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수 [金弼秀, 1872~1948]
장로교 목사, 사회운동가, 문필가, 호는 추강(秋岡)
【1872년】
- 7월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죽산리의 부유한 연안 김씨 가문에서 독자로 출생하였다. 부유한 선비 가문이라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한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김필수의 성장기 및 은퇴 후 생애에 대해서는 전택부가 김필수의 장자 김은석(金恩錫)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성장기 및 은퇴 후 생애에 대한 구술 정보를 간략하게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1884년】
- 일찍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의 지도자인 박영효 등과의 교분관계로 일본 코오베로 망명갈 수밖에 없었다.
-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역적 혐의를 받지 않고 귀국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귀국 당시 이미 단발을 하고 기독교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 귀국한 뒤 언더우드 목사의 추천으로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W. D. Reynolds, 李訥瑞) 목사의 어학선생이 되어 전주에 머물렀다. [이는 전택부의 주장이고, 당시 언더우드와 레이놀즈가 남긴 사료에는 김필수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전택부의 말이 올다면, 김필수가 레이놀즈를 만나 개신교인으로 개종한 시기는 1896년 이후일 것이다.]
【1899년】
- 세례를 받았다.
【1903년】
-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보인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에 김필수는 전주지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9월 20일 창립된 치리회로, 한국인 장로가 세워지고 여러 당회가 결성되면서, 이전에 선교사만 참석하던 선교공의회가 한국인 지도자도 참여하는 장로교공의회로 발전한 것이다. 이 조직은 1907년에 조선장로회 독노회가 결성될 때까지 존속했다.] - 당시 김필수는 1901년에 남장로회 한국선교회가 개교한 전주 신흥학교의 초기 한국인 교사 5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 10월 28일, 정동의 서울 유니언(Seoul Union)에서 정회원 28명과 준회원 8명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Seoul YMCA)가 창설되었다. 당시 창립총회에는 한국인이 김필수와 여병현 두 사람 뿐이었다.
- 다시 전주에 내려가 완산교회 장로가 되었다.
【1904년】
- 목포에서 남장로회가 진행하는 제3회 사경회(2월 25일부터 3월 9일까지)에서 신앙 간증을 하였다. 당시 존 페어맨 프레스턴(John Fairman Preston, 변요한, 1875~1975)은 당시 김필수의 간증에 대하여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가장 탁월하게 전달된 이야기 중 하나는 해리슨의 조사인 김필수가 전하는 것이었다. 주제를 「변명」(Excuses,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한 마음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으로 정한 그는 불신자와 믿음이 약한 형제들 모두를 완전히 휘어잡아 뒤집어 놓았다. 이 사람이 겨우 5년 전에 세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의 철저한 기독교적 사고관이 더 돋보였다.” - 황성기독교청년회, 12인 이사회가 선거로 구성되었는데, 이때 다시 배재학당 교사 여병현과 김필수 두 사람이 모두 이사로 추대되었다.
- 1904~1905년 어간에 선교사들은 보고서에서 김필수를 언급할 때마다 전도자 및 설교자로서의 능력을 칭찬하였다. 레이놀즈ㆍ테이트(Mattie Tate, 최마태, 1864~1940)와 함께 남장로회 전주지부에서 활약한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 하위렴, 1866~1928)과 윌리엄 전킨(William Junkin, 전위렴, 1865~1908)의 보고서에 그 기록이 있다.
“내 조사 김필수는 그해 상당 시간을 순회하는 데 보냈고,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뎠다. 고산ㆍ여산ㆍ익산ㆍ함열을 포괄하는 지부의 북쪽지방이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그는 또한 용단ㆍ무주ㆍ금산 및 인근 지역으로도 한 차례 다녀왔다.” - 1904년 당시 해리슨의 조사로, 주로 전라북도 북부지방을 담당했다. 이어서 군산의 전킨이 해리슨과 자리를 바꾸자, 이번에는 전킨의 조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최중진ㆍ윤식명과 함께 전라공의회(전라대리회)가 추천하는 목회자 후보생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 4월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학생연맹(WSCF) 세계대회에도 브로크만ㆍ윤치호ㆍ김규식 등 한국 YMCA 인사들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 전북대리회 서기를 맡았다.
【1908년】
- 호남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 초대 장로로 안수받았다.
- 제2회 독노회에서 부서기를 맡았다.
- 전북대리회 서기를 맡았다.
- 출판사 광학서포에서 『경세종』이라는 소설을 간행하였다.
【1909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2회).
