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기산도(奇山濤, 1878-1928) -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기산도(奇山濤, 1878-1928)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행주(幸州)
 

1878
 
  • 18781016: 전라남도 장성에서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기재(奇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93
 
  • 16세 때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전사, 순국한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의 사위가 되었다.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한 기산도는 고향 장성에다 자강회(自彊會)를 조직하여 인재를 모아 양성하며 그들에게 무력 투쟁의 투지와 정신력을 길렀다.
 
1904
 
  • 1904, 기기 박관호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장성 광주간 고개에서 일병과 싸워 일병 수명을 죽이고 우리 측도 세 명이나 잃었다.
 
1905
 
  • 1905년 기산도는 이지용ㆍ이근택ㆍ이하영ㆍ박용화‘4()’으로 지목하고 암살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기산도는 손효경(孫孝慶)190510월 경에 열린 국민교육회의 연회에서 4간을 주살하고자 하였으나 행사장에 이하영 혼자만 있는 것을 보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4간 중에서 이하영만 죽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190511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는데, 산도는 이틀 뒤인 1119일 일본 헌병에게 대신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황성신문은 산도를 애국청년으로 보도했는데, 산도는 다행히 1개월 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요시찰인물로 감시 대상이 돼 행동에 제약이 컸다.
 
1906
 
  • 1906216, 구완희, 이세진 동지와 함께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 집을 밤 12시 무렵 습격하였다. 기산도 일행 셋이 들어와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이 칼로 찔렀다. 이근택이 이때 재빨리 방안의 촛불을 끄자 일행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마구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였다.
  • [대한매일신보 2월 18일 기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別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突入)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亂刺)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昏絶)한 바, 그의 집 청직(廳直)이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危險)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1908
 
  • 2년 반의 징역형을 살고 출옥(당시 재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었다)한 뒤 그는 고향 전남 장성으로 돌아와 재종조부인 의병장 기삼연의 뒤를 이어 의병투쟁에 뛰어들었다. 유생에서 계몽운동으로, 의열 투쟁에서 다시 의병 항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1916
 
  • 1916년에 일본 헌병 감시자를 따돌리고,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에 있는 친척 기하요(奇夏堯)씨를 찾아가 은거하면서, 낮에는 머슴살이를 하고 밤에는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쓰며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
 
  • 19191, 광무황제의 독살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고향에 있던 기산도는 광무황제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이때 기산도는 심재설(沈載卨) 집에서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던 김철(金澈)을 만났다. 기산도는 김철에게 상해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는 것과 임시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였다. 김철은 자신이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전국에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의무금을 모집하기 위해 왔다고 하며 기산도에게 이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기산도는 이에 수긍하고,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 특별위원이 되어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군에 있는 부친의 집에 김철을 데려와 이를 근거지로 하여 인근에서 동지들을 모집했다.
  • 191931운동 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제자 박길용, 기동환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다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상해에 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일본군 보조(밀정)가 당오리로 기습하여 기산도를 사장나무에 묶어놓고 매질로 실신시킨 뒤 날이 밝으면 경찰서로 압송키로 하였으나 이 마을에 사는 김봉순 할머니가 부엌칼을 감추고 어둑새벽에 물 길어가는 척 하고 결박한 포승줄을 잘라 도피케 하였다.
 
1920
 
  • 1920년에는 제자 박길용의 누이 박순임과 재혼한 뒤, 숨어 지내다가 일본 헌병 야우다(矢羽田)에게 발각 체포되고 기산도의 옷에서 기밀문서(연판장)가 나와 고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일경이 기산도에게 고진 고문을 하며 이를 추궁해도 자백치 않자 광주형무소로 이감하여 다시 가혹한 고문을 하자 개 같은 너희에게 어찌 자백하랴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잘랐다.
 
1925
 
  • 1925, 5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감하여 고흥 당오리에서 장흥으로 피신한 처 박순임의 도움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았다.
 
1928
 
  • 192851세로 운명하면서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 1963: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1967년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고광순 딸)과 쌍분으로 모셔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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