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3일 토요일

[BC. 108] 탈라 공방전(Siege of Thala) : 유구르타의 끈질긴 저항과 메텔루스의 고독한 승리

[BC. 108] 탈라 공방전(Siege of Thala) : 유구르타의 끈질긴 저항과 메텔루스의 고독한 승리

 
고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 세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던 시기,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 왕국에서는 한 편의 길고 복잡한 전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이다. 기원전 108년에 발생한 '탈라 공방전(Siege of Thala)'은 이 전쟁의 중요한 국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91)가 이끄는 로마군과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Jugurtha, 기원전 160년경-기원전 104)의 지략이 충돌한 이 공방전은 로마군의 끈기와 인내, 그리고 유구르타의 비상한 전략과 끈질긴 저항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전투는 로마가 오랜 시간에 걸쳐 북아프리카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과 싸우며 패권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의 한 조각이다.
 

1. 유구르타 전쟁의 배경: 로마의 부패와 누미디아의 혼란

 
탈라 공방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구르타 전쟁이 왜 발발했으며, 당시 누미디아와 로마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심층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누미디아 왕국 내의 왕위 계승 분쟁과 로마 원로원(Roman Senate)의 부패한 개입에서 시작되었다.
 
누미디아 왕국의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 : 누미디아는 현재의 알제리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강력한 고대 왕국으로, 3차 포에니 전쟁(Third Punic War) 이후 로마의 중요한 동맹국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원전 118, 누미디아의 미키프사(Micipsa, 기원전 149-기원전 118년 통치) 왕이 사망하자, 왕국은 그의 두 아들인 아데르발(Adherbal, 생몰년 미상)과 힘살 1(Hiempsal I, 생몰년 미상), 그리고 서자 조카이자 양아들인 유구르타에게 공동으로 상속되었다. 유구르타는 어릴 적부터 비범한 군사적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보여주었다. 그는 과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기원전 185-기원전 129)가 지휘하던 누만티아 공방전(Siege of Numantia)에 로마군과 함께 참전하며 로마의 군사 전술과 사회 체제의 취약점을 파악했다.
 
미키프사 왕의 사망 이후, 세 명의 상속자 사이의 권력 다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유구르타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가장 어린 힘살 1(Hiempsal I)를 암살하며 왕위 계승 분쟁의 피비린내 나는 서막을 열었다. 힘살 1(Hiempsal I)가 제거되자 유구르타는 아데르발(Adherbal)에게 전면전을 선포했고, 아데르발은 위협을 느껴 로마 공화국에 망명하여 원로원에 도움을 호소했다.
 
로마의 부패한 개입과 대중의 분노 : 로마 원로원은 누미디아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조사를 진행했지만, 유구르타의 막대한 뇌물 공세로 인해 공정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러한 로마의 부패하고 미온적인 태도는 유구르타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구르타는 기원전 113년에 아데르발의 영토를 침공했고, 누미디아의 수도인 키르타(Cirta)까지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키르타 공방전에서 로마 시민들까지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로원은 여전히 유구르타의 뇌물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키르타에서 로마 시민 학살 소식이 로마 본토에 전해지자 로마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특히 '트리부누스 플레비스(tribunus plebis)'인 가이우스 마밀리우스 림풀루스(Gaius Mamilius Limpulanus, 기원전 109년 호민관)는 원로원 내의 부패를 철저히 조사하기 위한 법안(Lex Mamilia)을 통과시키는 등 대중의 여론을 등에 업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대중의 압력에 못 이겨 유구르타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2. 메텔루스의 등장과 로마군의 재건

