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8일 수요일

이명직 [李明稙, 1890~1973] 한국성결교회의 사부

이명직(李明稙, 1890-1973)

 
성결교 목사, 총회장.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8대손이다. 성결교회의 목사로서 한국성결교회의 사부(師父)라고 불린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주요 지도자이다. 동양선교회와 협력하여 한국성결교회를 발전시킨 성결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울신학대학 초대학장,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 제1회 총회장, 활천의 편집인 등을 역임하며, 한국성결교회의 행정, 신학, 문서 활동을 이끌었다.
 

1890
 
  • 1890122일 서울에서 출생하다.
  • 이후 YMCA에서 공부하였다.
 
1909
 
  • 일본에 가서 당시 한인YMCA의 총무였던 김정식의 안내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 동경성서학원 입학 후 얼마 안된 190953일 성령강림절에 나카다 주지 감독으로부터 세례 받았다.
 
1911
 
  • 1991년 토오쿄오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귀국하여 동양선교회 개성교회에서 시무했다.
 
1914
 
  • 조선 성결교회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고 이어 규암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16
 
  • 경성성서학원의 교수겸 사감으로 취임하여 후진양성에 투신했고 그해 아현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1920
 
  • 성서학원의 규칙을 기초했고 아현교회 담임과 사감직을 사임, 교수로만 봉직했다.
 
1921
 
  • 동양선교회 조선교회 감독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 1921년 가을 성서학원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으로 성결교회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다.
 
1922
 
  • 교단기관지 활천을 창간, 그 주필이 되었다. 활천은 한국기독교에서 가장 오랫동안 간행되고 있는 잡지로 인정받고 있다.
 
1924
 
  • 동양선교회 조선성결교회 이사로 피택되었다.
 
1925
 
  • 조선성결교회 조례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6
 
  • 구약성서 아가서정해저술하였다.
 
1927
 
  • 룻기 강의, 예수재림강화를 저술하였다.
 
1928
 
  • 김동훈순절긔를 저술하였다.
 
1929
 
  • 주일학교독본(1)을 저술하였고, 성서학원 부원장, 재단법인 예수교동양선교회 유지재단 이사(한인으로는 유일함), 헌법개정특별위원 등에 취임하였다.
 
1933
 
  • 조선성결교회 총회의 조직과 함께 제1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이 시기에 성결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장로교, 감리교 다음의 제3교단이 되었다.
 
1934
 
  • 조선성결교회 제2대 총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35
 
  • 성서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1936
 
  • 1936년 일부 성결교회의 목회자들이 자립ㆍ자치문제로 동양선교회와 마찰을 빚고 교단을 떠났지만 이명직은 동양선교회와 함께 성결교회에 남았다.
 
1938
 
  • 조선성결교회 제6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39
 
  • 조선성결교회 제7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40
 
  • 1940년 성서학원이 전문학교에 준하는 경성신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자 그는 초대교장이 되었다.
 
1941
 
  • 1940년 태평양전쟁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교단의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이사장과 교단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43
 
  • 일제 말기 신사참배의 강요와 기독교 탄압은 성결교회에도 미쳤는데 그 탄압의 강도는 어느 교단보다도 거셌다. 이는 성결교회가 주장하는 교리적 특성 중에 임박한 종말론과 재림사상의 강조에 기인되는 것이었다.
  • 그는 신사참배는 단지 국민의례라는 총독부의 입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신앙을 고수해서 일본의 천황제와 마찰을 빚었다. 또한 한국성결교회를 일본성결교회에 편입시키는데 반대하였고, 기독교의 경전에서 구약성경을 삭제하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 1943524일 이명직을 비롯한 성결교회 교직자들이 총 검거되었고, 1228일 성결교회는 해산되었다.
  • 마침내 19435월 조선성결교회 전체 교역자 300여명에 대한 검거선풍이 몰아닥쳤고 교단 자체가 해산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명직 목사는 동 교단의 대표격으로 체포되어 8개월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300여명의 투옥자 중 박봉진 목사, 정태희 장로, 김지봉 집사 등이 순교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교단 대표자인 이명직 목사가 재림신앙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성결교단은 해체되었고 그 해산성명서는 일제가 조작, 강제로 이명직 목사 이름으로 발표케했다. 이는 오래도록 이명직 목사를 괴롭혔고 해방후 교회가 복구되고 신학교 교장으로 추대받았을 때도 해산명령서의 책임자로 자책, 취임을 사양하기까지 하였다.
 
1951
 
  • 해방 이후 이명직은 모든 교단의 공직에서 물러나 신학 강의에 전념하다가 625전쟁 때 교단의 주요 인물들이 납북당하여 지도자의 공백이 생기자 다시 교단 행정 일선에 복귀하여 1950년대의 성결교회를 이끌었다.
  • 서울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서울신학교의 발전에 혼신을 쏟았다.
 
1958
 
  • 한국복음주의 동지회(NAE)는 이명직 목사를 고문으로 추대하였고, 미국 아주사(Azusa)대학은 그에게 1958년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 5월에 미국 아주사대학으로부터 한국의 신학발전과 목회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
 
  • 서울신학교의 대학승격과 함께 초대 서울신학대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61
 
  • 516 이후의 교육법 개정으로 정년퇴임하여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 1950년대 말 한국기독교협의회(NCC)와 사회사업문제로 1961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창립되었다.
 
1965
 
  • 1965년에 다시 합동운동을 주도하여 양 교단을 통합시켰고, 서울신학대학의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어 성결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973
 
  • 330, 84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2008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었을 때 논란이 많았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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