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일요일

신석기 혁명 - 정주생활을 가져온 인류 최초의 혁명 [기원전 8000년경]

신석기 혁명 - 정주생활을 가져온 인류 최초의 혁명

 
신석기 혁명의 핵심 내용은 정주생활을 가능케 한 농업 혁명이다. 기원전 8000년쯤부터 인류는 정착생활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식량을 저장하기 위한 토기를 사용했고,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다. 농기구 수준도 한 단계 높아졌다. 그 전까지는 뗀석기를 사용했으나 이때부터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나 호미, 도끼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썼다.
 
신석기 농업 혁명은 지금까지의 혁명들과는 달리 매우 점진적으로 진행된 사건이다. 신석기 혁명은 사회 전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이었지만 그것은 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진행되었다. 신석기 혁명이 이룩되는 데는 수천 년이나 걸렸다.
 
신석기 시대 농업 혁명은 인류가 생활하고 있던 곳곳에서 일어났다. 각 지역마다 처한 자연환경과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미국의 동양학자 제임스 헨리 브리스테드(J. H. Brestead, 1865~1935)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이 밖에도 중국의 황하강 유역과 양자강 유역, 멕시코 중부, 콜럼비아에서 페루를 거쳐 칠레 북부에 이르는 안데스 고원 지대,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도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농업 혁명은 인간이 농작물을 지배하고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기를 수 있게 되면서 가능했다. 각 지역마다 지형과 기후가 다르고 이용할 수 있는 동물이 달랐지만 이러한 원칙만은 동일했다.
 
온순하고 덩치도 적당한 동물들이 인간과 더불어 가깝게 살아남아서 개량되었다. 식물 또한 마찬가지다. 재배하는 과정에서 알갱이가 튼실하고 수량이 많은 것을 주로 골라 심었을 것이므로 우량종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주거지는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농업이 따랐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촌락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최초의 촌락 가운데 하나는 에리코에서 북쪽으로 2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의 고대도시 예리코 유적지, 20층으로 쌓인 후대의 정주지 밑에서 기원전 8000년경 최소한 3백 명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촌락의 잔해가 발굴되었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호수로 흘러드는 샘물가에 진흙벽돌로 집을 짓고, 무화과, 두 종류의 밀, 두 종류의 보리를 재배하면서 돌칼 낫으로 수확하고 살았다. 또한 그들은 주변의 야생 양과 가젤을 사냥하며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인류 최초의 농업과 목축업 지대

 
예리코는 지금까지 발겨된 석기 시대의 촌락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곳이다. 예리코와 비슷한 시기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도 그와 비슷한 촌락이 존재했다. 고고학자들은 그것을 레반트 회랑 지대라고 부른다. 지금은 이 지역이 황폐해졌지만 당시에는 강우량이 풍부하고 농사를 짓기에 좋은 기후 조건이었다. 그곳은 짙푸른 수목이 우거져 사냥감도 널리 있었다. 기원전 1만년경 시리아에는 코끼리가 살고 있었으니까.
 
당시 터키 남부 지방에서는 야생 보리와 밀 같은 곡식이 자랐고, 요르단 계곡에서는 밀의 일종인 에머밀이 자라고 있었다. 기원을 따져보면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밀, 보리는 모두 이 지역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9500년경 야생식물을 수확한 증거가 확인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야생 곡물을 조작해서 인간이 재배하는 작물로 만드는 과정에 걸리는 기간을 3백년 정도로 본다. 석기 시대 인류는 몇 세대에 걸쳐 인내심을 갖고 품종 개량을 거듭해 마침내 야생곡물을 작물화하는 데 성공한다. 농업의 발달은 야생곡물을 식용 재배 작물로 만드는 것에 의해 좌우되었다. 반면 축산업의 발달은 가축화하기에 적합한 동물의 원활한 공급에 달려 있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는 양순하면서도 동작이 느려 잡기에 좋은 동물이 많았다. , 염소, 소가 그런 동물이었다.
 
최초로 농업 정주지가 만들어지고 곡물의 작물화가 이뤄진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서쪽 끝부분이었다. 그러나 밭작물과 가축, 그러니까 농업과 목축업의 혼합 농업체계가 처음 등장한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쪽 끝부분이었다. 기원전 7000년경 것으로 보이는 이란 중서부 간즈다레 유적에서 가축으로 기르고 보리를 작물로 재배한 증거가 나타났다.
 

처음 벼농사가 시작된 중국 양자강 유역

 
중국 중부 지역 양자강 유역에서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는 또 다른 농업이 출현했다. 기원전 12천년경 야생벼를 채집한 증거가 유적 속에 남아 있다. 벼에게 필요한 물은 양자강 유역에서 차고 넘쳤으므로 이 야생 벼들을 개량하고 이것들이 자랄 수 있도록 두렁을 만들어 물을 가두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벼농사가 처음으로 시작된다.
 
양자강 유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촌락의 흔적은 기원전 6000년 무렵의 것이다. 양자강과 황하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은 배와 기장을 곡물로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들을 가축화하여 정주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된다. 기원전 5000년 무렵에는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농업과 더불어 닭과 돼지를 축사에서 기르며 생활하게 되었다.
 

분업과 함께 계급이 발생하다

 
농업 혁명은 정주생활을 위한 농업과 축산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무엇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을 많이 낳았다.
 
사람들은 이제 수를 계산할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수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덧셈, 뺄셈이 필요했다. 토기도 새로운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든 물건과 바꾸기 위해서도 식량을 생산했다. 그것은 또 다시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의 바람을 몰고왔다.
 
이 시대 신석기 사회는 분업과 더불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계급의 발생으로 연결되었다.
 
가족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신석기 시대 농업 혁명을 거치면서 부족 집단은 씨족으로 분화되었다. 같은 씨족 내에서는 혼인을 맺지 않았다. 사유재산의 발생은 사회를 남성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가족 내에서 남성의 파워를 확대했다. 남성과 여성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권력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외부의 약탈자들로부터 농작물과 가축, 그리고 가족과 씨족, 나아가 부족 전체를 보호할 조직이 필요했다. 거기서 정치권력이 생겨났다. 농업 활동에서는 폭력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새로운 농업자원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폭력 전쟁이 시작된다.
 
신석기 혁명을 통해 인류 역사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정착생활, 인구증가, 농업 생산력의 증개돠 잉여생산물 축적, 돌과 함께 금속의 이용, 상업과 예술의 발전, 제사장과 신전 등 하늘과 통하는 원시적 종교 의식, 약탈 전쟁의 시작, 사유재산과 계급의 발생, 가족의 등장, 그리고 도시의 발전... 그리고 문명의 발전과 함께 국가가 등장하고 고대 사회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1 - 고대편 I, 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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