- 장로회 제3회 독노회에서 8명이 안수를 받아 장로교 목사가 되었는데, 이 중 3인이 전라대리회 출신 김필수ㆍ윤식명ㆍ최중진이었다. 이때 “김필수는 진안, 장수, 무주 등지에 마로덕과 동사목사”가 되었다.
- 제3회 독노회에서 부서기를 맡았다.
- 전북대리회 서기를 맡았다.
- 그는 군산에 소재한 군산교회(현 개복교회)와 구암교회(궁말교회)이 위임목사로 임명되었다.
- 김필수 목사와 구암교회
[전라북도 군산시 영명길 22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의 교회]
구암교회의 설립 시기는 1) 1893년 1월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damer D. Drew, 위대모) 선교사가 한국인 장인택을 조사로 하여 호남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장인택 조사가 회계집사가 된 시점, 2) 1896년 4월 6일 전킨 선교사의 집에서 예배 드리기 시작한 시점, 3)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12월 21일 임피 궁말로 옮겨 전킨의 집에서 궁말교회로 예배를 드린 시점이라는 주장이 공존한다.
1910년 4월 9일 오인묵이 장로로 장립되며 조직교회로 발전하였으며, 1913년에는 양응칠(梁應七)이 장로로 장립되었고, 개복동교회 장회장인 김필수 목사가 구암교회 당회장까지 겸임하였다. 김필수 목사 재임 시절인 1914년 구암교회 교인 수는 220명이었고, 1915년에는 499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이후 구암교회는 계속 부흥하였고, 군산 지방의 모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구암교회는 알렉산더(A. J. A. Alexander) 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안락소학교를 경영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1896년에는 군산영명학교(현 제일고교), 1902년에는 군산멜본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를 세웠으며, 구암예수병원 등도 설립하여 교육과 의료사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구암교회는 한강 이남과 호남 최초의 군산 3ㆍ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군산의 구암동산에서 3월 5일 발원되어 총 28회에 걸쳐 30,700명이 참가하였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부상자가 195명이 발생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구암교회]
【1910년】
- 제4회 독노회에서 부서기를 맡았다.
- 전북대리회 회장을 맡았다.
【1911년】
- 제5회 독노회에서 부서기를 맡았다.
- 10월, 전라노회가 창립되었을 때 초대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12년】
- 제1회 장로교 총회에서 부서기를 맡았다.
【1913년】
- 「예수교회보」 편집자로 김필수를 초청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노회와 김필수 본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 제2회 장로교 총회에서 서기를 맡았다.
【1914년】
- 제3회 장로교 총회에서 서기를 맡았다.
【1915년】
- 장ㆍ감 두 교파가 연합하여 〈기독신보〉를 창간할 때 편집인이 되었다.
10월에 모인 전라노회 임시노회에서 총회 신문위원 중 하나였던 호남 원로 선교사 레이놀즈는 김필수 이외에 적임자가 없고, 본인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노회를 설득했다. 이런 김필수의 서울 전임 논의에 군산노회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노회에 유임신청서를 제출하여 위임목사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레이놀즈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목회자로서 탁월했음에도, 문필가로서도 인정받기를 원했던 김필수의 서울 전임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12월에 상경하여 「기독신보」 주필이 되었다. - YMCA의 일요강좌와 사경회 등의 강사로 활약하였다.
- 전주서문교회에서 열린 제4회 장로교 총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1918년】
- 3월 26일,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서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가 YMCA회관에서 창설되었는데 이때도 초대 회장으로 당선되어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 때에 김필수 회장은 취임설교에서 「일 천부(天父)의 뭇ᄋᆞ들, 일 구주(救主)의 지톄(支體)로써 교파를 분립(分立)ᄒᆞᆷ은 다만 시긔(時期)와 쟝소(場所)에 의ᄒᆞ야 형식에 불과ᄒᆞ거늘 따라서 정신세계에 까지 영향이 혹 잇슨 즉…현금에 쟝로 감리 량교파가 이를 고념(顧念)ᄒᆞ야 일톄적(一体的) 련합긔관을 조직ᄒᆞᆫ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 9월 25일, YMCA 부총무 천거위원회 모임이 열려 육정수가 부총무로 천거되었을 때, 당시 위원으로 김필수도 참석하였다.
- 11월 세계기도주간에 1주일간 종교집회를 빙자한 독재저항계몽강연을 열었는데, 오긍선ㆍ신흥우ㆍ박희도ㆍ정춘수와 함께 연사로 선 김필수는 12일에 “사회개량의 요소”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19년】
- 3ㆍ1운동 당시에는 기독신보의 주필로서 또한 YMCA의 지도자로서 언론 및 강연 등으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 2월 하순에 광주로 내려가 광주의 성자로 유명한 오방 최흥종과 김철 등을 만나 거사를 협의했다.
