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10] 수툴 전투(Battle of Suthul) : 유구르타 전쟁의 서막을 장식한 로마의 굴욕
수툴 전투(Battle of Suthul)는 기원전 110년,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 사이에 벌어진 군사적 충돌이다. 이 전투는 길고 복잡했던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의 초기 단계에 해당하며,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Jugurtha)의 탁월한 전략과 로마군의 실책이 맞물려 로마가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비록 유구르타 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지만, 이 패배는 로마에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유구르타의 군사적 재능과 로마 군사 지도부의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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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에 주조된 동전으로, 누미디아 왕인 유구르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1. 유구르타 전쟁의 배경 : 로마의 부패와 누미디아의 야망
수툴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구르타 전쟁이 왜 발발했으며, 누미디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누미디아 왕국 내의 왕위 계승 분쟁과 로마 원로원(Roman Senate)의 부패한 개입에서 시작되었다.
누미디아 왕국의 혼란 :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강력한 고대 왕국으로, 제3차 포에니 전쟁(Third Punic War) 이후 로마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이 전쟁의 주인공인 유구르타(Jugurtha,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104년)는 누미디아의 마시니사(Masinissa) 왕의 서자 조카이자 손자뻘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겸비했다. 유구르타는 과거 누만티아 공방전(Siege of Numantia)에서 로마군과 함께 싸우며 로마의 군사 전술과 정치 시스템의 취약점을 파악했다.
기원전 118년, 누미디아의 미키프사(Micipsa) 왕이 사망하자, 그는 유구르타와 자신의 두 아들인 아데르발(Adherbal, 생몰년 미상)과 힘살 1세(Hiempsal I, 생몰년 미상)에게 왕국을 공동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가장 어린 힘살 1세(Hiempsal I)를 암살하며 왕위 계승 다툼의 피비린내 나는 서막을 열었다.
로마 원로원의 부패한 개입 : 힘살 1세(Hiempsal I)가 사망하자, 아데르발(Adherbal)은 로마에 망명하여 도움을 호소했다. 로마 원로원은 조사를 위해 위원회를 파견했으나, 유구르타는 이들 로마 위원들을 막대한 뇌물로 매수하여 자신의 불법 행위를 눈감도록 했다. 이로 인해 누미디아 왕국은 유구르타와 아데르발에게 불평등하게 분할되었다. 로마 원로원의 이러한 부패하고 무능한 태도는 유구르타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구르타는 아데르발의 영토를 침공했고, 기원전 113년에는 누미디아의 수도인 키르타(Cirta)까지 포위했다. 키르타 공방전에서 로마 시민들까지 살해되는 참극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로원은 여전히 유구르타의 뇌물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키르타에서 로마 시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원로원은 대중의 압력에 못 이겨 유구르타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2. 알비누스의 지휘와 유구르타의 함정
유구르타 전쟁이 시작된 기원전 112년 이후, 로마군은 유구르타의 탁월한 게릴라 전술과 뇌물 살포, 그리고 로마 내부의 지휘관들 간의 갈등과 부패로 인해 고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110년의 수툴 전투가 벌어졌다.
알비누스의 군대 지휘 : 기원전 110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Spurius Postumius Albinus, 기원전 110년 집정관)는 누미디아를 침공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로마에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로 잠시 귀환해야 했고, 그의 형제인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 기원전 99년 집정관)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
아울루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는 형의 지시를 무시하고 섣부른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조급함에 유구르타의 책략에 쉽게 넘어갔다.
수툴 전투의 함정 : 유구르타(Jugurtha)는 로마군을 수툴(Suthul) 근처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수툴(Suthul)은 누미디아에 위치한 지역으로, 오늘날 알제리 겔마(Guelma)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구르타는 아울루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를 끌어들이기 위해 교활한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로마군과 협상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벌고, 군대를 분산시키거나 후퇴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로마군의 경계심을 풀었다.
