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화요일

1685년, 퐁텐블로 칙령 - 낭트 칙령 폐지

1685, 퐁텐블로 칙령- 낭트 칙령 폐지

 
1610514, 앙리 4세가 자코뱅 수도원의 수도사 라바이약(Ravaillac)에 의해 암살되고, 루이 13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래서 앙리 4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마리에 데 메디치(Marie de Medici)가 섭정을 했다. 섭정 모후는 낭트 칙령의 계속을 약속했다. 그리고 위그노들은 교회 총회에서 새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마리에는 이탈리아인들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협조 정책을 폈는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비타협적인 가톨릭주의를 지향하면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 증오를 나타났다. 루이 13세는 스페인의 공주 안나(Anne of Austria)와 결혼했으며, 루이 13세의 자매인 이사벨라(Isabella)는 앞으로 스페인의 왕인 필립 4세가 될 왕자와 결혼했다. 그래서 위그노 반란이 발발했다. 많은 위그노 지도자들은 죽고 위그노의 요새들은 상실되었다.
 
1622년 마리에가 권력을 잃고 추기경 리셸리외가 실제적 권한을 장악했다. 그는 왕권 강화와 함께 자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썼다. 그는 위그노 탄압 정책을 폈다. 위그노의 요새인 라로셸(La Rochelle)을 함락시켰으며, 그래서 25,000명의 주민 중 15,000명만 남게 되었다.
 
1642년 리셸리외가 죽고 1643년에는 루이 13세도 죽었다. 루이 13세의 아들인 루이 145세의 나이에 국왕이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인 안나 모후가 섭정을 했다. 추기경 마자랭이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는 추기경 리셸리외의 정책을 계승했다. 위그노들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23세가 되었을 때 마자랭이 죽었다. 루이 14세는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교황지상주의에 반해 갈리아주의를 지향하고 위그노에 대해서는 탄압 정책을 폈다. 그는 태양 왕”(the Sun King)으로서 아무도 자기의 권력을 가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위그노들에 대해 재연합을 설득했다. 1단계는 돈으로 위그노들을 매수한 것이다. 성직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성직을 잃게 되는데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또한 평신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고객을 잃게 되는데, 역시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단계는 무력으로 위그노들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1684년 무력으로 진압하자 많은 위그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마지막 단계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Edit of Fontainebleau)에 의해 낭트 칙령이 폐지됨으로 위그노는 불법적이 되었다. 30만 명 이상의 많은 위그노들이 스위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북미 등지로 도피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공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이 이주함으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침체하게 되었다. 한편, 외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위그노들은 밤에 들이나 숲에서 예배를 드리는 광야교회(The Church of the Desert)를 형성했다. 이들은 체포되면 남자들은 갤리선에 보내졌으며, 여자들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체포된 위그노 목사들은 처형되었으며, 아동들은 가톨릭 양부모에게 보내졌으며 가톨릭으로 교육을 받게 했다.
 
[참고] 이양호, “프랑스의 종교개혁”, 신학과 교회7, 2017년 여름.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