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하는 것은 약 15만 년 전이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이 현생인류는 40만 년 내지 50만 년 전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亞種)으로 보고 있다. ‘아종’이란 생물들이 발생적으로 어느 정도 가까운지를 나타내거나 진화의 계통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는 생물 분류 단계의 하나이다. 종의 아래 단계이고 변종의 위 단계에 속한다. 종으로 독립할 만큼 차이가 크지는 않지만 변종으로 보기에는 다른 점이 많은 한 무리의 생물을 말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호모 사피엔스에서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진화해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지역설과 아프리카 지역설이 있다. 여러 지역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지역에 존재했던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 인류가 진화해 나온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아프리카 기원설은 15만 년 전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은 아프리가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근거로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으며, 이들이 서아시아, 동아시아, 유럽 등으로 이동하여 각 지역에 살고 있던 기존의 인류를 대체하여 오늘날 현생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현재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다수설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는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처음 등장해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아시아와 유럽 등지로 이동했다. 이들은 대체로 6~7만년 전에는 서아시아 지역에, 약 5만년 전에는 동아시아에, 약 4만년 전에는 유럽 지역으로 이동해서 빙하가 없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살았다. 또한 이들은 2만 5천년 전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여 북쪽 지역에서 살았다. 이때는 대륙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약 1만 2천년 전 빙하기로 바다가 얼어붙으면서 다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연결하는 길이 열렸고, 이때 대륙을 건넌 인류는 보다 남쪽으로 진출했다.
현생인류의 이동에서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은 적절한 기후조건, 인구밀도의 증가, 낯선환경에 대한 적응력 등이었다. 이들은 더 오래 견딜 수 있는 주거형태를 개발했고, 따뜻한 옷을 지었으며, 나무나 뼈로 만든 손잡이를 끼울 수 있는 작은 돌칼 등의 도구를 제작했다. 이들과는 계통이 다르지만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인류로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다. 인류학적으로 이들은 전 시대의 인류에 비해 현대인류에 매우 근접하고 있다. 하지만, 뇌 용량이라든지 두개골 모양이 여전히 현대인과 다르기 때문에 고생인류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처음에는 유사성에 주목하여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으로 여겼으나 최근에는 미토콘드리아 분석 결과 관련성이 없다는 쪽이 우세한 상황이다. 네안데르탈인은 20만~3만년 전에 유럽과 서아시아 전역에 살았으나 멸종되어 현생인류로 연결되지 못했다. 3만 5천년~1만년 전에 유럽 지중해 지역에 살았던 화석인류 크로마뇽인은 호모 사피엔스에 가까운 것으로 확인되지만 이들의 계통이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언어능력과 큰 두뇌를 가진 현생인류
그러면 15만~1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 살았던 이 현생인류는 어떻게 생활했을까? 그들은 옷도 입고 있었고, 제법 그럴듯하게 치장도 했다. 오늘날 프랑스 면적의 두 배 정도 크기의 동아시아 일대에 산 사람들의 수는 약 1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드넓은 지역에 띄엄띄엄 산재해 살고 있던 1만여 명이 오늘날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70억명의 직계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20명 혹은 30명 정도의 가족 단위로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들이 먹은 주식 또한 채소처럼 땅에서 나는 것들이었다. 육류는 작은 짐승을 잡아먹거나 사자나 표범 같은 육식동물들이 먹다 남긴 것을 섭취했다.
그러나 현생인류는 다른 영장류에 비해 주위 환경과 자신들의 삶을 통제하는 틍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그들은 현대인과 비슷한 1500~1600cc의 큰 뇌 용량을 가졌다. 따라서 그들은 제법 복잡한 방식의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 덕분에 식용가능한 식물에 대한 정보도 쉽게 공유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무더운 날씨도 인간이 사는 데 좋은 환경조건이 되었다. 다른 포유류 동물들은 심하게 땀을 흘리다가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사냥의 수확을 손쉽게 거둘 수도 있었다.