유구르타(Jugurtha)는 로마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잘 훈련된 누미디아 기병과 경보병을 이용하여 로마군을 협소한 지형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로마군은 보급로가 끊기고 퇴각할 길마저 막히면서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이는 한니발(Hannibal Barca)이 칸나이 전투(Battle of Cannae)에서 구사했던 전술과 유사한 포위 섬멸 작전의 소규모 버전이었다.
로마군은 수툴(Suthul) 근처에서 유구르타(Jugurtha)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3. 전투의 결과와 로마의 굴욕적인 평화
수툴 전투의 결과는 누미디아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아울루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가 이끄는 로마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살아남기 위해 유구르타가 제시한 굴욕적인 평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 로마군의 완전한 무장 해제 : 로마군은 유구르타(Jugurtha)와의 협상 끝에 그의 요구를 수락하고, 모든 전리품과 무기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멍에 아래로 통과하는(pass under the yoke)' 굴욕적인 의식을 치렀다. 이는 로마 군사 역사상 몇 안 되는 치욕적인 경험 중 하나로, 과거 제2차 삼니움 전쟁(Second Samnite War) 중 카우디네 포크스 전투(Battle of Caudine Forks)에서 삼니움족에게 당했던 치욕과 비견될 만했다.
- 로마로 전해진 충격 : 수툴에서의 참패 소식은 로마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는 로마의 군사적 명성뿐만 아니라, 유구르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로마 지휘부의 무능함과 부패를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 전투의 여파와 로마 정치의 격변
수툴 전투에서의 굴욕은 로마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 시민들은 이 전쟁이 장기화되고 막대한 비용이 소모됨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패배를 거듭하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
- 알비누스 형제에 대한 비난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Spurius Postumius Albinus)는 로마로 돌아와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려 했으나, 대중과 원로원 모두 그의 설명을 믿지 않았다. 그와 그의 형제 아울루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는 누미디아에서의 실패와 굴욕적인 조약 체결로 인해 로마 사회 전체의 비난을 받았다.
- 정치적 심판과 대중의 분노 : 이러한 분노는 정치적 심판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09년, 호민관 가이우스 마밀리우스 림풀루스(Gaius Mamilius Limpulanus)는 원로원 의원들이 유구르타로부터 뇌물을 받았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위원회 설치 법안(Lex Mamilia)을 통과시켰다. 이 조사 결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Lucius Caecilius Metellus), 마르쿠스 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등 유구르타와 관련된 주요 정치인들이 심판을 받았다. 알비누스 형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툴에서의 패배는 유구르타의 뇌물 수수 사건과 맞물려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적 부패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 새로운 지휘관의 임명 : 로마 원로원은 수툴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고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지휘관을 임명했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91년)가 유구르타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메텔루스는 유능하고 정직한 인물로, 로마군의 기강을 재확립하고 유구르타를 상대로 연이은 승리를 거두며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켰다.
5. 수툴 전투의 역사적 의미
수툴 전투는 유구르타 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유구르타의 전략적 능력 입증 : 수툴 전투는 유구르타가 단순히 용맹한 전사가 아니라, 로마군을 상대로 함정을 파고 기만 전술을 구사할 줄 아는 탁월한 전략가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의 전술은 로마의 지휘관들을 농락할 만큼 뛰어났다.
- 로마 군사적, 정치적 부패의 상징 : 이 전투는 로마군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로마 정치권의 혼란이 어떻게 외부 전쟁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수툴에서의 굴욕은 로마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향후 로마 지휘관의 교훈 : 수툴의 실패는 로마군에게 유구르타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기 위한 더욱 신중하고 철저한 전략이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이는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와 이후 등장할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유구르타를 상대하는 데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수툴 전투는 로마의 명성과 자부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 굴욕적인 패배였지만, 동시에 로마가 적을 더 이상 과소평가하지 않고 자신들의 내부 문제를 직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은 전투의 패배는 유구르타 전쟁의 더 큰 흐름 속에서 로마가 결국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값비싼 교훈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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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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