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영 [高士英, 1874~?]
장로교 목사.
【1874년】
-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동두면(東頭面) 부백리(孚白里)에서 태어났다. 생년월일은 알 수 없으나 1919년 당시 46세라는 판결문 기록으로 미루어 1874년생으로 짐작된다. 장로파(長老派) 기독교 신자이며 교회에서 장로 직책을 맡고 있었다. 高益英(고익영)이라고도 함.
【1912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5회).
- 평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평원 부백리(復白里)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19년】
- 1919년 3월 7일 평남 평원군 석암면(石岩面) 석암리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주동자를 체포하는 일제 경찰에 항거하였다. 석암리 장날인 3월 7일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 이때 일제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다가 총상을 입고 순안(順安)의 안식교회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경찰을 막아선 김대준 등 세 명도 부상을 입었다. 퇴원 직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 1919년 6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자 이에 불복하여 “한국 민족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일은 정당한 행위이므로 죄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상고하였으나, 7월 31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당시 판결문]
【기타】
-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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