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06] 두 번째 키르타 전투(Second Battle of Cirta) : 유구르타 전쟁의 마지막 대결과 로마의 승리
고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 세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던 시기,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 왕국에서는 한 편의 길고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이다. 기원전 106년에 발생한 '두 번째 키르타 전투(Second Battle of Cirta)'는 이 전쟁의 중요한 국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로마의 명장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 157년-기원전 86년)의 지휘 아래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Mauretania)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이 전투는 유구르타(Jugurtha,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104년)의 군사적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마 공화정 말기의 주요 인물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년-기원전 78년)의 명성을 드높이며 훗날 마리우스와 술라 간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 유구르타 전쟁의 배경 : 로마의 부패와 누미디아의 야심
두 번째 키르타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구르타 전쟁이 왜 발발했으며, 당시 누미디아와 로마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심층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누미디아 왕국 내의 왕위 계승 분쟁과 로마 원로원(Roman Senate)의 부패한 개입에서 시작되었다.
누미디아 왕국의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 : 누미디아는 현재의 알제리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강력한 고대 왕국으로, 제3차 포에니 전쟁(Third Punic War) 이후 로마의 중요한 동맹국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원전 118년, 누미디아의 미키프사(Micipsa, 기원전 149년-기원전 118년 통치) 왕이 사망하자, 왕국은 그의 두 아들인 아데르발(Adherbal, 생몰년 미상)과 힘살 1세(Hiempsal I, 생몰년 미상), 그리고 서자 조카이자 양아들인 유구르타에게 공동으로 상속되었다. 유구르타는 어릴 적부터 비범한 군사적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보여주었다. 그는 과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기원전 185년-기원전 129년)가 지휘하던 누만티아 공방전(Siege of Numantia)에 로마군과 함께 참전하며 로마의 군사 전술과 사회 체제의 취약점을 파악했다.
미키프사 왕의 사망 이후, 세 명의 상속자 사이의 권력 다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유구르타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시켜 가장 어리고 용감했던 힘살 1세(Hiempsal I)를 암살하며 왕위 계승 분쟁의 피비린내 나는 서막을 열었다. 힘살 1세(Hiempsal I)가 제거되자 유구르타는 아데르발(Adherbal)에게 전면전을 선포했고, 아데르발은 위협을 느껴 로마 공화국에 망명하여 원로원에 도움을 호소했다.
로마의 부패한 개입과 대중의 분노 : 로마 원로원은 누미디아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조사를 진행했지만, 유구르타의 막대한 뇌물 공세로 인해 공정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러한 로마의 부패하고 미온적인 태도는 유구르타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구르타는 기원전 113년에 아데르발의 영토를 침공했고, 누미디아의 수도이자 천연 요새인 키르타(Cirta)까지 포위했다. 키르타 공방전(Siege of Cirta)에서 로마 시민들까지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로원은 여전히 유구르타의 뇌물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키르타에서 로마 시민 학살 소식이 로마 본토에 전해지자 로마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특히 '트리부누스 플레비스(tribunus plebis)'인 가이우스 마밀리우스 림풀루스(Gaius Mamilius Limpulanus, 기원전 109년 호민관)는 원로원 내의 부패를 철저히 조사하기 위한 법안(Lex Mamilia)을 통과시키는 등 대중의 여론을 등에 업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대중의 압력에 못 이겨 유구르타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2. 메텔루스에서 마리우스로 : 지휘권 전환과 전략 변화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한 후, 로마군은 유구르타의 교활한 게릴라 전술과 뇌물 살포, 그리고 로마 지휘부 내의 갈등과 부패로 인해 연이은 실패를 경험했다. 특히 기원전 110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 기원전 99년 집정관)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수툴 전투(Battle of Suthul)에서 유구르타의 함정에 빠져 굴욕적인 항복을 당한 사건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다.
