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5일 목요일

한국의 러시아정교회

한국의 러시아정교회

 
러시아정교회에서 북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표트르 대제 때부터이며, 종교적인 이유에서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 작용하여 수행되었다. 시베리아 개발의 동기가 선교확장까지 자극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대개 사제들이 아니면 수도사들이었다. 그래서 1750년까지는 캄챠카반도의 사람들이 명목상으로는 다 기독교인이 되는 발전을 기록할 수 있었다. 러시아정교회가 잠시 중국의 북경에서 선교하기는 하였지만 대개는 만주변경의 전란에서 붙잡힌 소련 사람들로서 그곳에까지 끌려와 그대로 정착한 본국인에 대한 영적 지도에 국한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세기 말엽 조선에는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하여 약 120여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러시아 국적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주일이면 러시아 공사 관저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정교회 사제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의 고충을 해결하기위해 189713일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했고, 그해 6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한국 선교를 명령하였다. 이에 암브로시우스 구드코 대신부, 니콜라이 알렉세예프 보제, 크라신 등으로 구성된 선교단이 1898년 러시아를 출발했으나, 당시 한ㆍ러관계가 악화되어 그 중에 니콜라이만 입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 신부의 입국 실패로 제대로 종교 행사를 가질 수 없게 되자 러시아정교회는 다시 19001월 초 두 번째 선교단을 파송하였다. 이들은 러시아공사관 안에 교당을 설치하고 2월부터 공식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한국정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899년 최초의 러시아인 선교사로 니콜라이 부제가 입국하였고 두 번째 러시아인 선교사로 크리산토스 사제가 입국하여 서울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에서 리뚜르기야(성찬예배)를 봉헌함으로써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업이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와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II세는 서로 협력하여 서울 정동(현 경향신문사 자리)에 한국에서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건축하였으며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은 서울을 중심으로 고양, 문산 등 경기도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ㆍ일전쟁,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1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업은 위축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인으로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로 서품되어 활동한 사람은 1912년에 처음으로 서품된 사재 요한 강탁 신부와 1924년에 돌아가신 사제 루가 김희춘 신부, 그리고 1950년에 납북된 사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 등 3명 뿐이다.
 
김의한 신부 납북 후 수년 동안 성직자도 없이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의 러시아 정교회 공동체는 그리스 정교회의 도움과 보호를 받다가 1956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관할로 귀속되었다. 이로써 러시아 정교회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지 59년만에 중단되었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4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그러나 정교회 자체가 본래 선교에 대한 신학이 빈약하였고, 또 교회가 비잔틴 전통에 따라서 황제교황주의의 영향 아래 국가의 수장이 곧 교회의 수장이라는 교리적 원리 때문에 선교가 제정 러시아의 국책에 구체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선교의 역사도 곧 러시아의 한국내 정치 및 외교, 군사활동과 기복을 거의 같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부진을 면할 수 없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강태용, “러시아 정교회”, 기독교사상 43(4), 1999.4, 222-228.
기독신문, [이주일의 역사] 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 2010.12.25.
서울신문, 러시아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20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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