인간의 언어능력과 큰 두뇌는 무리생활과 사냥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아니라 현대의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인간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낼 수도 있었다. 언어는 앞선 세대의 경험과 지식을 후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인간은 불과 같은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따뜻한 생활도 유지할 수 있었고, 음식을 익혀먹을 수도 있었다.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로 확산되다
아프리카 대륙은 대부분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곳을 벗어나기 힘든 지형이지만, 홍해 유역을 통해서 아프리카는 아시아와 만날 수 있다. 현생인류가 최초로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대략 6~7만년 전이었다. 아시아 남동쪽으로 이동한 무리 가운데 일부는 해안을 따라서 지금의 동남아시아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동했다. 그곳에서 5만년이나 된 그들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그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해수면이 아무리 낮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여정에는 때로는 50킬로미터가 넘는 바다를 건너는 일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때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간 현생인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 뒤 또 다른 무리가 바다를 건너려고 했을 때는 빙하가 녹아내려 많은 육지들이 바다에 잠겼다. 그 때문에 바다를 건너 그곳에 가는 것은 무리였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먼 훗날 인간의 항해술이 발달한 뒤에야 비로소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생인류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이전 수백만 년의 세월을 거쳐서 원시인들이 진화를 이루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그 시간은 아주 순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생인류가 서남아시아와 유럽 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4만 년 경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네안데르탈인이 존재를 감추기 시작하는 기원전 3만 년경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강인하고 지적 능력도 있었으나 빙하기 날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3만 5천년 전 무렵에 사라지고 말았다. 현생인류는 원시의 자연에서 채집,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얻는 데 네안데르탈인보다 앞선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정교한 언어를 구사해 복잡한 생각을 전달하고 발전된 도구를 제작, 사용할 수 있었던 현생인류는 오랫동안 거주할 주거지를 마련하고 옷감을 짰다. 이를 바탕으로 점점 추워지는 대륙의 날씨에도 훨씬 나은 생존력을 지닐 수 있었다.
2003년 오스트리아 학술팀은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의 한 석회동굴에서 피그미 인간의 화석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라는 종명과 더불어 톨킨의 소설에 나오는 소인족의 이름 ‘호빗’을 별칭으로 붙여주었다. 호빗족은 대략 기원전 7만 년 전부터 1만 2천년까지 그 동굴을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직 화석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 무렵 지구상에는 또 다른 종들이 존재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이동을 마무리하고 변화를 준비하는 인류
인간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그 수도 점차 늘어났다. 3만년 전 세계 인구는 대략 50만 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가운데 물가에 자리를 잡고 산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수렵채집생활을 했다. 그들은 주변 식량자원이 고갈되면 다시 다른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으며, 주로 수렵보다는 채집을 하며 살았다. 우리가 구석기 시대 생계를 책임지는 임무가 남성의 수렵에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채집에 의존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이 더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남성의 역할이 커지는 것은 그 다음 수렵이 중심을 이루면서부터다. 이 무렵의 인간들은 바구니를 짜고 팔찌와 목걸이를 착용했으며 상아조각품을 만들었다.
3만년 전의 인류는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은 가족집단이나 무리 생활을 했다. 그들이 남긴 도구나 물건을 보면 상당히 먼 거리까지 교역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현재의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모여 친목 모임을 갖고 노래와 춤, 만담을 즐기며 놀았다. 장마가 지는 곳에서는 몇 주씩 물 웅덩이 주변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석기 시대의 인류가 지구상의 거의 전역으로 이동하는 데는 1만 5천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속에는 마지막 빙하기가 극에 달해 인간의 생존 자체가 힘들었던 기원전 2만 8000년에서 2만 5000년까지의 기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1만 8000년경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오늘날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까지 진출했다. 인간이 아메리카 대륙에 먼제 건너갔는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기원전 1만 3000년경에는 시베리아와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와 북아메리카 지역에 들어간 것이 확실하다. 또한 기원전 6000년이 되기 전에 인류는 남아메리카의 끝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의 이동은 마침내 기원전 6000년경,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8천년 전에 마무리 되었다. 기원전 6000년경 인간은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아시아와 남북아메리카, 그리고 유럽에 이르기까지 인구의 이주망을 형성했다. 그 무렵 세계 인구는 1천만 명을 헤아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류는 기원전 1만 5천년경에는 활과 화살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사냥 기술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보여주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착생활도 시작되고 있었다. 기원전 1만 년경부터는 토기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토기는 음식과 가공과 식량의 저장을 위해 필수적인 도구였다. 그러나 지구상의 인류가 어떤 음식물을 섭취하고 어떤 도구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20~30명의 어른들과 몇 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소규모 무리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직 영구정착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이동생활에서 많은 아이들은 생존에 위협이 되었다. 맹수들의 습격에서 무리를 지켜야 했고, 식량 수급도 문제였다. 그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유아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3만년 전 50만명 정도였던 인구는 기원전 6000년경에는 1천만 명으로 20배 이상 늘어났다.
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1 - 고대편 I』, 26-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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