- 메텔루스의 재건 노력 : 이러한 상황에서 기원전 109년, 로마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자 유능하고 강직한 인물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91년)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유구르타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메텔루스는 부패와 무능력으로 사기가 저하된 로마군을 재정비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지휘 아래 재정비된 로마군은 무툴 강 전투(Battle of the Muthul)에서 유구르타와 맞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의 주력군을 보존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메텔루스는 탈라(Thala)의 보물 요새를 점령하는 등 유구르타의 재정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 마리우스의 지휘권 인수 : 메텔루스는 유능했지만, 유구르타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과 광활한 누미디아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지 못했다. 전쟁의 장기화에 지친 로마 대중은 메텔루스 휘하의 레가투스(legate)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로마로 돌아가 집정관직에 출마하여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로마 대중의 지지를 얻은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로마 군대에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재산 기준을 무시하고, 재산이 없는 시민들, 즉 '카피테 켄시(capite censi)'까지 병사로 징집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들은 국가에 봉사하며 보상과 퇴직 후 토지를 받을 수 있었기에 마리우스에게 충성심이 높았다. 이 개혁은 로마 군대의 규모와 질을 크게 향상시켰고, 이후 로마 군대의 전문화와 주요 장군들의 사병화에 기여하게 된다. 마리우스의 군대는 유구르타의 본거지인 누미디아 수도 키르타를 점령하고, 탈라 등 주요 보물 요새를 함락하며 유구르타의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후 마리우스는 서쪽으로 진격하며 누미디아 시골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 보크수스의 개입 : 마리우스(Gaius Marius)의 지속적인 압박은 유구르타의 동맹이자 장인이었던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크수스 1세(Bocchus I, 기원전 2세기)를 움직이게 했다. 유구르타와 함께 로마에 맞서 싸우던 보크수스는 자신의 왕국이 황폐화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특히 마리우스가 유구르타의 또 다른 주요 보물 요새인 물루차(Muluccha)를 점령하면서, 보크수스는 로마와의 전쟁에 대한 재고를 시작했다.
3. 전투의 서막 : 매복과 로마의 위기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물루차 요새를 함락시킨 후, 겨울 막사를 차리기 위해 다시 동쪽의 누미디아 수도 키르타로 돌아가려 했다. 로마군은 보크수스와 유구르타 연합군의 병력이 이 근처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세티프 근처의 매복 : 로마군이 동쪽으로 행군하던 중, 세티프(Setif) 서쪽에서 유구르타와 보크수스의 연합군이 로마군을 매복 공격했다. 이 매복 공격은 로마군을 혼란에 빠뜨릴 의도였다. 마리우스는 재빨리 병사들을 원형 방어 대형(defensive circles)으로 조직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개인적으로 기병대를 이끌고 가장 압박을 받는 전선에 지원을 나서는 등 노련한 지휘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기병대의 맹렬한 공격으로 마리우스의 주력군은 작은 언덕에 고립되었고, 그의 재무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이끄는 별동대 또한 근처의 다른 언덕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로마군은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 전날 밤의 재앙 : 공격자들은 로마군을 거의 전멸시켰다고 판단하여, 해가 저물자 진영으로 돌아가 승리를 축하하며 미리 자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밤새 방심하며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로마군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새벽이 되자 로마군은 반격에 나섰고, 방심하고 있던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연합군 진영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로마군은 적들을 격퇴하고 다시 키르타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 로마군의 재편성 : 로마군은 다시 키르타로 행군하면서, 추가적인 매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력을 강화했다. 마리우스는 군대를 사각형 진형(square formation)으로 재편성하여 모든 방향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는 지휘관들을 전선 곳곳에 배치하여 명령이 신속하게 전달되고 군율이 유지되도록 했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로마군 전체의 우익을 지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4. 결전의 장 : 두 번째 키르타 전투 (기원전 106년)
로마군이 키르타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마리우스의 척후병들이 유구르타의 군대가 네 개의 사단으로 나뉘어 진격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마리우스는 유구르타의 전술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섣부른 행동을 피하고 자신의 군대를 멈춰 세운 뒤 적이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 전투의 시작과 로마의 위기 : 유구르타는 공격을 명령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지휘하는 우익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다. 술라의 병사들은 적의 맹공을 막아냈으나, 바로 이때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크수스(Bocchus)와 그의 아들 볼룩스(Volux)가 로마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했다. 로마군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며 수적 열세에 처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연합군이 약 9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로마군(3만~4만 명)에 3대 1에 가까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
- 유구르타의 심리전과 술라의 반격 : 전투의 와중에 유구르타는 로마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방금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죽였다!"고 외치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칼을 보여주었다. 이 심리전은 한동안 효과를 발휘하여 로마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재빨리 반격을 감행하여 자신의 전선에서 적들을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보크수스(Bocchus)를 향해 돌격했다. 마우레타니아군은 술라의 맹공에 무너져 보크스스는 전장을 이탈했다.
