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5일 월요일

장기영 [張基榮, 1916~1977] 언론인, 정치인, 금융인, 한국일보 창립, 백상예술대상

장기영 [張基榮, 1916~1977]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금융인으로, 호는 백상(百想)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종교는 불교다.
해방 직후 당시 조선은행을 지금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으로 정립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고, 1950년에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역임하면서 혼란했던 전시금융(戰時金融)을 수습하는데 공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일보사의 취체역 사장을 지냈으며 1953년 코리아타임스를 인수했다.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1954년 한국일보를 창립하였다. 이후 1962년 박정희의 밀사로 미국으로 다녀온 뒤 박정희 정권에서 발탁되어 부총리,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 국회의원, IOC 위원이었으며, 한국일보의 사주였다.
백상예술대상(百想藝術大賞)1954년 한국일보를 창립한 장기영의 호인 백상(百想)에서 따온 것이다.


1916
  • 아버지는 한성부의 곡물 무역상이었던 장동후(張東厚)이며, 어머니는 고성 이씨이다.

유년시절
  •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이종묵(李鍾默) 슬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 한남보통학교(漢南普通學校)를 졸업하다

1934
  •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를 졸업하였다. [당시 우등 졸업자로 일간신문에 이름과 사진이 함께 실렸다.]
  • 학창 시절에 농구 선수로 활약한 적도 있었으나 선린상고를 졸업한 3월에 조선은행에 입사, 금융계에 투신하였다. 졸업 무렵에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에 무시험 입학할 특전을 받았지만 어려워진 가정형편 탓에 진학의 뜻을 접고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청어잡이로 번성했던 청진점에서 스무살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43
  • 은행 내 공모에 제출한 저축과 물가, 그리고 인플레라는 제목의 논문은 당대 일본의 경제학자ㆍ사회학자인 다카다 야스마 박사의 경제학ㆍ사회학 이론에 케인스 이론을 접목해 큰 주목을 받았다. 백상은 이 논문으로 당대 엘리트들이 집결한 조선은행에서 1등 상을 거머쥐었다.

1948
  •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바뀌면서 1948년 다시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취임하였다.
  • 한국전쟁 당시에는 굶주린 인사들을 위한 전시(戰時) 신용대출을 밀어붙였다.

1950
  •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2년 만에 사임하고 조선일보의 취체역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 환도 후의 어수선하던 조선일보를 재건하고 내분을 수습한 뒤 방일영에게 경영을 넘겼다.

1953
  • 한ㆍ일 회담 대표의 대표단원의 한사람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최규하 등과 함께 일본측과 교섭하였다.
  •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던 195311월부터, 김활란으로부터 영어 일간지 코리아 타임스를 인수하여 발행하였다.

1954
  •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195469일부터 한국일보라는 제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81일 기자 제16명을 공채한 이후 정기적으로 기자를 공개 채용해 다른 신문사에 이러한 관행을 퍼뜨렸다.

1957
  • 황태영(黃泰永)에게서 KORCAD-TV를 인수하여 대한방송주식회사(DBC-TV)를 설립하고 3시간여의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했다. 1959년 사옥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AFKN-TV의 지원으로 방송을 이어가다가 196110월 군사 정권이 DBC-TV의 채널을 회수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 그밖에 국제 신문 협회(IPI) 한국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58
  • 국내 신문 최초로 과학부를 신설해 한국일보의 기반을 다졌다.
  • 한국 일간신문 발행인협회의 회장과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60
  • 동년 국제연합 세계연맹 제15차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왔다.
  • 서울경제신문, 소년한국일보를 창간하였다.

1961
  •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 초대 회장, 대한 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 최초로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 우리 축구팀 단장으로 원정, 공산권과의 체육외교를 펼쳤다.
  • 11, 한국일보가 필화사건에 걸리다. 민정이양과 관련하여 군정당국이 새 정당조직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이름이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이라는 1면 보도기사가 문제된 것이었다. 이 기사가 사실무근이라고 하여 사장 겸 편집국장이던 장기영과 편집부국장 홍유선(洪維善), 정치부장 김자환(金子煥), 정치부기자 한남희(韓南喜) 등 네 사람이 구속되었다. 이때 김용태는 이 필화사건을 무마하고 장기영을 석방하는 데 힘을 써 주었다. 그 후 민정선거를 앞둔 632, 장기영은 김용태의 천거로 박정희를 만나 그 자리에서 선거용 소맥(小麥) 도입을 위한 밀사로 지명되어 일본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 밀사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장기영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1964
  • 5월 정일권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되어 입각하였다. [그가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입각하면서 신문사 경영에 소홀해졌고 이 틈에 중앙일보가 기자와 광고국 직원을 대량으로 빼가버려서 한국일보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는 3년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외자도입정책 주도와 금리현실화, 유리창 행정과 연탄의 흑백논쟁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우리 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의 기틀을 잡았다.
  •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에 수행하여 경제외교에도 힘썼으며 체육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65
  •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수행하였다.

