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朴相熙, 1905~1946]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출신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했던 박정희는 그의 동생이고 정치인 김종필은 그의 맏사위이다.
【1905년】
- 9월 10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출생하다.
- 아버지는 박성빈, 어머니는 백남의이다. 그는 8남 2녀 중 4남이었다. 첫째는 두 살 때 사망했고, 둘째는 박동희, 셋째는 박무희였다. 그리고 넷째는 누나 박귀희였으며, 다섯째가 박상희다.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 박한희(13세 때 사망)와 박정희, 여동생 박재희가 있다.
【1914년】
- 9살 때 가족과 함께 선산 구미면 상모리(현 경북 구미시 상모사곡동)로 이사하였다.
【1920년】
-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상희는 구미보통학교의 초기 학생이었다. 박정희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3년간은 4년제로 운영하면서 학무관들이 구미면 내의 가정을 방문해 가며 아이들의 취학을 유도했다 하며, 박상희도 이 무렵 학교를 다니게 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의 수기 ‘나의 소년시절’에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께서는 상희 형을 학교에 보냈다’고 회상하였다.
【1923년】
- 4년제였던 구미보통학교 졸업을 했다가 학제 개편에 맞춰 5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25년】
- 구미보통학교를 최종 졸업하였다.
【1927년】
- 그가 교육을 마친 직후인 1926년과 1927년은 박상희의 생애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는 시기다. 1926년, 조선의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운동을 대중적이고 통일적이며 계급적인 성격으로 강화하고자 하였고, 그 전략으로써 대중운동단체와의 동맹을 꾀하게 된다. 독립운동단체로 널리 알려진 신간회의 태동도 이와 맞물린 것이다. 박상희는 1927년에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8월에 신간회 선산지회의 설립준비위원을 맡는다. 당국의 방해공작에 저항하다가 구금된 박상희는 집행위원과 조사부 총무를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지역독립운동가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는 그해 가을 또 한번 경북 경찰부에 의해 체포·구금된다. 반면, 체포자였던 최석현 경북 경찰부 고등과장은 해방 직전에 강원도 영월군수를 맡는 등, 항일과 친일의 엇갈린 운명을 보여준다.
- 1927년 2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 창립 후에는 신간회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
- 일제강점기 1927년 5월17일 종로경찰서 형사가 작성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 참가자 명단’에 경북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박상희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는 공식적으로는 ‘사상·청년·노동·농민·여성·형평 등 사회운동 전체에 관한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고, 사회운동 각 부문 간의 상호 연계 및 조직을 확충할 목적’이라고 발표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협의회의 창립준비위원회는 1926년 2월17일 결성됐고, 이후 1년간의 활동을 한 뒤 1927년 5월16일 정식 출범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이 단체가 1차 공산당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재조직한 단체로 파악하고 있었을 만큼 조선 공산주의계열의 단체를 망라한 조직이었다.
- 1927년 12월 20일, 동아일보에는 선산군 청년동맹 창립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박상희와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1928년】
- 7월 11일, 독립운동으로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 11월 11일, 독립운동으로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 1920년대 말 박상희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겸직하고 1928년 집행위원직에 올라간다.
