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윤병구(尹炳求, 1880-1949) - 감리교 목사, 하와이 신민회 조직(1904),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역임

윤병구(尹炳求, 1880-1949)

 
감리교 목회자. 일제 강점기 때 하와이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880
 
  • 18801222: 경기도 양주 출신. 어릴 적 부모가 사망하여 고모에게 입양되어 우병길(禹炳吉)로 개명했다가 하와이 이민 후 1904년 말경에 다시 윤병구로 고쳤다.
 
1897
 
  • 1897년까지 배재학당에 다녔고 그 해 한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1899
 
  • 1899,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 1899년 호머 헐버트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조지 H. 존스(George H. Jones. 18671919)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얼마 후 오아영(Agnes Oh)과 결혼하였고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였다.
 
1901
 
  • 1901년부터 인천지방 감리교선교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안정수와 함께 인천 영화학교(永化學校)에서 4, 5개월 가르쳤다.
 
1902
 
  • 1902, 콜리어(Charles T. Collyer, 高永福) 목사의 요청으로 개성 남감리교 교회서 사무를 도우면서 그 해 개교한 호수돈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3
 
  • 1903: 하와이로 이민간 동포들이 목사 파송을 한국에 요청함에 따라 1903105, 부인과 2개월 된 아들을 두고 홀로 하와이에 왔다. (부인과 아들 조슈아 윤(Joshua Yoon)1904330,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 1903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감리교인 홍승하ㆍ박윤섭ㆍ문홍섭ㆍ임치성ㆍ임형주ㆍ김정극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04
 
  • 19044, 하와이 이주 교포들을 상대로 불법적인 인민세를 징수하려는 주 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 투쟁을 벌여 한인들의 권익 옹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 그리고 하와이 오아후 섬의 에와 농장에서 정원명ㆍ김성구ㆍ이만춘ㆍ김규섭ㆍ강영소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기존 신민회를 해체한 후,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에와친목회를 발족시키고 정원명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신민회의 정신을 잇는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05
 
  • 1905년 오아후섬에서 시사신보를 창간하여 재미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감리사 와드맨(Wadman)을 도와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설립 및 확장에 전력을 기울였다.
  • 430일에는 에와예배당(담임 김영식) 헌당예배에서 교인을 대표하여 교회당 건축 경비를 담당해준 농장 관리인 렌톤(George F. Renton)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 1905719일에 뉴햄프셔 포츠머스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주관으로 열린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 그가 떠나기 전 와드맨 감리사는 712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태프트(William H. Taft) 미 국방장관에게 윤병구를 소개해 주었고, 태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윤병구를 맞이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써 주었다. 이에 앞서 하와이 한인들은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윤병구를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선정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청원서와 $500을 모금하여 주었다. 731일에 워싱턴에 도착한 윤병구는 이승만과 만나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서재필을 찾아가 함께 청원서 문장을 다듬었다. 83일에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들고 뉴욕 롱 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 소재 하계 백악관을 찾아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들을 맞이했으나, 청원서는 정식 외교채널을 통해 제출하면 강화회의에 내놓겠다고 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와 한국공사관의 김윤정에게 조치를 취하자고 했으나, 김윤정은 본국의 훈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청원서는 강화회의에 제출되지 못했고 윤병구는 1017일에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1907
 
  • 1907년 연회가 열리기 전 222일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상항으로 떠나 227일에 도착하였다. 곧 하버드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하여 321일에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다니지는 않았다. 상항 한인감리교회(19057월 설립)에 출석하다가, 8월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이상설, 이위종, 이준의 활동에 합류하였다.
  • 190793, 헤이그의 국제기자협회를 상대로 일본의 국권 강탈을 규탄하고 한국 독립을 호소하여 해조신문에 소개되었다.
 
1908
 
  • 19083, 박용만(朴容萬)ㆍ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해 그 해 7월 개최된 미국 민주당전당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 1908710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한인 국제회의를 주최하였다. 윤병구는 이를 위해 영국에 건너가 거기 살고있는 소수의 한인들에게 적극적인 애국 운동 참여와 지원을 권고하였다. 이승만은 의장으로서 개회사를 했고, 윤병구는 영문 서기를 맡았으며 개회식에서 동양에 대한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09
 
  • 190912월부터 19111월까지 상항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윤병구의 부인과 자녀들은 2년 반 후인 1909108일에 상항에 도착하여 윤병구와 합류하여다.
 
1912
 
  • 191211,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국민회 첫 중앙대의회를 개최할 때 박상하(朴相夏)ㆍ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지방 대표로 참가해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선발된 12인의 대표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헌장(憲章)을 제정하고 세금과 의무금 수납제를 규정하였다.
 
1919
 
  • 19194월의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에서는 송헌주ㆍ김호(金乎)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연합국의 강화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1920
 
  • 1920, 다시 안창호의 후임으로 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 회장에 취임하여, 부회장으로 당선된 백일규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 재정을 도왔다. (그러나 1921년 이 회는 자금난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29
 
  • 1929년부터 1936년까지 뉴욕 한인감리교회 제3대 목회자로 시무하였다.
 
1931
 
  • 19311213, 뉴욕 한인교회에 대학생들이 재미조선문화회를 설립할 때 그는 이사로서 후원하였다.
 
1943
 
  • 19431, LA에서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만들어 2차 대전에 미군으로 출정하는 한인 가족을 도우며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사람과 그 가족들을 후원하였다. 영문 월간지 The Star Exponent를 발간하여 한인 2세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국 사회에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렸다.
 
1945
 
  • 1945년 미주지역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454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46
 
  • 19464월부터 19491월까지 캘리포니아주 리들리 한인장로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1949
 
  • 1949314일 서울에 도착한 윤병구는 군목으로 지내기 원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 윤병구는 한미간에 새 협약이 필요한 것을 인지하고, 한미협약서 초안 작성에 몰두하다가 620일에 사망하였다. 6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628일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에서 김태묵 목사의 집례로 장례예배가 있었다.
  •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와이 그리스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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