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黃太成, 1906~1963]
초명은 黃泰成,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지난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성 부상 직책을 지낸 인물인데, 일명 황대용(黃大用)으로도 불렸다. 본관은 장수(長水), 창씨명은 나가미즈 케이쇼(長水憲昭)이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인 박상희 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에 갈 때 황태성에게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다. 또한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 황태성이 보증을 섰다고 한다.
【1906년】
-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군 출생하다.
- 경상북도 상주군 청동면 원장리(현 상주시 청리면 원장리 822번지)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버지 황주언과 어머니 박도곡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어물전을 경영했기 때문에 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출생 이후 상주군 내남면 남산리(현 상주시 낙양동)으로 이주했다.
☞ 1934년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1907년생으로 되어 있다.
☞ 1928년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4월 28일로 되어 있다.
【1921년】
- 3월, 상주의 첫 근대식 교육기관인 상산제일학교를 졸업했다.
- 4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1922년】
- 9월 5일, 함창 김씨 집안의 김반달과 결혼하여 슬하에 황경옥, 황기옥 두 아들을 두었다.
【1924년】
- 8월 15일, 일본인 교장 배척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에 처해지다.
4학년 4개반 120명의 학생을 규합하여 무능한 일본어 교사 엔도와 화학교사 요시다를 교체하라고 교장 가토에게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가토 교장이 이를 거부하자 6월과 7월 2달간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이 교장 배척운동 주도의 혐의로 1924년 8월 15일에 다른 주모자들과 함께 퇴학당했다. 이 사건을 전후로 서울청년회에 가입하고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가하였다.
【1925년】
- 경성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가정형편으로 인해 2학년 때이던 1927년 중퇴했다고 하는데, 사실 전술한 바와 같이 황태성의 가정 형편은 꽤 부유한 편이었으므로 가정형편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가정형편 문제로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는 말은 1929년 동맹휴학으로 검거될 당시 스스로 "연희전문학교를 1학년 때 중퇴했다"고 진술했었고, 1940년 황태성의 대구형무소 가출옥 서류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황태성이 일본 경찰에 적당히 둘러댔던 말로 보인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학생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했다고 서술했다. - 4월 14일, 이상재를 의장으로 한 전조선기자대회에 출석했지만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 10월,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경상북도 김천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황태성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면 욱정(현 김천시 감호동) 10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긴 뒤 김천면 성내정(현 김천시 성내동)에 거주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이어 나갔다. 황태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항일운동가들을 규합하기 위해 여관을 경영하였으며 금릉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외에 김천형평사, 김천노우회, 김천독서구락부, 김천형평청년회, 김천철육단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했고, 조선일보사 김천지국에 기자로 입사해 활동하기도 했다.
【1927년】
- 6월, 김천청년연맹을 해소하고 새로 김천청년동맹 집행위원이 되다. 신간회 김천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27년 경북지역의 사회주의 세력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경북도당)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공산당 경북책임위원 및 고려공산청년회 경북책임자와 고려공산청년회 김천야체이카로 활동하였다.
【1928년】
- 1월,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을 맡았다.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김천지국 기자로 언론에 종사하면서 1928년 1월에 치루어진 경북기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결의된 경북청년연맹(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의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황태성은 박정희가 그랬듯이 조혼한 부인과 이혼하고 신여성인 사회주의 운동가 문일지와 재혼했다. 신간회 김천지부 간부로도 활동했다.
- 8월 2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검거, 송치되었으나 그해 9월 23일에 석방되었다.
【1929년】
- 3월, 상경하여 경성부를 근거로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1929년 3월 상경한 그는 경기도 경성부 체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 125번지 김명성(金明性)의 집에 거주하면서 경성부를 근거로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정치부 책임 겸 경상도 조직책에 취임했다. - 1929년 12월, 조선학생전위동맹 사건 배후로 체포, 투옥되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경성부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는 학생시위를 계획하고, 그해 12월에 조선학생전위동맹과 조선청년동맹의 이름으로 격문을 뿌리고 학생시위를 전개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학생전위동맹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 1월 29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곳에서 2년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1932년 9월 19일에 만기출소하였다.
