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 1906년, 대한헌정회를 확대ㆍ개편ㆍ조직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19055월 이준(李儁)ㆍ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장지연(張志淵)ㆍ윤효정(尹孝定)ㆍ심의성(沈宜性)ㆍ임진수(林珍洙)ㆍ김상범(金相範) 20여 명이 국민 교육을 고양하고 식산(殖産)을 증진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064월에 조직되어 강연회의 개최, 기관지 발행 등을 추진하였다.
 
회칙에 의하면, 회원과 본회의 목적에 찬성하는 찬성원으로 구성되었다. 임원은 회장 1, 부회장 1, 평의원 20명 및 회의 사무를 집행하는 간사원 20, 그 밖에 법률과 정치에 정통한 일본인 1명을 고문으로 둔다고 규정하였다.
 
1906331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박진수, 김상범 등 5인이 발기하였고, 44 발기인과 동지 20여 명이 모여 임시 임원진을 구성했다. 414에 윤효정 집 임시사무소에서 회원 67명이 모여 임시회를 열어 회칙에 의한 임원을 정식으로 선정하였다. 임시회에서 회장에 윤치호를 선출하였고, 평의원은 장지연, 윤효정, 박진수, 심의성, 남궁훈, 임병환, 박승봉, 이원긍, 이상천, 김상범의 10, 간사에 안병찬, 한영복, 최재학, 김영규, 이명건, 강한희, 김석환, 오봉혁, 정운복, 백상규의 10명과 고문으로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를 선출했다. 19075월의 보고에 의하면 전국에 25개소가 있었다. 때문에 활동은 주로 서울의 본회가 중심이 되었다. 회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본회에 교육부와 식산부를 두어 사무의 확장을 담당, 연구하게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매월 1회씩 열리는 통상회마다 회원 이외에도 일반 대중이 참석할 수 있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 이를 일반에게 알리기 위해 대한자강회월보를 발간하였다.
 
대한자강회는 정부와 통감부의 승인을 받아 합법단체로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소극적인 활동자세를 갖고 있었다. 규칙 제4조에서 국법 범위와 문명 궤도 내의 행동으로 혹은 국민을 지도하고 혹은 정부에 건의할 것을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1907년 이후 점차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72월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동조하여 31일 임시평의회에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기성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는데 대한자강회도 참여했다.
 
본격적인 현실참여운동은 19076월에 박영효 귀국환영집회에서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 정재홍의 자살사건으로 촉발되었다. 그는 유서를 통해 나라 위하여 마땅히 죽을 때에 죽으면 효력이 천 배나 만 배까지라도 미친다 …… 차라리 내가 이곳서 죽어 우리 동포제군으로 하여금 몸을 버려 나라에 도움이 될 경우에 생각케 하심이로다.”라고 하였다. 대한자강회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주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076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한 고종의 양위로 더욱 적극화 되었다. 고종의 양위가 일제의 강압적 수단에 이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자강회는 별보를 내어 양위 소식을 전하고 동우회 등의 단체들과 함께 각지에서 연설을 통해 양위반대운동과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대한자강회는 19078월 보안법에 의거해 내부대신의 명의로 강제 해산당했다.
 
결국 1907821,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지시에 따라 내부대신의 명의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대한자강회를 필두로 하는 한말 애국계몽운동은 민족주의적, 애국적 측면에서 국권회복운동이었지만, 가장 큰 한계로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지적되고 있다.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문명이 발달된 세력이 문명의 발달정도가 낮은 세력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다. 이는 곧 서구열강에 의한 비서구세계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것이며, 한국의 경우 일본에 의한 지배를 자연적 결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자강회는 당시 사회진화론적 문명관을 수용하면서,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 을사늑약 체결에 따라 국권상실의 위기가 현재화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일본을 문명화의 모델로 인식하였다. 대한자강회는 일본은 문명국으로 한국의 자강 노력에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결과 통감부에 대해서도 일정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대한자강회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월보의 간행, 지회 설립 등을 바탕으로 교육과 식산흥업이라는 자강의 길을 분명히 제시하며 국민을 계몽하고 이를 국권 회복과 자주독립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대한자강회는 해산 이후 대한협회로 이어지면서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