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귀스타브 마리 장 블랑 [Gustave-Marie-Jean Blanc, 1844-1890] 주교. 제7대 조선 대목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조선 선교사

귀스타브 마리 장 블랑 [Gustave-Marie-Jean Blanc, 1844-1890]

주교. 7대 조선 대목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조선 선교사. 세례명은 요한. 한국명은 백규삼(白圭三).
 

1844
  • 184456일 프랑스 브장송 교구의 뢰니(Reugney)에서 태어나 루아르(Loire) 집장에서 자랐으며, (Puy) 국립 고등중학교를 다닐 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62
  • 1862년에 리용 교구 사제들에 의해 운영되는 알릭스(Alix)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리용 대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알릭스 신학교에 입학할 당시에 이미 그는 외방 선교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부친의 반대 때문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편입하지 못하였다.
 
1864
  • 20세가 되던 1864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감으로써 그의 꿈은 실현될 수 있었다.
 
1866
  •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26개월 동안 공부한 후 18661222일 사제 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7
  • 1867215일 파리를 출발하여 마르세유와 상해를 거쳐 중국에 도착하였다. 이어 만주의 요동 땅에 있던 챠쿠로 가서 조선에서 탈출한 후 상해 등지에서 있다가 그곳으로 온 리델(F. Rided, 李福明) 신부를 만났다. 이후 그들은 조선 입국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지만 병인박해 이후로 강화된 국경의 감시 때문에 입국로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블랑 신부는 리델 신부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한불자전편찬에 정열을 쏟았다.
 
1869
  • 한불자전의 편찬 작업은 1869년에 리델 신부가 제6대 조선교구장에 피임되고 이듬해 로마에서 성성식을 마치고 돌아온 뒤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872
  • 이에 앞서 블랑 신부는 상해로 가서 리델 주교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만난 뒤 산동의 체푸(芝罘)를 거쳐 1872년 말에 챠쿠로 돌아왔다.
 
1875
  • 1875년 초에 리델 주교는 다시 한번 조선 교회의 밀사 최지혁 등을 만나 조선 소식을 들은 뒤 입국 가능성을 타진하고 9~10월에는 블랑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76
  • 1876년 다시 한번 블랑 신부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와 함께 요동을 출발하여 58일 황해도 초도 앞바다에서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김 요한, 오 요셉 등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세 명이 함께 입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자들의 말을 듣고 우선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만을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챠쿠로 돌아갔다. [1877년 리델 주교는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한 끝에 923일 두세(C. Doucet) 신부와 로베르(A. P. Robet) 신부와 함께 황해도로 입국하였다.]
  • 블랑 신부는 드게트 신부와 함께 1876510일 서울에 도착하여 성사를 집전하다가 이듬해 초 드게트 신부와 헤어져 전라도 고산 지방으로 가서 정착하였다.
 
1878
  • 블랑 신부는 전라도 고산 지방에서 활동하던 중 리델 주교가 1878128일 체포되어 624(524)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1878년에 부주교로 임명된 블랑 신부는 리델 주교 대신 조선 교회를 보살피게 되었다. 이에 그는 전라도 지역의 사목을 리우빌(A. Liouville) 신부에게 넘겨주고, 신학 교육은 두세 신부에게 위임했다. 그런 다음 상경하여 남산 아래의 낙동(駱洞, 현 명동 2가와 충무로 1가 사이)에 거처하면서 서울 여러 곳에 공소를 설립하고, 강원도ㆍ황해도ㆍ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 등지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지역 본당을 설립하였다.
 
