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홍태순 [洪太順, ?~1907] 고종 황제 폐위에 분개하여 자결

홍태순(洪太順, ?~1907)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애국지사
 
1907년 당시 홍태순(洪太順)은 기독교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07720일 일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사실상 고종 황제를 강제 폐위시키자, 이에 분함을 금치 못한 홍태순은 722일 오후 4시 서울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목사로 잘못 알려진 홍태순]
 
  • 대한매일신보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홍태순을 목사’(牧師) 혹은 선교사로 표기하여 그가 기독교 목사인 것처럼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19076월 당시는 개신교 목사가 감리교에 10, 장로교에 7명 모두 17명인데 그 중에 홍태순이란 이름은 없으며 또 이때 죽은 목사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의 교회 조직과 명칭에 미숙했던 당시 언론계에서 그를 목사 혹은 선교사로 기록한 데서 온 착오였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교인이란 칭호, 대신 굳이 목사 혹은 선교사라는 칭호를 쓴 것으로 보아 당시 교회 내에서의 홍태순의 위치가 단순한 평신도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매서, 권서 혹은 조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그가 속한 교파나 교회를 밝혀줄 만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그가 거주한 경기도 양주가 북장로회 선교구역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장로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 정교(鄭喬)가 저술한 대한계년사(하권, 274)에 수록된 그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홍태순 자살, 태순은 양주(경기도에 속한 고을로 경성에서 50리 거리) 사람으로 예수신교(耶蘇新敎)에 들어간 후 그 목사(牧師 선교자의 칭호라)가 되었고 우리 황제의 전위(傳位)를 분개하여 22(음력 613) 오후 4, 대한문 앞에 와서 약을 먹고 서거하였다.”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로 국민들의 여론이 분분하고 군대가 동요하고 있을 때, 홍태순의 자결은 민족적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하여 의병이 하나둘씩 양주에 집결하여 항일 투쟁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기독교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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