- 기독신보가 편집방침과 보도지침 때문에 일제 압제나 3ㆍ1운동에 대해 노골적인 기사를 쓰지는 못했지만, 주필 김필수 등 주요 한국인 필진은 개인 자격으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참여하는 일에 힘썼다.
- 11월 14일에 YMCA 강당에서 열린 강연에는 약 1,500명 앞에서 “합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는데, 핵심은 무력주의로 세계를 재패하려 한 독일이 실패했듯, 일본 군국주의도 결국 종말을 고하리라는 경고였다.
【1920년】
- 서울 YMCA 종교강연 주간이 1월 17일 마무리 되었을 때, 마지막 날 연설자는 김필수였다.
- 4월 대전도운동을 조직하여 기독청년전도단을 태동시키고, 7월부터 12월까지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전도대를 파견했다. 이때 전도대 대장 김필수는 스스로 경기와 경북 전도대, 즉 경경대(京慶隊)를 직접 인솔하고 전도활동에 뛰어들었다. 이 활동은 때마침 그해 4월에 민족대변지를 자임하며 출발한 「동아일보」가 적극적으로 보도하면서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1921년】
- 3월에 창간된 YMCA 월간지 〈청년〉 책임편집을 맡았다. 김필수는 창간사를 쓴 바 있다.
- 5월에 「기독신보」를 떠나 YMCA로 자리를 옮겼다.
【1922년】
- 호남 최초로 광주에서 YMCA가 최흥종을 중심으로 창립될 때, 이를 주선한 3인은 김필수, 이상재, 신흥우였다.
【1923년】
- 중앙 YMCA에서 YMCA연합회 종교부 간사로 보직 이동하였다.
- 1920년 이후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났고, 1923년 5월 10일 경성부 발기인 총회가 있었는데 김필수는 이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 개역성경 출판을 위한 개정과정에서 개역자회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했는데, 김필수는 김인준ㆍ정태용 등과 함께 한국인 위원 중 하나가 되어 1924년부터 활동하였다.
- 6월 21일에 서울 천도교당에서 총독부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압박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 23개 사회단체가 연합해서 열기로 계획한 언론집회압박탄압대회를 위한 실행위원회 63인 중 김필수도 있었다. 이 집회는 일제의 방해로 열리지는 못했지만,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언론인 및 운동가인 김필수가 민족 및 사회운동의 관심사에 공통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 12월부터 예수교서회 편집자로 자리를 옮겼다.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클락(William M. Clark)가 1924년 초 예수교서회 편집부 번역 책임자가 되면서 그의 지인이었던 김필수가 서회로 옮기게 된 것이다.
【1925년】
- 3월, YMCA 월간지 〈청년〉의 책임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7년】
- 9월 21일, 언더우드 사망 11주기로 새문안교회에서 기념비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이때 선교사와 한국인 지도자 총 9명이 행사식순을 맡았는데, 이 중 김필수는 한석진과 함께 축사를 맡았다.
【1931년】
- 6월 8일 예수교서회 신사옥 낙성식을 위해 YMCA 대강당에 천여 명이 모인 거대 행사가 벌어졌을 때에도 김필수는 식사(式辭)를 담당했다.
【1940년】
- 전북노회가 그의 음주문제를 제기하자 경기노회로 옮기기로 하고 임시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다.
【1941년】
- 전북노회 정기회에서는 “본 노회에 속한 무임목사 김필수ㆍ박창욱 양씨는 정치 17장 4조에 의하면 권고사직함이(서면으로) 가하오며”라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김필수의 목사로서의 생애는 종결되었다. 아마도 서울에서 다양한 연합기관에서 일하며 그의 생각이 바뀌고, 음주 등 생활이 다소 자유롭게 된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 회원에게 엄격한 금주 규칙을 강제하고, 목사로서 노회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한국 장로회 치리회와의 어느 정도 갈등은 불가피했다.
【1948년】
- 일제말기 완전히 은퇴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 30일 별세하였다.
【김필수에 대한 평가】
- 남장로회 소속으로 목포 정명여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초기 남장로회 한국선교회 역사서를 쓰기도 한 애너벨 니스벳(Anabel Major Nisbet, 유애나, 1869-1920)은 김필수를 “학식 있는 사람”이자, “전 교회에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 예수교서회에서 김필수와 함께 번역 및 출판사업에 종사한 학구적인 선교사 윌리엄 클락(William M. Clark, 강운림, 1881-1965)도 동역자를 소개하는 글에서 김필수를 “한국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즉 지위와 평판이 높고, 존경받는 인물로 묘사했다.