【1932년】
- 9월 19일, 만기출소 후 김천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다.
출소 후 김천군으로 돌아온 황태성은 김천읍 본정(현 김천시 용두동) 60번지에 거주하면서 정미소를 경영하였다.
【1933년】
- 1월, 김천그룹 재건협의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34년】
- 1월 28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재차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5년】
- 4월 13일, 김천소비조합 전무이사로 당선되다.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을 모색하면서 각 지역 책임자까지 정한 이들은 김천소비조합을 당의 기층조직으로 삼기 위해 침투, 1935년 4월 13일, 황태성을 김천소비조합 전무이사로 당선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 1935년 10월, 김천그룹재건협의회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황태성을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이를 탐지해 곧 대규모 체포에 나섰으며, 이에 결국 1935년 10월, 김천그룹재건협의회 사건의 주모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1938년】
- 2월 28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다.
1936년 3월 14일부터 1937년 11월 15일까지 무려 11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의 구류갱신결정 처분이 내려졌고, 1938년 2월 28일에서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미결 구류 통산 350일)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0년】
- 4월 12일, 형기를 1개월 남기고 가출옥, 창씨개명하다.
황태성의 아버지 황주언이 국방헌금과 황군위문품을 바친 결과 1940년 4월 12일, 형기를 1개월 남기고 가출옥되었다.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본관인 장수 황씨의 장수를 따서 나가미즈 케이쇼(長水憲昭)로 개명했다.
【1944년】
- 8월,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 전라남북도 책임자가 되었다.
출소 이후에는 대구 중구 대봉동에서 거주했으며 일제 말기에 1944년 8월, 여운형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자 전라남북도 책임자가 되었다.
【1945년】
- 해방 이후,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참여하다.
일제 패망 이후 경상북도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황태성은 경북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에 위촉되었다. 그리고 당조직 재건을 위해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을 조직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 경기도당 위원이 되었다가 10월 대구에서 경북인민위원회의 선전부장과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구지역 정당 및 사회단체 76개가 연합하여 결성한 조선신탁관리반대 공통투쟁위원회에 경북인민위원회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기획부 위원이 되었다.
【1946년】
- 남로당 조직에 참여하다.
- 1946년 2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 및 지방 동지 연석간담회’에 경상북도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의장을 맡았다.
- 1946년 6월, 대구에서 한민당ㆍ한독당ㆍ인민당ㆍ공산당 등 좌우정치 세력의 4개 정당 지부가 연합한 대구공동위원회에 공산당 5인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 1946년 10월, 대구사건에 참여하다
【1947년】
- 10월, 월북하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이 대구에서는 기아투쟁과 결합되면서 ‘10월사건’으로 확대되자 10월 1일 밤 지역 내 야체이카를 소집하여 시위방침을 하달하고, 다음날 모여든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등 항쟁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항쟁이 좌절되자 검거를 피해 북한지역으로 피신하였다. - 김성곤, 박상희 등과 함께 대구 10ㆍ1 사건 배후자로 지목되어 도피하다가 서울과 개성을 거쳐 1947년 10월에 세브란스의과대학 의학과에 다니던 둘째 아들과 함께 월북하였다.
- 대구 10월 사건을 좌익 폭동으로 규정하는 시각이 있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혔듯이 순전히 좌익 세력들만으로 구성된 정치적 액션은 아니었다. 실제로 급진 좌파들이 시발점이 된 것은 맞으나 대규모 폭동으로 번진 원인은 미군정 하 식량난과 토지개혁 지연, 단순히 미군정측의 편의를 위한 친일 관리 중용 등 모순이 지속되자 성난 민심이 폭발한 사건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결국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의 현지 원주민들에 대한 반지성주의적 측면에 있다.
【1948년】
-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다.
황해도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업성 지방관리국장과 외무성 부상과 상업성 부상을 거쳐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를 역임하였다.
