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미션 필드, The Korea Mission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는 1905년 11월에 창간되어 1941년 11월에 폐간되기까지 국내에서 선교사들이 발행한 영문 월간잡지이다. 한국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선교현장에 대한 정보를 교환할 목적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은 한국 교회 역사를 비롯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종교 전반에 관한 문헌으로서 한국 근세사 연구의 필수적 사료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가 창간되기 이전에 국내에서 발행되던 정기 영문 간행물은 두 종류가 있었다. 1901년 11월에 창간되어 계간으로 발행되던 〈The Korea Field〉가 그 하나이고, 1904년 11월에 창간되어 월간으로 발행되던 〈The Korea Methodist〉가 다른 하나이다.
〈The Korea Field〉는 북장로교 선교사 빈튼(C. C. Vinton)이 발행ㆍ편집을 맡았던 것으로 당시 그는 대한성교서회(大韓聖敎書會, 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오늘날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의 총무로 봉직하고 있었다. 빈튼은 국내 선교를 추진하고 있던 4개의 해외선교부, 즉 미국북장로회, 미국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선교부의 활동 보고서들을 중심으로 한국내 장로회 선교사항을 정리하여 발행하였다.
그리고 〈The Korea Methodist〉는 국내에 진출하여 활동하던 미국의 두 감리회, 즉 미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와 남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선교부가 합동으로 간행하던 것으로 발행인은 존스(G. H. Jones)였고 편집은 하보(S. B. Harbaugh), 재정실무는 벡크(S. A. Beck)가 맡았다.
국내에 진출한 장ㆍ감 양교파(장로교 4개 선교부와 감리교의 2개 선교부)는 선교지역 분할 및 공동 선교 협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동협의체를 구성하였는데 그것이 1905년 9월 15일에 조직된 ‘재한복음주의선교회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이다. 초대 의장에는 언더우드가 서기겸 회계에는 벙커(D. A. Bunker)가 각각 선출되어 선교 공동사업을 추진해 나갔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울과 평양에서의 교파통합 학교 운영, 병원 사업 등이었으며, 그 사업 중 하나가 공의회 기관지로서 통합된 영문 잡지를 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종래에 장ㆍ감 양 교파에서 발행되던 〈The Korea Field〉와 〈The Korea Methodist〉가 통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따라 〈The Korea Field〉는 1905년 8월호에, 〈The Korea Methodist〉는 1905년 10월호에 각각 폐간사를 내고 1905년 11월에 통합된 기관지로서 〈The Korea Mission Field〉가 탄생되기에 이른 것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는 창간 당시부터 1917년 12월까지는 국판으로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후쿠인(福音)인쇄소에서, 1918년 1월부터 폐간될 때까지는 4X6배판으로 서울의 YMCA에서 인쇄되었다.
독자는 주한 외국인 선교사 뿐 아니라 본국(주로 미국)에 있는 교인들로 이루어졌다. 즉 발행의 목적이 국내 주재 선교사들의 선교업적 평가 및 정보교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국 교회에 한국 선교상황을 소개하여 한국 선교사업에 지원을 얻고자 하는 데도 있었다.
발행의 책임은 원칙적으로 재한복음주의선교회공의회(1911년 재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회, 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로 개칭)에 있었으나 그 실무적인 일은 대한성교서회(후에 조선예수교서회)가 맡았다.
창간 당시 편집 책임은 〈The Korea Field〉 편집도 맡았던 빈튼과 〈The Korea Methodist〉 편집을 맡았던 하보 두 사람이 공동 편집인이 되어 맡았으나 1906년부터는 언더우드(L. H. Underwood) 부인이 편집주간이 되어 1914년까지 수고하였다. 1914년부터 1927년 4월까지는 디캠프(A. F. DeCamp)가, 1927년 5월부터 1934년 12월까지는 와그너(E. Wagner)가, 1935년 1월부터 1941년 4월까지는 로스(H. A. Rhodes)가, 1941년 5월부터 그해 11월 폐간될 때까지는 쿤스(E. W. Koons)가 각각 편집주간으로 편집 실무를 맡아 수고하였다.
이 잡지는 연평균 12,000부가 발행되었고, 정기구독자가 1천 명 정도로 한국 내 선교사들 사이에서 그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특히 선교 현장에 대해 선교사들 스스로 기록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글 주간신문과 영문 월간잡지를 합하여 그 정보를 종합하면 당시 한국의 선교 상황과 교회성장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 : 『The Korea Mission Field 호별목차집』,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편,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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