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5일 월요일

원용덕 [元容德, 1908~1968]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 겸 의사, 정치가, 초대 육군본부 헌병총사령부 총사령관

원용덕 [元容德, 1908~1968]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 겸 내과의사 및 정치가,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1908
  • 229, 한성부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본관은 원주이고 익겸(益謙)을 시조로 하는 시중공파(時中公派) 계통으로 본적은 서울시 중구 삼각동이었다.
  • 강원도 강릉에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1928
  • 211,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천도교회관에서 거행된 남녀학교졸업생 석별강연회에서 조선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다가 임석 경관에 의해 중지당했다.
 
1930
  • 821, 금강산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및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공동 주최의 하령회에서 현대 학생이 요구하는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32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강원도 강릉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의사로 일하였다.
  • 1932년에 만주로 건너가 일제의 괴뢰군으로 19323월 수립된 만주국의 군대에 군의(軍醫) 장교로 입대했다. 그는 만주육군군의학교(1934년 창설, 4년제)를 정식으로 다닌 것은 아니지만 특임으로 이 학교를 거쳐 군의로 임명되는데 해방 당시 그의 계급은 중교(中校, 중령에 해당)였다.
 
1936
  • 봉천의 흥아협회에 참여했다. 흥아협회는 조선인들의 사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군 육군특무기관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1937
  • 9, 상위로서 제1독립포병대대에 부임했다.
 
1943
  • 만주국 쓰핑 육군전차학교 신징 제1분교 군의학반을 졸업하였다.
 
1945
  • 해방 당시 박정희와 정일권이 28세로 각각 중위와 대위였는데 비해 원용덕은 37세로 중령이었다. 그는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에서 조선인 장교단의 단장격으로 조선인 후배들을 돌보아 주는 후견인의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 1945년 해방 후, 정일권 등과 함께 교민의 보호를 빙자하여 동북대한민국보안사’(일면 신경광복군)를 설치하여 시세에 따른 변신을 도모했다.
  • 그러나 만주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여 만주군은 무장해제 당했고 곧이어 국공 내전이 벌어졌고 결국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갔다. 그러한 국면하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국공내전에 참여하기 위해 해방 이후 상당 기간 만주에 머무르던 것과는 달리 민족주의자들과 친일 경력을 지닌 자들은 대부분 은밀하고 산발적으로 국내로 귀환했다. 북한 지역도 이미 원용덕 등의 친일 분자들이 머리를 들고 활동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 11, 중교 계급으로 월남하였다.
  • 125, 미군정이 군사영어학교를 만들 당시 이응균, 조병옥과 함께 미군정으로부터 생도 소집을 위탁받게 되어 자신은 부교장에 취임했다.
  • 미군정은 통역관 양성 및 군간부 요원 확보를 위해 1945125일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다. 미군정으로부터 생도 모집의 위탁을 받은 사람은 일본군 출신 이응준, 만주군 출신 원용덕, 중국군 출신 조개옥이었다. 그런데 중국군이나 광복군 출신들이 대부분 귀국하지도 않았으며 흔쾌히 참여하지도 않은 상황하에서 조개옥이 별로 추천권을 행하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이응준과 원용덕이 추천을 했다. 군사영어학교는 창군 요원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 변통책이었기 때문에 입학 정원과 수학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입학 지원자 전부를 입학시켰고, 그후에는 수시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을 입학시켰다. 군사영어학교의 책임자는 리스 소령이었으며 조선인으로는 원용덕이 책임자로서 미군 교장의 보좌관이자 부교장이었다. 이 학교가 폐교되는 1946430일까지 200명이 입교하여 110명이 임관되었다. 원용덕 자신도 부교장이자 학생으로서 군번 41번을 부여받았다. 임관된 110명 중 일본군 출신이 87, 만주군 출신이 21,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 용덕은 미군정이 필요로 하는 조건, 즉 출세의 조건을 일차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첫째, 그는 이념적으로 철저히 반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또 북한에 머무르지 않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둘째, 그는 군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군의관이었기는 하지만 13여 년간의 장교 경험에다 계급은 중령이었으며 또 나이도 37세로 비교적 많은 축에 속했다.
    셋째, 그는 영어에도 능통했다 한다. 그가 언제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미군들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고 한다.
 
1946
  • 2,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조선국방경비대의 초대총사령관이 되었다.
  • 9,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 12, 8연대장(춘천)이 되었다.
  • 그는 박정희, 정일권, 이주일 등이 속한 만주군 인맥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상급자였다. 박정희가 형인 박상희 때문에 연좌제로 잡혀들어가서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 박정희를 변호해주고 박정희에게는 박상희의 잔당들을 실토하도록 설득해서 박정희를 사형에서 백의종군으로 감형시키게 해 주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원용덕 덕분에 죽을 위기를 모면하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국 문관으로 백의종군을 했다.
  • 게다가 박정희가 형 문제로 연좌제에 걸리기 전에는 대위였는데 이 때도 박정희는 미군들과의 사이에서 계속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그 둘을 화해시켜준 게 원용덕이었다. 미군측에서 정말 마음먹으면 박정희를 갈아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원용덕이 박정희를 보호했다.
 