【1949년】
- 남북로당 합당 과정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 7월 29일,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2급을 받았다. - 1953년 8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되었다.
1953년에 남로당 출신들이 대거 숙청당했지만 생존하였고, 오히려 1953년 8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당규약개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55년】
- 9월, 건강상의 문제로 퇴직 요양
하지만 1955년 9월,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퇴직한 뒤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3반에 거주하면서 요양하였고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탈락했다. 무역성 부상 재임 시절 김일성과 자주 만났기 때문에 김일성과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김일성과 안면이 있던 점, 그리고 건강 문제로 요양만 한 덕분에 1956~1958년 사이에 남로당 출신에 대한 대숙청이 이루어졌음에도 생존하였다.
【1961년】
- 8월 30일, 대한민국 5ㆍ16 쿠데타 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의 남북통일 협상을 위해 남하.
5ㆍ16 군사정변 이후 조선로동당 연락부에서 박정희와 접촉할 특사를 물색할 때, 황태성이 김일성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남한에 갈 수 있겠냐고 묻자 이 일을 마지막으로 하고 죽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황태성이 처음 흑석동에 나타난 때는 1961년 9월 1일. 당시 흑석동에는 3일 째 폭우가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나 심했는지 이날 오전에는 흑석동 뒷산인 서달산 자락 언덕이 무너져 일가족 6명이 압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 그날 북한에서 1950년대 무역성 부상까지 지낸 황태성이 중앙대학교 정문에 나타났다.
- 황태성이 휴전선을 넘어 우이동에 도착한 것은 하루 전인 8월 31일이었다. 그가 9월 1일 처음 찾은 곳은 남로당 출신으로 과거 친분관계가 있던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1913~1975)이 사장으로 있던 동양통신사였다. 그런데 마침 김성곤은 국제언론인협회 회의 관계로 외국에 나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앙대 강사로 있던 고향(경북 상주) 친구 김원출의 아들 김민하를 만나기 위해 흑석동을 찾은 것이다. 더군나다 김민하의 부인은 황태성이 앞으로 활동과정에서 큰 도움을 기대하고 있던 조카 임미정의 남편 권상능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김민하는 당시 중앙대 강사로 있었는데, 나중에는 중앙대 총장과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지냈고 지금은 <세계일보> 회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중앙대 경비실에 고향 아버지 친구가 찾아왔다고 해 김민하를 만난 황태성은 김민하의 집에 도착해 자신이 ‘김일성의 밀사로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왔다’고 설명한 후 조카 임미정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이렇게 해서 황태성은 1961년 10월 20일 갓 출범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될 때까지 50일 간 흑석동 산88-5번지 김민하의 집에 머물게 됐다.
- 황태성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날 수 있는 선을 찾아 나선다. 그는 우선 임미정-권상능 부부를 만나고, 그들 부부를 통해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인 왕학수 당시 고려대 교수와 죽은 옛 친구이자 동지였던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에게 연락을 취한다. 박상희와 조귀분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도 황태성의 소개가 결정적이었다. 조귀분은 박정희의 형수였을 뿐만 아니라, 김종필의 장모이기도 했다.
연락을 받은 왕학수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귀분이 어떻게 했는지는 2년 후 나온 ‘황태성 사건 진상 발표’와 <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진상 발표 자료는 김종필을 보호하기 위해 조귀분이 사위 김종필에게 바로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중앙정보부장 경호관 이아무개 중위에게 신고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김종필 증언록>에는 김종필이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961년 10월 15일 오전 3시쯤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단 말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보통 일이 아닐 거란 생각과 함께 수화기를 들었다.
“큰일 났어예.” 경북 구미에 계신 장모님의 다급한 사투리 목소리였다. “아니, 뭐가 큰일 났습니까.” 한참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던 장모가 입을 열었다. “예리 아빠(JP)는 모를 텐데… 옛날 장인 친구인 황태성이라는 사람이 이북으로 넘어갔는데 이 사람이 내려왔어예. 나한테 박정희 의장하고 예리 아빠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네예.” 장모는 조귀분(趙貴粉)이고 그분의 시동생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다.
