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8일 월요일

김석창 [金錫昌, 1876~1950] 장로교 목사. 제15회 장로교 총회장(1926). 독립운동가. 교육자

김석창 [金錫昌, 1876~1950]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교육자.
 

1876
  • 1221, 평북 철산군 여한(餘閑)면에서 아버지 김원옥(金元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1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이명은 준명(俊明), 준선(濬宣)이다.
 
1902
  • 선천으로 이주하였다.
  • 당시 선천에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특히 휘트모어(Whitmore, 魏大模)의 전도로 그의 일가가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다.
  • 대영성서공회에서 서적을 판매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1906
  • 그는 복음전파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휘트모어ㆍ양전백(梁甸伯)ㆍ노정관(盧晶瓘) 등과 협력하여 신성(信聖)학교 창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1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4).
  • 5회 독노회에서 부회계로 선출되었다.
  •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선천남()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목사로 취임하였다. 선천남교회는 얼마 후 1200명이 모이는 교회로 급성장했다. 당시 선천북교회(양전백 목사)1400명의 교인수였는데, 이는 선천읍 총인구(5000)의 절반이 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선천남교회 목사로 재직 중 1911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고자 했다는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는 날조된 사건이었기에 석방되어 이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12
  • 장로회 총회 설립 당시 부회계로 선출되었다. (이후 연속 8회기 부회계를 맡았다)
 
1919
  • 31운동 당시 신성학교 교사인 홍성익ㆍ김지웅ㆍ양준명 등과 의논하여 31일 신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선천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 평북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20
  • 824, 미국의원단 일행이 선천을 통과할 때, 우리나라의 독립을 희망함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9, 신성학교 졸업생 박치의(朴治毅)에 의해 일어난 선천경찰서 폭탄투척사건과 관련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192091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결사대원(決死隊員) 박치의(朴治毅)의 선천경찰서(宣川警察署) 폭탄사건에 관련되었는데 이는 광복군 소속 이진무(李振武)가 신의주역 호텔에 폭탄을 던졌고, 또 독립군 3명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만주로 도피한 사건이다.]
 
1921
  • 4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선천경찰서 투탄사건으로 소위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및 다이쇼 8(1919) 제령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상고했으나 72,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그는 고문의 여독으로 두 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를 얻었다. [김석창 목사의 판결문]
 
1925
  • 경성감옥에서 6년간 옥고를 겪고 814일 가출옥하였다.
 
1926
  • 평북노회장을 역임하였다.
  •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5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 선천남교회 목사로 돌아와 목회 활동과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신성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나 재정 때문에 폐교 위기에 몰리자 유지들에게 호소해 학교의 재정을 충당하는 한편, 진남포(鎭南浦)에 억양기(億兩機)야학교를 개설해 문맹퇴치에 노력하였다. 또 선천여자고등보통학교(宣川女子高等普通學校)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 일을 추진하였다.
 
1927
 
1937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와 친분이 있어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당시 일시적으로 일제의 주시를 받기도 하였다.
 
1938
  • 강신명 목사는 평양 장신의 33회 졸업생으로 김양선(金良善, 1907-1970), 손양원(孫良源, 1902-1950) 과 함께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곧 기독교 도시로 알려진 평북의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의 동사목사가 되었다. 한편 193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미국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신사참배 거부키로 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했다. 이 시기 그는 담임목사인 김석창(金錫昌, 1876-1950) 목사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출처 : 최재건의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
  • 19388, 강신명은 제54회 평북노회에서 남교회의 청빙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남교회는 1911828일 선천의 천남동 중구에 예배당을 건립하면서 창설된 교회였다. 신학생시절 한 두 차례 잠깐 들른 일은 있지만 남교회의 담임자 김석창(金錫昌)과는 특별한 관계는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선천북교회가 후임 담임자를 뽑을 때, 김석창은 강신명을 강력히 추천하였다. 강신명도 평생에 잊지 못할, 존경하는 교역자로 김석창을 지목하였다. 김석창에게서 목회를 배웠던 그는 교회가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목회자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강신명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내가 있던 남예배당은 북예배당보다 10년 후에 지어졌으나 천장에서 비가 새고 목재도 상한 곳이 많아 개축(改築)하게 되었다. 교인들이 세 차례나 헌금을 하고 정성을 들여 결국 새 예배당을 지었다. 그런데 새 교회 입당 예배를 앞두고 주일학생들이 새 집에다 낙서를 해버렸다. 당시 당회 서기로 일하신 박찬빈(朴贊斌) 장로는 성미가 급하신 분이라 주일 학생들을 막 야단을 쳤다. 이것을 본 김석창 목사는 웃으면서 집이란 짓는 그 순간 낡은 집 아니오, 헌당식 할 때 한번 손질하면 되지 않겠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오늘까지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지난 번 새문안 예배당을 짓는 동안에는 더욱 그랬다.” [강신명 목사 일대기]
 
1940
  • 평북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45
  • 일제 말기에 경찰의 강요로 강단에 서지 못하였으나 교인들의 정성으로 선천남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815해방을 맞았다.
 
1946
  • 성역 40주년 표창을 받았다.
  • 12, 곽산(郭山)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공산당원에게 폭행을 당하여 병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7
  • 1, 진갑을 맞은 그는 가족들에게 모두 월남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신은 남아 그대로 교회를 지킬 뜻을 표명하였다.
 
1950
  • 한국전쟁 당시 10월에 유엔군이 선천까지 진주했다가 철수할 때 공산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1963
  • 정부가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댓글 1개:

  1. 한국 개신교 초창기에 선천 지역은 서북지방 선교의 중요한 거점 중의 하나였으며 6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1907년 당시 서울의 기독교인 수가 7,435명인 반면에 선천은 15,348명이었고, 평양은 20,414명이었다. (평양보다는 적은 수였지만 인구 비율면에서는 평양을 능가했다)

    인구 비율면에서 복음화율을 보면 첫째가 평안북도 선천, 두 번째가 소래교회가 있었던 황해조 재령, 세 번째가 평양, 네 번째가 서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초창기 선교사들은 선천을 ‘한국의 예루살렘’ 또는 ‘기독교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천 기독교의 초창기 역사는 양전백과 김석창이 대표적인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전백, 남석창]

    선천의 최초의 교회는 선천북교회였는데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양전백 목사가 담임이었다. 이 북교회에서 선천남교회가 분리되었는데 평양장로회신학교 제4회 졸업생 김석창이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북교회에서 중앙교회로, 남교회에서 동교회로 분리되었다)
    김석창 목사에 대해서 숭실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강신명 목사는 1938년에 선천남교회에서 김석창 목사와 함께 교회를 섬겼던 기억을 바탕으로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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