【1929년】
- 1929년 처음으로 개교한 대구사범 제1회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만이 존재했다. 월사금 등을 일절 받지 않는데다, 용돈조로 격려금까지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있었지만 제국대학답게 식민지에선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으며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는 사립학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 1929년 4월 19일, 막역한 친구인 황태성이 야학교사 조귀분을 소개시켜 결혼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하며, 같은 선산-구미 일대의 지식인으로서 박상희와 친분이 있던 황태성은 대구와 경북 일대의 시위가 진압되자 곧장 월북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 계열임에도 숙청에서 무사했으며, 남한 출신으론 드물게 북한 무역성 부상(무역담당 부처의 차관)을 역임하며 고위직을 지냈다. 황태성은 남한에서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의 친분을 내세워 김일성에게 비밀 특사로 파견을 요청했고, 그렇게 남파되었으나 박정희와 김종필은 옳다구나 하고 그를 간첩으로 처형했다. 5ㆍ16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정치공세에 시달리던 박정희 정권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꼬리표를 떼버리기 위해 그를 죽이기로 하면서 1963년 10월 22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1963년 12월 14일에 총살형이 집행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1961년 ‘황태성 사건’에 연루돼 서울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한 황태성의 조카사위 권상능은 “황태성이 조귀분을 신부감으로 중매하자 박상희는 선도 보지 않고 결혼식 날짜를 잡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그럴 정도로 서로가 신뢰하는 사이였다. 결혼 후 박상희가 황태성에게 엽서를 보내왔는데 ‘결혼식 때 처음 봤는데 아주 추녀더라’고 농담을 적었다고 들었다. 그럴 정도로 황태성과 박상희는 허물없는 사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 박상희는 1929년 4월19일 조귀분과 결혼했다. 조귀분은 김천의 유지인 한양 조씨 집안 조길수의 딸로 당시 김천 금릉회관에서 황태성의 여동생 황경임과 같이 활동하면서 야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조귀분은 항일여성독립운동 단체인 근우회 부회장과 김천지회장을 역임했다. 박상희ㆍ조귀분 부부는 훗날 김종필과 결혼하게 되는 큰딸 박영옥을 낳아, 박정희는 김종필을 조카사위로 두게 된다. 그리고 두 부부는 영옥 외에 이후 딸 넷(계옥ㆍ화자ㆍ금자ㆍ설자)을 더 낳았고, 박상희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47년에 유복자 박준홍을 낳았다. 한데 준홍의 본래 이름은 ‘재복’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재복은 남로당의 군사총책이었으며, 박정희를 남로당에 가입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상희는 그의 이름를 따 박재복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 박준홍은 아버지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대구 계성고등학교와 경희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6월 항쟁 직후 1988년에 치러진 13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민정당 후보로 구미에서 출마했으며, 1995년 1대 지방자치선거에는 경북도지사로도 출마했다. 또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부친 박상희의 사회주의 경력은 지운 채 독립운동 훈포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일한 아들 박준홍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중국문제전공)을 수료하고 돌아와 국토통일원에서 2급 연구관을 지내며 통일문제를 연구하였고 제1무임소 장관실 정무조정실장(1급 차관보)를 역임하였다. 대한축구협회 회장(1978-9)을 맡아서 각종 국제대회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무패의 한국축구를 만들며 차범근 선수를 서독에 보내 세계축구 열강들의 기술을 전수케 하는 등 한국축구가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적인 강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국이 개발도상국가에 원조를 제공하는 첫 창립 기구인 한국 국제협력단(KOICA)에서 초대 상임고문을 맡아 외국에 원조를 제공하는 일을 책임지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연보호 운동을 계승하기 위해 녹색회를 창설해서 전국적으로 자연보호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도시의 친 환경적인 개발을 연구하기 위해 녹색개발연구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최근 구리시의 월드디자인시티(GWDC)추진위원회의 상임고문도 맡고 있다. 사회단체로 516 민족상 이사, 자유민주 실천연합, 미주 새근성회, 민족중흥 포럼, 녹색문화예술 세계연맹등에 총재를 역임하고있다.
【1931년】
-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 박상희는 언론인으로 항일운동을 지속하게 된다.
- “신간 청총(조선청년총동맹) 해소를 논박한 팜프레트(팸플릿) ‘우리의 전술’ 이란 것이 선산청년동맹위원장 박상희군에게 우편으로 온 것을 선산경찰서 구미경찰관주재소에서 지난 12일에 압수하였다.”(동아일보 1931년 4월 2일)
- 1931년 4월 29일, 구미소비조합 분란을 막기 위해 박상희가 신임 역원을 맡다.
【1934년】
- 여운형이 이끌던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대구지국장을 맡는다.
【1935년】
-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옮겨 활동했다.
- 1935년에는 동아일보의 선산지국으로 자리를 옮긴다. 헌데 좀처럼 규명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이즈음에 발견이 된다. 조갑제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같은 해 9월, 박상희는 월미도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데, 일행이 노골적인 친일신문 <만몽일보>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1939년】
-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가 소장한 자료에 의하면, 1939년도 매일신보 선신지국 구미분국장이 박상희였다. 알다시피 매일신보는 조선, 동아일보 이상의 친일신문이었다.
【1944년】
- 황태성과 같이 건국동맹의 일원으로 가담해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한편 박정희의 만주행을 반대하였다 하며, 박정희가 본처 김호남과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여 박정희를 설득, 훈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다.
【1945년】
- 광복 이후, 박상희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인으로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일했고 신간회 간부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경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이어 인민위원회 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구미에서 그의 정치적 인기는 대단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높았으며, 심저어 대구경찰서장이 “박상희는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 8ㆍ15 해방 무렵 구미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박상희를 따랐던 송재욱의 증언에 따르면, 박상희는 구미 선산경찰서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 돼 있다가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해방 이튿날 박상희는 마을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통운회사 건물을 인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 간판을 내걸고는 당시 구미보통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무장해제도 지휘했다고 한다.