- 1948년부터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를 맡은 김춘배는 일제 강점기에 목사로서는 최고인 문필가 두 사람으로 장로교의 김필수와 감리교의 최병헌을 회고하면서, 김필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기독신보는 1915년에 창간되어 1933년까지 서회가 운영하였다. 그 초대 사장 겸 편집책임자가 게일 박사였다. 초대에 그 편집을 돕던 이 중에 이름을 떨친 이가 김필수 목사이다. 그는 한학에 교양이 있고 음풍영월의 시정이 풍부하고도 깨끗한 문장을 쓰던 분이다. 최병헌 목사는 나이가 김필수 목사보다 선배이지만 당시 목사로 글 쓰는 데는 이 두 분이 최고봉이 아니었던가 한다.” - 「중앙일보」 1973년 12월 6일자 기사, “일진회원 숫자풀이로 욕하는 노래 웅변가론 김필수ㆍ김일선ㆍ김창제 꼽아”를 보면, 1920년대 YMCA에는 세 사람의 웅변가가 유명했다고 하면서 “김필수는 목사이며 준학자이면서 얼큰하게 술에 취하면 더 말 잘하는 호탕한 웅변가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김필수의 『경세종』에 대하여】
- 1908년 10월, 출판사 광학서포에서 간행된 『경세종』은 제목 그대로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쓴 계몽소설이었다. “이 작품은 금수ㆍ곤충 등을 내세워 인간사회의 추악상을 비판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의도를 두고 있다. 이 작품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더불어 개화기 우화소설 계열에 속하는 풍자적 작룸이다”라는 평가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지식인으로서 우화라는 수단으로 민중을 계몽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아멘’이 등장하는 등, 기독교 용어도 숨김없이 등장한다. 당시 이 작품은 일간신문 광고에 지속적으로 실릴 만큼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 광학서포(廣學書鋪)는 윤치호, 이상설 등이 1906년 4월에 문명개화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출판사였다. 대표적인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루』와 『귀의성(상)』, 신채호가 번역한 『이태리건국삼걸전』,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등의 애국계몽 소설이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 ‘세상을 깨우치는 종’이라는 뜻의 ‘경세종’은 원래 정동제일교회에 세워진 종 이름이다. 이 종은 1902년 불의의 해난 사고를 당해 순직한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이자 정동제일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아펜젤러 선교사를 추모하기 위해 순직 5주년을 맞은 1907년에 만들어 세웠다.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최병헌 목사가 발의해 교인들이 모은 성금으로 미국에서 만들어 들여온 이 종은 미국 독립을 상징하는 필라델피아의 ‘자유의 종’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종의 이름은 상동교회와 함께 애국독립 운동의 본거지로서 지사들이 모여 항일의지를 불태우고 시민들의 애국정신을 일깨우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정동교회의 상징성을 함축한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경세종은 지금도 정동교회 안의 문화재교회에 보존되어 있으나 1990년 이후 사용이 중단되었다.
- 소설은 춘흥을 못 이겨 산에 오른 한 사람과 그를 속이려고 접근한 풍수들이 만나 함께 엿본 금수와 곤충들의 친목회 장면이 이야기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교회 안팎의 도덕적 일탈과 무지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통한 문명화만이 날로 쇠퇴해가는 국권을 지켜낼 수 있다는 기독교 민족주의 의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미국이 개국 130여 년 만에 세계 최고의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미국 사람들의 철저한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면서 올빼미의 입을 통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 “완고니 수구니 하는 자들이 실로 답답해요. 이 세계를 비교하여 보면 몇백 년 전에 유럽이나 아메리카나 다 캄캄한 밤과 같이 문명치 못하고 그 때에 아세아는 낮과 같이 문명한 빛이 있더니 지금은 유럽과 아메리카는 광명한 낮이 되고 먼저 문명하던 아세아는 도리어 광명한 빛이 있으나 보지도 못하고… 백인종들이 종교의 힘으로 교육하여 저렇듯 강성한 것이올시다마는 문명의 열매 되는 각종 기계와 물건은 취하여 가지나 문명의 근본 된 그 종교는 알아볼 생각도 없는 고로 눈이 있어도 마땅히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일향 저 모양으로 지내면 백인종의 노예 되기는 우리가 눈 깜짝할 동안 될 것인 줄 확실히 아나이다.”