1947
  • 1947, 대한민국 통위부 보병학교를 졸업하였고, 육군 제2여단장이 되었다.
  • 12월부터 19491월까지 대령계급으로 제2여단장(대전, 2사단의 전신)직을 맡았다. 2여단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여수ㆍ순천 사건 진압에 관계했다. 이때 토벌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제5여단장 김백일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얼마후 그와 지휘권을 두고 다투던 김백일의 후임으로 19491월에서 5월까지 제5여단장(광주, 5사단의 전신)을 지냈다.
 
1949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 제5여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을 지냈다. 백범 김구 살해범 안두희에 대해 검찰이 구형한 사형 대신 종신형을 선고했다.
  • 8, 채병덕 참모장의 측근으로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을 지냈다.
 
1950
  • 4월부터는 호국국참모부장으로 근무했다.
  • 6, 아들 원창희 육사 입학에 압력을 가하였다.
  • 아들인 원창희(元昌熙, 1933-1984)도 육군 장교로 임관, 준장으로 전역했다. 19506월 입교한 대한민국 첫 정규 4년제 육사 1기 입학생이 되었는데, 문제는 지원 및 입학 당시의 나이가 17세여서 입학 지원 조건에 되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의 실력자 원용덕 장군은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원창희 장군이 육사에 입교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했고, 덕분에 같은 나이대로 탈락을 할뻔했던 박경석 장군도 생도로 입교하는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원창희, 박경석 등 정규 4년제 육사입학생들은 입교 후 25일 새벽(6.25 전쟁 발발)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으려는 채병덕의 무모한 지시로 소총훈련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내촌-태릉 전투에 동원된다. 전쟁 동안 학우 중 3분의 1이 전사 및 실종되었으며, 첫 정규 4년제 육사 1기 졸업생은 이들이 아닌 전두환, 노태우 등이 속한 육사 11기들이다. 첫 정규 4년제 육사입학생들은 무려 46년이 지난 1996년에야 정식 육사 졸업장이 나오고, 육사 기수 대신 똑같이 전쟁터에 끌려나온 육사 10(생도 1)[5]의 다음 학번이란 의미로 '생도 2'로 불리운다. 아버지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덕분에 군사정부시절 승승장구했으나, 10.26 이후 전역을 선택했고 월남전 참전당시의 부상 후유증때문에 1984년 비교적 이른 나이인 51세로 별세했다.
  • 한국전쟁 당시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라북도지구 편성관구 사령관을 지내다 예편했다.
 
1952
  • 1, 준장으로 다시 현역에 복귀하여 전쟁중 해체된 제2군단을 백선엽과 함께 복구하여 부군단장으로 부임했다. 원용덕은 부군단장으로 전선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곧 신태영 국방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있다가 다시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 5, 개헌에 반대하던 야당 국회의원들 59명이 탄 통근버스를 버스 채로 강제 연행하여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정치세력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했다.그러나 국민당을 비롯한 야당세력이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던 국회에서는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525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동래를 비롯한 경남의 8개 군과 전북의 6개 군, 전남의 7개 군에 잔여 공비 소탕과 치안 확보를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 원용덕은 임시 수도 부산이 포함되어 있던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날 계엄사령관 원용덕이 지휘하에 48명의 국회의원을 태운 전용버스가 헌병들에게 검색 당하고 10명의 국회의원이 구속당하는 사태가 전개되었고,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하에서 마침내 74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1953
  • 3, 이승만은 3군 헌병을 통합한 헌병사령부를 만들어 원용덕을 사령관으로 앉혔다.
  • 부산 정치파동에서 충성도와 능력을 발휘한 원용덕은 19533월 초대 헌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1953324일자로 국방부에 헌병총사령부가 창설되고 이에 원용덕이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2대 중대 규모로 창설된 헌병총사령부는 형식상 국방부의 관할 하에 있었으나 사실상은 대통령의 직접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특수부대였다.
  • 618~19,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송효순, 홍구표, 한필동 등에게 지시해 반공포로석방사건을 일으켰다.
 
1954
  • 1954, 초대 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54년에 야당 정치인들의 집에 북한 공산당 명의로 쓰여진 선전 문서를 집어넣는 정치공작을 벌였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에도 원용덕은 그들(불온 문서를 받은 정치인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고 그랬다말했다. 용공으로 몰아 잡아넣으려고 함정을 팠음을 인정한 셈이다.
 
1961
  •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에서 연합참모본부 고문으로 좌천되었다.
  • 3, 7년 전인 1954년에 발생했던 불온문서 투입사건과 김성주 살해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되어 재판 끝에 한달 후 19614월을 기하여 육군 중장 강제 예편 처분 및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 729, 헌병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 83, 김성주 살인 사채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재판 결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
  • 3,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68
  • 24,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심장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기타
  • 2008, 만주국 군대에서 장교로 장기간 근무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건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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