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구세공보(救世公報) - 1909년 7월 1일 창간

구세공보(救世公報)

 
[] The War Cry.
 
190971(융희 3) 창간된 구세군 기관지. 처음에는 구세신문(救世新聞)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4951일호부터 구세공보로 개칭되었다.
 
1908101일 선교를 위해 조선에 도착한 호가드(Colonel R. Hoggard) 정령은 사역한 지 8개월 만에 구세군이 급성장하자 190971일 기관지 구세신문(救世新聞)을 창간하였다. 이는 신자들에게 구세군의 가르침과 경영을 명백히 알리고,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구세군의 선교사들이 접근할 수 없는 오지에까지 월보를 보내 사람들을 격려하고자 함이었다. 조선 구세군의 공보(Official Gazette of the Salvation Army in Korea)’가 그 목적이었다.
 
구세군 기관지의 세계적 역사를 보면 18791227일 만국본영에서 THE WAR CRY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것이 그 기원이 된다. 이후 각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발행되었는데 홍콩은 구세전보, 일본은 싸움의 소리등이다.
 
우리나라 구세공보의 창간호는 타블로이드 8면으로 당시의 예수교회보를 본따서 전부 4호 활자로 인쇄했다. 창간호에는 회개인에게 하난규칙’, ‘구세군 조직’ ‘구보(救報) 일통’, ‘구세군문답’, ‘구세군공보’, ‘구세외보’, ‘구세군대장등의 내용이 실려 구세군의 세계성이 강조되었고 이어서 동서기문’, ‘만국지리’ ‘상식문답등으로 이어져 있다.
 
19177월호부터는 救世新聞의 한문 제호에 한글 토를 달고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하였다.
 
1918부터 부인난이 생기고 1929 영어뉴스를 신설하고 서기장관 통신 청년난’, ‘여학생난’, ‘가정부인단난’, ‘사회사업난으로 고정칼럼이 설치되었다.
 
194011부터 194212까지 일본어가 혼용되었고 그후 19441월까지는 기독교 신문에 흡수되었다.
 
해방후 194951일호부터 구세군 재건후 속간하여 구세공보로 개칭되고 가로쓰기 월간 8면으로 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세공보는 구세군 기관지이며 세계 및 군국지도자인 지휘방침이 명시되고 역시 세계 및 국내의 구세군 사업과 교계의 중대사항이 보도되지만 1) 구원을 받게 하고, 2) 구원받은 자를 성결로 인도하고, 3) 봉사의 생활을 돕는 것을 주된 의지로 한다. 따라서 남에 대한 비방, 교리적 논쟁, 공상적인 소설류는 싣지 않는다. 상업광고를 일체 게재하지 않으며 유흥업소 방문 호별 심방 등으로 외부판매에 힘쓴다.
 
19213월에 구세신문 금주특집호를 발행했는데, 일반 신문이 53백부 정도를 발행하던 시절에 2만부를 발간, 철도청 당국에서 5천부를 인수하여 산하 종업원에게 분배하였다. 금주 및 절제특집호는 지금도 31절 기념으로 계속 발행되고 있으며 교계, 3부 요인, 학계, 기업인, 문인, 여성, 윤리운동가들의 문서적 성원이 크다.
 
역대 편집인은 외국사관 외에 이의춘ㆍ이건영ㆍ장형일ㆍ정하경ㆍ권성오ㆍ한광수였고 교계 월긴지로는 최장수 발행을 계속하고 있다.
 
19793월호부터는 가로쓰기로 편집되었고, 20031월호부터는 전면 칼라판으로 제작되고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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