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국 [金昶國, 1884~1950]
장로교 목사.
【1884년】
- 1월 28일, 전북 전주에서 한의원인 김제원(金濟元) 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1897년】
- 김내윤ㆍ함성철ㆍ김부인(김창국의 어머니)ㆍ유부인ㆍ임부인(김창국의 할머니) 등 5인과 함께 전주에서는 최초로 레이놀드(W. D. Reynolds, 李訥瑞)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0년】
- 9월 9일에 레이놀드의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전주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전주에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교육이요 신흥학교의 출발이다. 김창국은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이자 최초의 신흥인이다.
【1907년】
- 해리슨 부인의 주선으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07년에 졸업하였다.
- 한때 선교사 테이트(L. B. Tate, 崔義德)의 전도활동을 도우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5년】
- 평양숭의여자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여학교 교사를 했던 양응도 씨와 결혼하였다.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8회).
-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 삼례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
【1917년】
- 전북노회의 파송으로 제주도 지방 전도목사가 되어 제주도 선교에 주력하였다.
- 1923년까지 시무하는 동안 성내교회를 중심으로 교역하면서(1917.9.~1922.3.) 내도(內都)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금성ㆍ한림ㆍ삼양 등지의 교회를 지도하였다.
-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을 초청하여 전도집회를 열기도 하였고 많은 결신자를 얻어 교회를 세우고 이를 유지하게 하였다.
【1919년】
- 3ㆍ1운동 당시 윤식명ㆍ김정찬 등과 함께 제주도의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1922년】
- 4월 20일, 전남 광주의 남문밖(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 통합측)에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
- 광주의 양림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남문밖교회가 양림교회와 금정교회로 불리되었다]
- 9월 30일, 제14회 전남노회 임시노회에서 광주양림교회와 금정교회로 분립되었고, 김창국 목사는 금정교회를 사임하고, 양림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금정교회는 최흥종 목사가 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 장로교 총회에서 조직한 「문둥병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임되어 구라선교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26년】
- 양림교회의 새 예배당을 완공하고 김강ㆍ최병준ㆍ홍우종 장로 등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1935년】
- 장흥군 대덕면에 있는 진본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3년】
- 일제에 의해서 광주 양림교회에서 강제로 사임하였다.
【1945년】
- 해방과 함께 다시 광주 양림교회에 부임하였다.
【1947년】
- 청년들이 일제말기 교회의 태도에 분개하며 김창국 목사에게 떠날 것을 종용하여 1947년 6월에 교회를 사임하였다.
【1950년】
- 8월 1일, 별세하였다.
【기타】
- 김창국 목사는 광주의 초대 YWCA회장을 역임한 부인 양응도 여사와의 사이에 6남매(4남 2녀)를 두었다.
- 장남 김현정(金顯晶) 씨는 평양학교를 졸업하고 군산 개복동교회를 목사로 섬겼다.
- 차남 김현승(金顯承) 씨는 숭전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시인으로 알려져있다.
- 3남 김현택(金顯擇) 씨는 신흥학교 지정 2회 졸업생으로 전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 4남인 김현구(金顯求) 씨는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았으며, 광주 중앙교회의 원로장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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