 
전쟁 초기, 로마군은 유구르타의 교활한 게릴라 전술과 뇌물 살포, 그리고 로마 지휘부 내의 갈등과 부패로 인해 연이은 실패를 경험했다. 특히 기원전 110,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Aulus Postumius Albinus, 기원전 99년 집정관)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수툴 전투(Battle of Suthul)에서 유구르타의 함정에 빠져 굴욕적인 항복을 당한 사건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로마 대중은 전쟁의 무능한 진행에 대한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메텔루스의 임명과 군대 재정비 : 이러한 상황에서 기원전 109, 로마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자 유능하고 강직한 인물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유구르타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메텔루스가 누미디아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은 사기가 저하되고 규율이 문란해져 있었다. 그는 전장으로 나서기 전, 군대의 기강을 재확립하고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메텔루스는 병사들의 규율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약탈과 무단이탈을 금지했다. 병사들에게 불필요한 짐을 버리게 하고, 매일 행군 훈련과 전투 훈련을 실시하여 군기를 바로잡았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훈련하고 식사를 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강직함과 노련한 지휘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그들의 신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메텔루스는 이러한 철저한 준비 과정을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로마군을 유구르타와 맞설 수 있는 강력하고 훈련된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이 군대에는 젊고 야심찬 레가투스(legate)인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 157-기원전 86)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Publius Rutilius Rufus, 기원전 158-기원전 78)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툴 전투와 유구르타의 게릴라 전환 : 메텔루스는 재정비된 군대를 이끌고 누미디아 깊숙이 진격하여 유구르타를 포착하려 했다. 무툴 강(Muthul River)에서 유구르타는 로마군을 상대로 매복 공격을 감행했다. 이 무툴 전투(Battle of the Muthul)는 전술적으로 무승부였지만, 로마군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다. 특히 유구르타의 지략과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무툴 전투 이후, 유구르타는 로마군과의 정면 대결을 완전히 피하고 게릴라 전쟁 전략으로 전환했다. 그는 소규모 부대로 로마군의 보급선을 끊고, 외딴 로마 전진 기지들을 급습하며 로마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 전략은 로마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전쟁을 더욱 장기화시켰다.
 

3. 탈라 공방전의 배경: 유구르타의 아지트와 로마의 결단

 
무툴 전투 이후 유구르타는 로마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비정규전을 지속했다. 그는 로마군이 자신을 쉽게 찾아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이동했으며, 필요할 때마다 재산과 가족을 은닉할 수 있는 은밀한 요새를 이용했다. 유구르타는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탈라(Thala)라는 요새 도시에 보관하고 있었다.
 
  • 탈라의 지리적 특징 : 탈라는 누미디아 내부에 위치한 요새 도시로, 지도상에 정확히 표시되지는 않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물 없는 황무지(waterless wasteland)" 한가운데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탈라는 자연적인 방어 요새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적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 메텔루스의 정보 입수 :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는 그의 첩보원들과 스카우트들을 통해 유구르타가 다시 군대를 소집하고 있으며, 그의 가족과 막대한 재산이 탈라에 보관되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 메텔루스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구르타를 직접 생포하거나 그의 주요 재산과 가족을 확보하는 것은 유구르타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고 로마군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 
  • 가혹한 행군 준비 : 탈라가 물 없는 황무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는 로마군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보급 작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모든 수송용 짐승들(pack animals)을 징발하여 물이 가득 담긴 가죽 주머니(water sacks)를 싣게 하고, 이 대규모 보급 행렬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된 행군을 시작했다 . 이 행군은 로마 병사들에게 막대한 인내와 고통을 요구했다. 
  • 기적 같은 폭풍과 유구르타의 도주: 탈라로 향하는 행군 도중, 로마군은 폭풍우를 만나 소나기를 맞았다. 로마 병사들은 이를 신들의 축복과 자신들에게 유리한 징조로 받아들였고, 고갈된 갈증을 해소하며 사기를 되찾았다. "기적"은 사막에서의 행군을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이 탈라에 도달하기 전, 유구르타(Jugurtha)는 로마군이 오고 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재빨리 탈라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도주했다. 메텔루스는 유구르타를 직접 붙잡는다는 첫 번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의 핵심 재산을 확보하고 유구르타의 도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4. 탈라 공방전의 전개 : 로마의 집념과 탈라 주민들의 결단

 
유구르타(Jugurtha)가 탈라에서 도주한 후,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는 이제 탈라 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는 데 집중했다.
 