- 마리우스의 결정적인 반격 : 한편,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자신의 병사들의 혼란을 수습하고 직접 공세에 나섰다. 그는 유구르타의 기병대 한 부대를 격파하고 적진의 다음 취약 지점을 향해 진격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각자의 전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집중 공략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로마군은 마침내 주도권을 잡았고, 유구르타 군대의 대부분을 학살하거나 격파했다.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Jugurtha)는 혼란 속에서 겨우 몸을 피해 도주했다. 로마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적들을 섬멸했다.
5. 전투의 여파 : 유구르타의 몰락과 술라의 부상
두 번째 키르타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곧장 키르타로 진격하여 겨울 막사를 설치했다. 하지만 유구르타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게릴라 전술을 계속하며 로마에 저항했다.
유구르타의 체포와 술라의 공로 : 전쟁의 최종적인 종결은 마리우스(Gaius Marius)의 부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의 활약 덕분이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보크수스(Bocchus) 왕에게 접촉하여 유구르타와의 동맹을 끊고 로마 편에 설 것을 설득했다. 자신의 왕국이 계속해서 황폐해지는 것에 지쳐있던 보크수스는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보크수스는 유구르타를 자신에게 오도록 유인했고, 술라는 보크수스의 궁정에서 위험한 작전을 수행했다. 보크수스 왕은 유구르타를 로마에 넘길지, 아니면 술라를 유구르타에게 넘길지 저울질하다가, 결국 로마와의 미래 관계를 위해 유구르타를 술라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105년, 유구르타는 술라에게 체포되어 로마에 끌려갔고, 로마의 개선식에 끌려다니는 굴욕을 겪은 뒤 지하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라이벌 관계 시작 : 유구르타의 체포는 사실상 술라가 주도했지만, 당시 술라는 마리우스 휘하의 장교였으므로 공식적인 모든 공로는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술라는 자신의 공로를 기록하고 선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열었으며, 이는 훗날 마리우스와 술라 간의 치열한 정치적, 군사적 라이벌 관계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로마 공화정 말기 격렬한 내전의 서막이 되었다.
6. 역사적 의미 : 유구르타 전쟁의 종결과 로마의 아프리카 패권
두 번째 키르타 전투는 유구르타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회전이자, 로마가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 로마의 군사적 우위 재확인 :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휘관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연합군에게 승리하며 자신들의 군사적 우위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는 로마 군대가 다양한 전술과 상황 변화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전쟁의 종결과 북아프리카 안정화 : 이 전투를 포함한 마리우스의 연이은 승리는 유구르타의 군사적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켰고, 최종적으로 유구르타를 체포함으로써 오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유구르타 전쟁의 종결로 로마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안정과 통제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 마리우스와 술라의 명성 상승 : 이 전투와 유구르타 전쟁 전체는 마리우스의 군사적 재능과 로마 군제 개혁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동시에 술라 역시 유구르타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로마 정치 무대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성공은 로마 군사 지도자들의 개인적 명성이 정치적 권력으로 직결되는 공화정 말기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두 번째 키르타 전투는 유구르타 전쟁의 중요한 마침표이자,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동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를 통해 로마는 자신들의 패권을 공고히 하고, 향후 지중해 전체의 패권을 쥐게 될 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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