- 서양 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우리도 그들과 같은 부강한 국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필수는 나라의 부강이 한두 사람의 빼어난 영웅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은 아니라, 백성 모두의 도덕성 회복, 기독교 문명화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 『경세종』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세차게 타올랐던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어 1907년 1월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기독교 대부흥운동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교회 성장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한국교회 고유의 성격을 특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회개-죄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대부흥운동’이라는 말 대신 ‘대각성운동’이라 불리기도 하며, 평양에서 특히 뜨겁게 달아올라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각성운동이 가장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1907년, 김필수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평양에서는 그해 5월, 신학생들을 위한 특별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김필수는 대각성운동의 현장 한가운데서 이를 직접 체험한 것이다.
- 작가의 눈에 비친 현실 사회는 심각한 도덕적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 문명은 어두워 낡은 인습에 젖어 살면서도 모두들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의무를 망각한 채 이기적인 욕망에만 얽매여 살기 때문이다. 금수와 곤충들의 모임이 기독교 신앙공동체임을 미루어 볼 때 『경세종』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실 사회의 온갖 병적 징후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또한 기독교가 문명의 핵심이며, 불교나 유교는 더 이상 문명의 진보를 견인할 수 없다는 견해도 드러나 있다.
- 『경세종』은 우리 근대소설사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드러낸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김필수는 기독교 문명화를 통한 도덕성 회복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본보기를 미국에서 찾고 있다. “북아메리카에 ‘합중국’이 있는데, 그 나라는 서력 일천칠백십육 년 칠월 사일에 독립국이 되었는데, 한 달에 네 날씩, 일 년에 오십이 일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전국에 세상일은 쉬고 하나님께 예배하나니, 지금 개국한지 일백삼십이 년쯤 되매 일 년에 오십이 일씩 계산하면 육천팔백육십사 일을 전혀 논 것 같으되, 그 나라 부강은 귀 있는 자들이 들었을 것이오.”
- 『경세종』은 기독교 전교를 의도한 호교론적 바탕 위에 쓰인 것이지만, 맹목적인 호교론적 차원의 소설이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전제된 기독교 전교 소설이다.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작품에서 강조되고 있는 도덕성의 회복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 개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사회윤리 개념이다. 작품에 드러난 사회비판 의식이 역사적・사회적 맥락 위에서 보다 깊이 있게 성찰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양반들의 가렴주구와 외세 침탈 등에 의해 민중들이 절대빈곤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현실을 지나친 채, 여자들의 매춘을 개인의 도덕적 타락 행위로 이해하거나, 아기를 낳아 버리는 악습을 비판하면서 ‘과부재가금지법’이나 시비하는 것 등이다.
- 이것은 기독교 대각성운동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일제 식민주의자들을 미워한 죄까지 회개하면서, 식민지 현실을 한국인 자신의 죗값으로 이해하거나 한국인들의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으로 해석할 정도였다. 과거를 꿈꾸던 선비 출신 김필수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나라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개화파 혁명가들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망명객의 신세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그의 인식의 자장 안에 든 조선의 현실은 혁명이 필요한 사회였고, 기독교인이 되어 바라본 그것은 무지와 죄악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기독교 문명화만이 유일한 활로라고 믿어 목사가 되는 길에 들어섰을 때, 평양을 중심으로 불타오른 대각성운동을 현장에서 체험했다.
- 그리고 ‘세상을 깨우는 종’, 『경세종』을 써서 스스로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건국 132년 만에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를 이룬 미국의 힘이 기독교 문명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세종』은 기독교 전교를 의도한 호교론적 바탕 위에 쓰인 것이지만, 맹목적인 호교론적 차원의 소설이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전제된 기독교 전교 소설이다.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작품에서 강조되고 있는 도덕성의 회복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 개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사회윤리 개념이다.
- 『경세종』은 일차적으로 초기 기독교 지식인들의 기독교 인식 방법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자료이나, 김필수와 그의 기독교 사상의 연원을 밝히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근대소설 또는 기독교 소설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독교대백과사전
- 「중앙일보」 1973년 12월 6일자 기사, “일진회원 숫자풀이로 욕하는 노래 웅변가론 김필수ㆍ김일선ㆍ김창제 꼽아”
- “기독교 문명화의 길 – 김필수의 『경세종』”, 『기독교사상』 2020년 3월호
- 박정규, “제4회 총회장 김필수(金弼秀) 목사”, 『교회연합신문』 2016년 2월 4일자.
- 전택부, “추강 김필수 목사,” 『청년』(1971년 5월 3일), 2.
- 이재근 (2019).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의 생애와 유산 : 목회자, 기독 사회운동가, 문필가. 한국기독교와 역사, (51), 75-112.
- 김수진, 『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 총회장 88인 열전』(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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