1879
  • 1879516(음 윤 326)에는 드게트 신부가 다시 충청도 공주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세 신부와 함께 고산 다리실(완주군 비봉면 천호동)을 떠나 장수 큰골(장수군 계북면 월현리)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곳에서 한때 신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1882
  • 187958일자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에 아무런 장애 없음이 공포되면서 교황청 조사를 위한 교구 재판을 위임받게 되자, 1882426일 뮈텔 신부를 시복 판사로, 로베르 신부를 재판 기록 서기로 임명하여 511일부터 시복 재판을 개정하도록 했다.
  • 이에 앞서 블랑 부주교는 신자들로 하여금 병인박해 때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여 남포의 서들골(일명 서재골)에 안장되어 있던 다블뤼(A. Daveluy) 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시신을 1882310(121) 발굴하게 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하였다.
  • 블랑 부주교는 서울 종현(鍾峴, 명동) 공소를 본당으로 설정하였으며, 18825월 무렵에는 인현동에 매입해 두었던 신부 댁에 인현학교 즉 한한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1883
  • 188378일 나가사키에서 프티장(Petitjean) 주교의 집전 아래 앙티곤(Antigone)의 명의 주교로 서품식을 갖고 귀국하였다.
  • 1883년부터 블랑 주교는 종현 언덕 일대에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621일에는 김가밀로 회장의 이름으로 학당 가옥을 매입하여 인현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니, 이것이 곧 종현학당이었다.
 
1884
  • 1884620일에 리델 주교가 사망함에 따라 제7대 조선대목구장직을 승계한 블랑 주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해부터 페낭으로 신학생을 파견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곳에 있던 신학생들을 귀국시켰다.
 
1885
  •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釜坪里)에 소신학교를 설립하고 새로 입국한 마라발(J. Maraval) 신부를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여 18851028예수성심신학교를 개교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315일에는 서울의 곤당골(美洞, 을지로 1)에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7월경에는 동골(東谷, 지금의 종로구 관철동)에 양로원을 설립하였다.
 
1887
  • 1887921일에는 한국 교회 지도서(원명은 한국 교회의 법규’)를 제정Krksgod하였다. 그 해 말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는 성직자 14, 신학생 14, 신자수 14,200여 명이었다.
  •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성서 활판소를 서울 정동(貞洞,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있던 푸아넬(V. Poisnel) 신부의 거처로 옮겼다. 그리고 1887년 초부터는 용산 함벽정(涵碧亭, 용산구 원효로 4) 인근의 부지와 가옥을 매입한 후 3월에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12월부터는 명동의 부지에서 성당을 건립하기 위한 정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888
  • 1888년에 조정의 훼방으로 일어난 명동 부지 분쟁 사건 때문에 이후 16개월 동안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 188868일에 조선 교회를 예수 성심께 봉헌한 적이 있었다. 그해 10월에는 명동 부지 위에 처음으로 2층 목조 건물을 완공하고, 정동에서 운영하던 성서 활판소를 다시 이 건물로 이전한 뒤 코스트(E. Coste) 신부에게 맡도록 했으며, 722일에는 자신이 요청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한국에 입국하자 곤당골의 고아원 운영을 위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코스트 신부로 하여금 대성당과 용산 신학교, 장차 건립할 약현 성당의 설계를 맡도록 하였다.
 
1889
  • 중국 기술자들을 초청하여 우선 1889년에 주교관 겸 경리부로 사용할 2층 건물(지금의 명동 주교관 앞 건물)과 수녀원, 고아원 건축에 착수하여 이듬해 98일 고아원 겸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1890
  • 1890년 초에 명동 부지의 문서를 조정에서 돌려 받은 블랑 주교는 이에 감사하여 조선 교회를 성모께 봉헌하는 미사를 집전하였다.
  • 블랑 주교는 주교관이 완공되기 바로 전인 1890221일 병으로 사망하여 용산 신학교 옆에 새로 조성된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블랑 주교는 1866년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876년 조선에 입국한 이래 신부로 6, 주교로 8년 등 도합 14년 간을 활동하였다. 그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고 놀랄 만큼 성장하여 신자수는 17,000여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전국의 지역 본당수 9, 성직자 21, 신학생 20, 교리 학교 19개소에 이르는 교세를 기록하게 되었다.
 
[참조]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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