40일간의 포위 : 탈라는 천연 요새이자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로마군의 공격을 견디기는 역부족이었다. 메텔루스의 군대는 무려 40일 동안 탈라를 포위하며 맹공을 퍼부었다. 로마군은 사다리(ladders)를 이용하여 성벽을 오르려 시도하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공성추(battering rams)를 동원했다. 또한 흙과 나무로 된 거대한 공성탑과 램프(mounds)를 건설하여 성벽과 같은 높이에서 공격하거나, 병사들의 방패 역할을 하는 구조물을 만들어 공격하는 병사들을 보호했다. 로마군의 이러한 체계적이고 끈질긴 공성 기술은 탈라 주민들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탈라 주민들의 비극적인 결단 : 수십 일간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탈라 주민들은 로마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깨달았다. 로마군의 맹공 앞에 그들의 방어선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로마군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원치 않았고, 무엇보다 로마군에게 노예로 끌려가 치욕적인 삶을 사는 것을 거부했다.
 
절박한 상황에서 탈라 주민들은 끔찍하면서도 장엄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귀중품, 특히 금(gold)을 성 내부에 숨겼다. 그리고는 대량의 포도주(wine)를 마시며 광란의 밤을 보낸 후, 스스로 도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수많은 탈라 주민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도시를 불태우며 그 불길 속에서 집단 자살했다. 이는 로마인들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최후의 저항이자, 패배의 치욕을 거부하는 비극적인 선택이었다.
 

5. 전투의 여파 : 유구르타의 끈질긴 생존과 로마의 다음 도전

 
탈라 공방전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는 로마군에게도 씁쓸한 승리였다.
 
유구르타의 도주와 다음 계획 :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는 탈라를 함락시키고 유구르타의 재산을 확보했지만, 정작 유구르타는 다시 한번 로마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 유구르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끈기와 야망으로 마우레타니아(Mauretania)와 아프리카 내륙의 가이툴리족(Gaetulians)에게 망명하여 새로운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유구르타는 자신의 지지를 잃지 않았고, 로마와의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불태웠다.
 
메텔루스의 한계와 마리우스의 부상 : 탈라 공방전 이후에도 전쟁은 4년 더 지속될 만큼 유구르타의 저항은 끈질겼다.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는 유능했지만, 유구르타의 게릴라 전술과 광활한 누미디아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전쟁을 장기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메텔루스 휘하의 레가투스(legate)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의 존재감이 점차 부각되었다. 그는 메텔루스의 고위 지휘관이었지만, 전쟁의 진척이 더디자 메텔루스를 비난하며 로마로 돌아가 집정관직에 출마하여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로마 대중은 유구르타 전쟁의 장기화에 지쳐 있었고,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가 유구르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자 마리우스(Gaius Marius)를 새로운 대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결국 기원전 107,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되어 메텔루스로부터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넘겨받게 된다.
 

6. 탈라 공방전의 역사적 의미

 
탈라 공방전은 유구르타 전쟁의 한 부분이지만, 로마와 유구르타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로마의 인내와 집념의 상징 : 탈라 공방전은 물 없는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고된 행군, 그리고 40일간의 끈질긴 포위 공격을 통해 로마군의 뛰어난 인내심과 강력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이는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군사적 미덕이었다.
  • 유구르타의 저항 의지 : 유구르타는 비록 탈라를 상실했지만, 그의 재치와 도주 능력은 여전히 로마를 좌절시켰다. 이는 그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로마에 대한 저항을 이어갈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 총력전의 양상 : 탈라 주민들의 집단 자살은 로마와의 전쟁이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문화와 생존권을 건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로마의 압도적인 힘에 맞선 약소국의 절규이자 최후의 저항이었다.
  • 로마 지휘부의 전환 :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가 탈라를 함락시키고 무툴 전투 이후 유구르타에게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구르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면서 그의 한계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마리우스(Gaius Marius)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지휘관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마리우스의 부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기원전 78)가 유구르타의 장인이자 동맹인 마우레타니아(Mauretania)의 왕 보크수스(Bocchus)를 설득하여 유구르타를 붙잡아 로마에 넘김으로써 전쟁이 종결된다.
 
결론적으로 탈라 공방전은 유구르타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로마군의 압도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유구르타의 끈질긴 저항과 로마 공화정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얽혀들었던 전장 중 하나였다. 이는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도전과 그 극복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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