 위원회를 파견했다. 하지만 유구르타(Jugurtha)는 로마 위원들을 막대한 뇌물로 매수했고, 결국 이 위원회는 유구르타(Jugurtha)의 죄를 눈감아준 채 누미디아 왕국을 유구르타(Jugurtha)와 아데르발(Adherbal)에게 불평등하게 분할했다. 유구르타(Jugurtha)는 더 부유하고 비옥한 서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의 부패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유구르타(Jugurtha)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116년부터 그는 아데르발(Adherbal)의 국경을 반복적으로 침범하고 괴롭히며 전면전을 도발했다. 아데르발(Adherbal)은 다시 로마에 유구르타(Jugurtha)의 불법 행위를 고발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이전과 다름없이 무기력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키르타로의 퇴각 : 기원전 113년, 유구르타(Jugurtha)는 마침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데르발(Adherbal)의 영토를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아데르발(Adherbal)은 루시카데(Rusicade) 근처에서 유구르타(Jugurtha) 군과 맞섰으나, 처참하게 패배했다. 잔여 병력을 이끌고 도주한 아데르발(Adherbal)은 누미디아의 수도이자 천연 요새인 키르타(Cirta)로 퇴각하여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2. 공성전의 전개 : 키르타의 견고함과 로마의 딜레마
키르타(Cirta)는 높이 솟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아래에는 암프사가(Ampsaga) 강이 흐르고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천연 요새였다. 도시는 오랫동안 포위군에 맞설 수 있을 만큼 견고했다.
키르타 수비대의 저항과 로마인들의 운명 : 키르타 내부에는 아데르발(Adherbal)에게 충성하는 누미디아인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로마 상인들과 그 가족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로마 시민들은 카르타고 멸망 이후 북아프리카 무역의 주요 플레이어였으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키르타 주민들과 함께 성벽 방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유구르타(Jugurtha)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로마 사절단의 연이은 실패 : 키르타가 포위되자 아데르발(Adherbal)은 다시 한번 로마에 구원 요청을 보냈다. 로마 원로원은 유구르타(Jugurtha)의 행동을 규탄하며 또 다른 위원회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구르타(Jugurtha)는 로마 사절단을 깔보았다. 그는 아데르발(Adherbal)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우며 협상을 거부했고, 로마 사절단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갔다.
로마 원로원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특히 로마 시민들이 키르타 안에 갇혀 있다는 소식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원로원은 당시 로마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 있는 정치가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기원전 115년 집정관)가 이끄는 고위 사절단을 파견하여 유구르타(Jugurtha)를 위협하고 협상에 임하도록 압박했다.
유구르타의 시간 끌기 전술 : 유구르타(Jugurtha)는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 키르타 성벽을 함락시키려 맹렬히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그는 사절단을 만나기 위해 유티카(Utica, Tunisia)로 갔다. 유구르타(Jugurtha)는 협상 과정에서 갖가지 모호한 주장과 변명으로 시간을 끌며 로마 사절단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키르타 공방전을 늦추라는 로마의 요구를 명확히 거부하거나 승인하지 않은 채 협상만 질질 끌었다. 결국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의 위원회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로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키르타의 함락과 비극적인 결말 : 로마의 외교적 시도가 모두 실패하고 시간만 끄는 사이, 키르타 성 내부의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식량이 고갈되자 아데르발(Adherbal)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을 결정했다. 그는 키르타 성안의 로마 시민들이 자신들의 로마 시민권으로 인해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의 동의를 받아 항복했다.
그러나 유구르타(Jugurtha)는 로마인들의 기대를 비웃었다. 성이 함락되자 유구르타(Jugurtha)는 항복한 아데르발(Adherbal)을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였다. 그리고 키르타 성벽 방어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로마 시민들까지 예외 없이 살해당했다. 이로써 키르타는 피로 물들었고, 로마인들의 자만심과 무능력이 낳은 끔찍한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3. 전쟁의 여파 : 유구르타 전쟁으로의 비화
키르타에서의 로마 시민 학살은 로마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로마인의 분노와 전쟁 요구 : 키르타에서의 참극은 로마 내부에서 유구르타(Jugurtha)에게 뇌물을 받은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비난 여론과 함께 유구르타(Jugurtha)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대중의 분노와 압박 속에서 로마 원로원은 마침내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 기원전 112년-기원전 105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누미디아 통제권 확보의 중요성 : 로마는 이미 카르타고(Ancient Carthage)를 멸망시켰기에, 서부 지중해에서의 주요 경쟁자는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로마는 이곳이 완전히 자신들의 통제 하에 있기를 원했다. 유구르타(Jugurtha)의 야심은 이러한 로마의 패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키르타 공방전은 단순히 누미디아 왕국 내의 한 전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로마의 제국주의적 확장 과정에서 드러난 내부의 부패와 비효율성, 그리고 이에 따른 막대한 인명 피해가 어떤 식으로 로마인의 분노와 결단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키르타의 비극은 로마가 뇌물을 뿌리고 조약을 위반하며 국익을 침해한 유구르타(Jugurtha)를 최종적으로 격멸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4. 결론 : 로마 공화정의 어두운 단면을 비춘 거울
키르타 공방전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로마의 위상과 정책의 그림자를 동시에 드러냈다. 이 전투는 로마가 가진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부패와 외교적 무능력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로마 시민들의 희생을 통해 결국 로마는 오랜 시간을 끌던 유구르타(Jugurtha)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적 개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로마의 지중해 패권이 어떤 비극적인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쟁취되고 유지되는지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키르타의 피 묻은 역사 속에서 로마는 단순히 힘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적 맹목성과 그로 인한 피할 수 없는 폭력의 굴레에 다시 한번 발을 들여놓았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