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 문명의 대표 도시 우루크
수메르 문명의 진정한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은 우르크(Uruk)다. 우루크의 유적을 처음 찾아낸 것은 영국인 탐험가 윌리엄 롭투스다. 그는 1849년 겨울 소규모 탐사대를 이끌고 바그다드를 출발, 이라크 남부의 광야로 향했다.
롭투스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에렉(Erech)이라고 소개한 우루크란 고대 도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간이 살았다는 흔적은 거의 30미터나 아래쪽에 묻혀 있었다. 롭투스는 그곳에서 1천 년 동안 번성했던 문명의 자취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문명이 그리스와 파르티아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그곳을 차레로 지배할 때에도 계속되었다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토기와 동전, 부장품, 문자화된 기록을 통해 그런 사실을 남겨두었다.
지구라트 꼭대기에 올라서면 우루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거의 10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이 둥그렇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기원전 4000년 이전에는 이곳에 겨우 두 군데의 정착지가 있었으나 그 이후 1천년 동안 규모있는 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성벽은 훨씬 나중에, 그러니까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2700년경 사이에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네 번에 걸쳐 비약적 발전을 마무리하던 시기에야 세워졌다.
우루크는 성벽이 세워질 무렵에는 면적이 약 5.5평방킬로미터였고, 최대로 팽창했을 때는 대략 2.5x3킬로미터 규모의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모양이었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인구밀도는 1천 평방미터당 1백~2백 명이었으며, 총 인구는 2만 7천 5백~5만 5천명 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우르의 도심 구역은 면적 40헥타르에 인구 2만 4천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약 10평방킬로미터 면적의 주변 지대에는 50만 명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라가시에 인접한 기르수(Girsu)는 남자가 3만 6천 명이었다는 것으로 봐서 총 인구가 8~10만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것은 기원전 500년경 면적이 2.5평방킬로미터였던 아테네, 예수 시대인 기원전후 시기에 면적이 겨우 1평방킬로미터에 불과했던 예루살렘과 크게 대비된다. 우루크보다 3천 년이나 후대에 속하는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로마도 우루크의 두 배 밖에 되지 않았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우루크
“우루크의 성벽을 보아라! 잘 닦은 청동처럼 빛나지 않는가. 성벽의 안을 보아라. 세상의 누구도 똑같이 흉내낼 수 없으리라! 우루크의 성벽에 올라 걸어 보아라. 그 기단을 살펴보아라. 정교하게 쌓아진 벽돌들을 보아라. 가마불에 구워진 벽돌 속까지도 꼼꼼히 살펴보아라. 일곱 현인이 그 성벽을 설계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전설을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대목의 일부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19세기 서남아시아 지방을 탐사하던 고고학자들이 수메르의 고대 도시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보다 1천 7백년이나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메르 왕 명부’에 따르면 길가메시(수메르어 이름은 빌가메시)는 기원전 28세기경 우루크를 126년 동안 지배한 왕이었다.
고고학적 발굴과 『길가메시 서사시』 등을 참고하면 초기 도시 구역이 보통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자체의 성벽을 가진 도심이 있는데, 그 내부에는 도시에서 섬기는 신들의 사원, 지배자, 행정관, 종교 지도자의 집들과 수많은 일반 주택들이 있다. 다음으로 도심을 벗어나면 주택, 공원, 축사 등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구역이 나온다. 마짐가은 상업 중심지다. ‘하버’(habour)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육로 통상이 이루어지고 토착 상인과 외국 상인이 사는 곳이다. 도시 명칭은 대개 외관에 따라 정해진다.
초기 도시에서의 신전의 중요성
초기 도시에서는 신전을 중심으로 생활이 전개되었다.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은 사회의 최상층이었다. 에리두와 우루크의 신전의 기단이 있는 것은 그런 건물을 지을 만큼 공공 조직이 충분히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전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초기 도시의 경제생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라가시의 여신인 바바(혹은 바우)의 신전에는 기원전 2400년 직후 신전이 보유한 토지의 면적이 2.5평방킬로미터를 넘는다는 기록이 있다. 이 토지는 온갖 종류의 농업에 이용되었으며, 신전에서 일하는 1천 2백 명을 부양하는 데 필요했다. 신전에는 제빵공, 양조공, 양모공, 방적공, 방직공, 나아가 노예와 관리까지 다양한 기술자들이 있었다. 소작농부는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과 신전의 관계는 초기 봉건제의 형태를 취했던 것 같다. 이외에도 이발사, 보석상, 금속 기술자, 의상업자, 피복상인, 세탁부, 벽돌 제조공, 정원사, 나룻배 사공, ‘노래를 파는 사람’, 화가 등 수많은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지금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문가는 필경사였다. 그들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내용을 점토판에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1 - 고대편 I』, 97-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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