장모의 목소리는 겁에 질린 듯 덜덜 떨렸다. 듣고 보니 장모가 당황하실 만도 했다. 나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모는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 사람들은 못 만날 거라예”라고 답했다고 했다.
장모는 밤중에 구미경찰서로 가서 경비전화를 이용해 내게 전화를 거셨다. 아마 중앙정보부장의 장모라서 경비전화를 빌려 준 모양이다. 나는 “장모님, 염려 마세요.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김일성이 내려보낸 황태성, “나는 밀사, 박정희 의장ㆍ김종필 만나게 해달라”, 중앙일보)
- 1961년 10월 20일, 흑석동 김민하의 집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되었다.
【1963년】
- 12월 14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의 어느 산골짜기로 끌려가 총살형.
- 1963년 대선 과정에서 이미 ‘황태성 사건’이 언제든지 미국과 야당에 의해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작동할 수 있음을 확인한 박정희로서는 황태성을 그대로 살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 이렇게 해서 ‘김일성의 밀사’ 황태성은 대법원 확정판결(1963. 10. 22)에 불복해 취한 재심 청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을 불과 3일 앞둔 1963년 12월 14일 인천의 어느 산골짜기로 끌려가 처형당하고 만다.
- 황태성의 묘비명에 ‘학생장수황공휘태성지묘(學生長水黃公諱泰成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기타】
- 2006년 11월, 황태성 생질녀인 임미정과 그녀 남편인 권상릉(權相凌)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내용을 접수한 바 있다.
황태성은 신문 과정이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김일성의 지시로 남북통일의 방안과 타협을 모색하러 왔다”고 진술했고, 심지어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김일성의 ‘밀사’로 온 이유를 “남한에서 간 밀사에 대한 반찰(편지 답장을 보냄)”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 5ㆍ16쿠데타 이후 북과 접촉한 쿠데타 세력
5ㆍ16쿠데타 세력이 쿠데타 직후 ‘북한과 서해 무인도인 용매도에서 15차례 정도의 정치회담을 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 정치 담당관을 지낸 투가첸코 전 소련 공산당 국제부 부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회담은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승인을 받아 육군첩보부대가 주도했으나 북한 측이 대표 격상을 계속 요구해 결렬됐다”라고 한다. 당시 육군첩보부대의 부대장은 이철희였고, 용매도 회담에 나선 남한 측 대표는 강성국과 김석순이었다.
5ㆍ16쿠데타 세력이 북한과 이런 비밀 정치회담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었다. 말이 ‘혁명주체세력’이지 명분이 아닌 이해관계로 모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논공행상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분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 혹시나 북한의 도발이 벌어진다면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북한과 비밀 정치회담을 통해 “서울과 평양에 비공식 대표부 설치”와 같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미끼로 지연작전을 쓰면서 혹시 발생할 수 있을 북한의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남북 장교들의 접촉은 첩보부대에서 정보수집 차원에서 한 것”이라는 김종필의 회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반공(反共)을 국시의 제1의(第1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라고 하면서 ‘선건설 후통일’ 입장에 서 있던 5ㆍ16쿠데타 세력이 북한과 비밀리에 정치회담을 개최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힘들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5.16쿠데타라는 남한의 새로운 변화에 직면해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대표 격상을 요구했을 것이고, 여의치 않자 박정희의 진의를 직접 파악하기 위하여 박정희와 인연이 있는 황태성을 ‘밀사’로 파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 황태성의 손녀를 만난 박정희
박정희가 5.5일 어린이 날, 전국 우수 어린이를 청와대에 초청했는데, 할아버지의 우수한 머리를 닮아 황태성의 손녀(재미교포 황유경)도 청와대에 초청을 받았다. 황태성의 손녀는 그 중에서도 대표로 뽑혔는지, 박정희와 육영수 나란히 나란히 서있는데, 그녀가 박정희에게 꽃을 달아주면서 박정희가 이름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의 할아버지가 황태성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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