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8일 목요일

최관흘 [崔寬屹, 1877~?] 장로교 목사, 시베리아 선교사

최관흘 [崔寬屹, 1877~?]

장로교 목사, 시베리아 선교사
 
1877
  •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00
  •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전도에 열심하여 정주 염방(廉坊)교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 그의 전도로 김선필ㆍ홍정익ㆍ곽양로ㆍ김천경ㆍ김익화ㆍ심중기ㆍ최승기 등이 예수를 믿었고 1900년부터 곽양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바 곧 염방교회의 시초이다.
  • 이후 곽산교회로 옮겨 봉사하였다.
 
1906
  • 1906년에는 장로 장립을 받아 곽산교회의 당회를 조직했다.
 
1909
  • 6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2).
  • 9월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와 함께 노회로부터 시베리아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교포들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 1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자 러시아 당국에 한인들에게 선교할 것을 통보하고 서면허락을 받기 원했으나 러시아 당국은 거절하였다.
    최관흘은 1909년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 60명과 함께 장로교파를 조직했다. 그리고 연해주 지사 겸 총사령관인 운터베르게르에게, 일요일과 수요일 예배를 허가해 달라고 청원했다. 교인 중에는 이상설도 있었고 성재 이동휘도 있었다.
    정교회 블라디보스톡 교구는 법을 통해 장로교 활동을 막으려 했다. 장로교파 설립 허가를 해주지 말도록 연해주 당국에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러시아 내무부 종교부서 이민족선교담당자는 연해주 지사에게, 조건부로 청원을 허가해 주라는 공문을 보냈다. 예배 장소와 시간을 지역 경찰에게 미리 알리는 조건이었다.
 
1910
  • 보고서에 따르면 최관흘 목사는 짧은 시간에 400명의 한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는 기록을 남겼다. 박용규의 기록에 의하면 1910년 당시 그가 설립한 교회의 출석교인은 648명으로 세례교인 38, 학습교인이 68명에 이를 만큼 그의 전도는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1911
  • 1911년 최관흘 목사는 총회에 예배당이 2, 예배처소는 13곳 교인이 764, 연보가 90229전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보고한다.
  • 1117일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 129일 러시아당국은 최관흘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추방은 실시되지 않은 가운데 최관흘은 고민하게 된다.
 
1912
  • 부활절에 오가이 봐실리 러시아 정교회 신부의 인도를 따라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하게 된다.
  • 이때 러시아의 박해 속에서 정상적인 선교가 어렵다고 판단한 한국장로교 총회는 19129월 러시아 선교를 중지하고 그 지원재정을 제주도로 돌리는 결정을 하게 된다.
  • 최관흘 목사는 19121230일 러시아정교회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러시아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최인노껜찌라는 세례명을 받고 러시아정교회 교인이 되었다. 목사였지만 신부로 곧바로 인정받을 수 없어서 주로 한인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교리 문답사로서 8년간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러시아정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최인노껜찌 봐실리비취는 한인사회에서 집회를 할 때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특히 좀처럼 나오지 않던 사람들도 늦은 밤까지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3
  • 826, 최관흘 목사의 소식을 접한 시베리아선교구역 담당노회인 함경노회는 즉각적으로 그 진상조사를 위하여 시찰위원으로 푸트(W. K. Foot, 부두일)ㆍ양전백ㆍ블레어(W. N. Blair) 등을 선정, 현지에 파송하였다.
 
1914
  • 블라디보스톡 정교회 제2차 선교대회에서 선임교리문답사로 선출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정이 있는데도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고 한달에 50루불을 받고 살아가니 더 많은 지원을 하기 위해 월 840루불의 월급을 지교회와 선교위원회에서 보장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1915
  • 5회 함경노회에서 시찰위원 중의 하나인 블레어 목사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현지 교회형편은 러시아 관헌의 위협과 희랍교회의 침해로 교회당에서 집회하지 못하게 봉쇄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신앙심은 고무적이어서 개인집에서 집회를 계속하고 있고 세례 학습식도 거행되고 있다. 최관흘은 희랍정교회로부터 3년째 월봉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하여 철저한 권면이 필요한 줄로 사료되는 바이다.”
 
1916
  • 6회 함경노회에서는 최관흘의 목사직을 면출하는 결의가 있었고 그 대신 박치영을 블라디보스토크 전도목사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품행부정으로 출교처분을 받는 불명예가 발생하여 시베리아 선교는 계속하여 실패를 거듭한 격이 되었다.
  • 5회 장로교 총회에서 최관흘 목사를 면직하였다.
 
1917
  •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정 러시아의 국가종교였던 정교회가 재정적 지원을 잃게 되었고 모든 조직은 무너지게 되었다.
 
1918
  • 1918년의 블라디보스톡의 정교회 통보지는 오 봐실리 신부가 직위해제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1922
  • 8, 2회 함북노회 때 최관흘은 장로교 목사로 복직되었다.
  • 93, 청진예배당에서 다시 최관흘의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다. 복직이 된 최관흘 목사는 지금의 연해주의 빨지산스크에 있는 우지미교회로 청빙되었다.
 
1923
  • 1923년에 중국 장요구(長腰區)교회의 임시목사가 되었다.
 
1924
  • 26회 평북노회에서 장요구교회의 위임목사 청빙이 허락되었다.
 
기타
  • 전택부의 토박이 신앙산맥에서 전국장로회 연합회장 김재호 장로의 말을 빌어 최관흘 목사에 대한 기록을 아래와 같이 전한다.
    “해방후 소련군이 진주할 때, (최관흘) 아들 최활엽(崔活燁)과 함께 평양에 나타났는데... (최관흘)은 하르빈에 살다가 귀국했다는 것이며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더라는 것이다. 소련군대가 평양에 입성할 때 그의 아들 최활엽은 스티코프 환영사에서 우리 동양에서는 기독교 목사나 장로라면 그리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서양에서는 장관대우를 받는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 기독교가 일어서야한다면서 제정 러시아 때의 일을 회상하는 듯 느껴지더라는 것이었으며, 그의 아들 최활엽은 스티코프의 통역관으로서 그 많은 적산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었으나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였으며 세금의 탈세를 하지 아니하고 제법 목사 아들다운 태도를 취하더라는 것이었다...”
    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2 - 한국교회 사도행전,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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