-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1946년】
-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는다.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삼상회의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 1946년 10월 1일, 대구 항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지부 사무국장이던 박상희는 구미에 머물면서 대구의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3일 시위를 하던 민간인들이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자, 박상희는 시위대를 설득해 갇혀 있던 경찰들을 무사히 피신시켰다. 10월 3일 구미에서도 2000명 가량의 군중이 들고 일어서 구미경찰서를 공격하며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감금했다. 그러나 구미 경찰관들을 포함한 이들 대다수는 박상희의 도움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구미사람들은 박상희 덕분에 유혈사태가 빚어지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만, 박상희가 ‘구미 경찰서 습격’을 기획했는지, 아니면 사건 수습 과정에서 저절로 지도자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구미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박상희는 군중을 지휘하여 선산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점령하고는 ‘구미 좌익정권’을 세웠다. 그리고는 구미면장을 비롯해 의용소방대장, 이승만계 독립촉성회 간부 등 관내의 우익 유지들을 붙잡아 들였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박상희의 지인들이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오히려 박상희는 구미 경찰관들을 피신시켜 주었는데, 구미사람들은 박상희가 덕분에 유혈사태가 빚어지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만, 박상희가 ‘구미폭동’을 기획했는지, 아니면 사건 수습 과정에서 저절로 지도자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마이뉴스] - 1946년 10월 3일, 박상희는 2000여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오전 9시에 구미경찰서를 공격,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감금해버린다. 이어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을 타격하여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고, 관청 서류를 전량소각한다. 이때 박상희는 여느 좌익인텔리들이 그 시절 항쟁국면에서 그랬듯, 군중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경찰관들이 다치지 않게 노력했다.
- 1946년 10월 5일, ‘구미경찰서 습격’ 이틀뒤인 10월 5일 새벽 대구에 파견되었던 충청도 경찰 병력이 구미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하루 전에 박상희의 중재로 석방된 백철상 서장이 그에게 “자네는 우리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니까 우리가 보증을 서겠네”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순간 서장실로 밀려든 경찰관들은 박상희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박상희의 시신은 대구에 살고 있던 여동생 박재희의 남편 한정봉이 수습해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박상희의 동생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바로 위 누나인 박재희(朴在熙)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열병의 치료를 한다고 누워 지낼 때였습니다. 새벽이었는데, 새까만 옷을 입은 경찰들이 저의 집에 들이닥쳤어요. 나를 보고 상희씨와 어떻게 되느냐고 묻길래 동생 된다고 했더니,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킨 뒤 오빠가 공의한테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해요. 남편이 놀라서 뛰어나가려니까, 한 경찰관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렇게 나가려고 하느냐면서, 서장한테 같이 가면 통행증을 끊어 주겠다고 해요. 남편이 나갔다가 곧 이불에 둘둘 말린 피투성이의 오빠를 업고 왔어요. 숨은 붙어 있는데 정신은 없습디다.
총 세 발을 맞았다는데 옆구리와 배꼽 밑의 상처는 제 눈으로 봤지요. 제가 녹두를 달여 그 물을 떠먹이는데 한 모금만 마시고는 곧 숨이 넘어갔지요. 대구 폭동이 났을 때 오빠는 구미 경찰관들이 안 다치도록 어떤 창고로 피신시키고 바깥에서 문을 잠갔고, 죽을 때도 그 열쇠를 갖고 있었대요.
죽기 직전에 경찰서장과 같이 있었는데, 서장이 이제는 집으로 가도 괜찮을 것 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서는데 경찰관들이 덮치길래 논두렁으로 피했다가 총을 맞았답니다. 총을 쏜 경찰관들이 오빠를 업고 공의한테 데리고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명령하더랍니다. 오빠는 가족을 불러 달라고 했고, 내가 좋은 일을 했는데 왜 죽어야 하느냐는 말도 하더랍니다.”
【기타】
-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씨는 2010년 7월 15일 구미 박상희 묘역에서 열린 추모비 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6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동분서주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고, 돌아가시던 1946년 10월 5일에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경찰관이 위태롭다는 전언을 듣고 경찰관을 구하러 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공산활동을 했느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 왔다. 별세하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묘비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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