1966
  •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막후에서 일해왔으며, 대한 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1966), 아시아 경기 연맹(AGF) 회장(1966)으로 활약하여 한국 체육발전에 힘썼다.
  • 박정희 대통령의 태국 등 아시아제국 방문에도 수행하여 경제외교에도 힘썼다.

1967
  • 한국일보로 복귀하였다.
  • 국제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장이 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된 것을 계기로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 등 스포츠의 국제교류에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 일등 수교훈장을 받았다.

1968
  •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1969
  •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고, 이어 주간한국과 주간여성 등 여섯 개의 자매지를 발행하였다.
  • 한일간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대통령특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에 한일협력위원회를 창설, 창립총회 부의장이 되기도 하였다.
  • 청조근정훈장 수상

1970
  • 국민훈장 무궁화장, 1급 문화훈장 최고 체육장 수상
  • 정인숙 스캔들에 대한 대응
    정일권-정인숙 스캔들 당시 그는 정인숙 사건이 언론에 공론화됐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즉각 언론통제에 들어갔지만 그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계를 비호하였다. 이것을 두고 그가 정일권 실각공작을 벌이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당시 언론계에 복귀해 있던 장기영이 차기 총리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정인숙 사건이 터지자 장기영은 이것을 문제삼아 박 대통령을 상대로 정일권 실각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1971
  •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 제1지구당(중구ㆍ종로구 지구당) 위원장에 위촉되다.

1972
  •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 이후락과 함께 남북 대화에 참여하여 남북 조절 위원회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이후 10만 어린이 부모찾기 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분단의 설움과 이산가족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쏟아왔는데, 197211월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 일간스포츠에 고우영의 임꺽정을 연재하였다. 당시 신문에서는 단컷만화나 4컷 만화가 주로 연재되었고 그 때문에 신문만화는 무조건 단컷 아니면 4컷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장기영 사장이 일본이나 구미 신문에서 연재되던 극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간스포츠에 이와 비슷한 형식의 만화를 연재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당시 일간스포츠 편집국은 이에 대해 매우 반발했고, 이에 장기영 회장이 그 편집진을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고, 김수남 당시 소년 한국 주간이 편집진을 다독여 결국 만화를 연재함으로써 수습이 되었다. 그 인연 덕분이었는지 나중에 고우영은 한국일보에서 시사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1973
  • 9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한일 협력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공동위원장 대리를 겸임,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어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된 수차의 본 회담에 참석하였다.
  • 소설가 김훈을 한국일보에 입사시키다. 당시 한국일보는 주요 신문들 중 유일하게 기자 공채에 고졸 출신도 응모할 수 있었는데, 당시 김훈(소설가)은 아버지 김광주의 사망 후 가계가 어려워지면서 고려대학교를 중퇴해 고졸 신분이었다. 아무리 응모가 가능하더라도 당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기자를 뽑는데 고졸 출신을 뽑는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장기영은 면접까지 올라온 김훈을 보고 눈에 불량끼가 있어 기자를 잘하겠다며 뽑았다고 한다.

1974
  • 국민체육심의위원이 되었다.
  • 황석영의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다. 황석영이 1974년부터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 지면에 연재하게 되었을 때, 6개월의 준비 기간과 자료비가 필요하다는 황석영에게 당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선뜻 건네주었다. 그런데 정작 황석영은 자료 수집 도중 평소 알고 지내던 문우들과 모여 술을 마시며 보름만에 돈을 다 써 버렸고, 다시 찾아가 사정을 실토하며 자료비를 요청하는 황석영에게 처음 건넸던 액수보다는 적은 돈과 함께, 술집 명함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주며 "앞으로 술이 마시고 싶을 때는 여기, 내가 자주 가는 곳인데 여기 가서 내 이름으로 달고 마셔라. 그리고 이 돈은 꼭 자료비로 써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기자들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내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 시대 고서 수십 권의 원전 사진들을 사진으로 찍어다 자료로 전해 주었다고 황석영은 술회하고 있다.

1976
  • 민주 공화당 당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77
  • 12, 가족들과 프라자호텔 중식당에서 신년 모임을 가졌다.
  • 대한체육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 411,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장기영 사후 한국일보
  • 한국일보는 1973년부터 첫째 아들인 장강재가 사장직을 물려받아 운영했으나 19938월에 간암으로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같은 해 11월에 장기영의 둘째 아들이자 장강재 회장의 동생인 장재구 회장이 물려받았다가 경영을 말아먹고 2013년에는 편집국을 폐쇄하는 등의 막장 행각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 그 후 한국일보는 2015년에 동화그룹에 인수돼 장기영 일가는 경영권을 완전히 잃게 됐다. 2010년대부터는 조중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겨레에게도 밀리지만 사실 한국일보는 1990년대까지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메이저급 정도가 아니라 장기영이 타계하기 전 1970년대의 한국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한국의 양대 일간지에 가까웠고, 그 밑에 조선, 중앙, 경향, 서울 등의 메이저가 포진하고 있었다. 장기영은 스스로를 '장 기자'라고 자칭하며 정부의 감투를 쓰고 있던 시절에도 자신의 본업이던 언론에 대하여 애정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이만섭, 최창봉 등 그 시절 원로 언론인들의 회고에 장기영의 당시 행적이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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