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金敎臣, 1901년 4월 18일 ~ 1945년 4월 25일)
【1901년】
- 3월 30일, 함남 함흥의 중산층 유가(儒家) 가문에서 출생하다.
- 태종 때 함흥차사 박순(朴淳)과 함께 함흥에 갔다가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정평(定平)에 정주하게 된 김덕재(金德載)의 후예로 아버지는 김염희(金念熙), 어머니는 양신(楊愼)이다.
【1903년】
- 어릴 때부터 서울을 오르내려 18세에 이미 정원이 되어 장래가 촉망되었던 아버지 김념희가 폐환으로 21세로 요절하였다.
- 동생 교랑(敎良) 출생하다.
【1912년】
- 함흥 주북(州北)의 한씨 가문의 4세 연상인 한매(韓梅)와 혼인하였다.
- 두 분 사이에 정손(正孫), 정민(正民)의 두 아들과 진술(鎭述), 시혜(始惠), 정혜(正惠), 정옥(正玉), 정복(正福), 정애(正愛)의 여섯 딸을 두었다.
【1916년】
- 3월, 함흥공립보통학교 졸업하였다.
- 보통학교 입학 전에 권문(權門)댁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나 그 연대와 연수는 불명, 장녀 진술이 출생하였다.
【1918년】
-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 일본으로 건너가 토오쿄오 정칙(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 이 무렵 그는 유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에 몹시 회의를 느끼고, 당시 일본의 무교회기독교의 창도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사숙하였다.
- 3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동경정칙영어학교에서 당대의 저명한 영문학자 사이또오(齊藤秀三郞) 밑에서 영어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주간지 “런던타임즈”를 읽기 시작하여 제2차대전 종말 직전까지 계속 구독하였다.
- 이 해가 기미운동의 해인 바, 3월 3일 함흥지역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선생은 여러 날 집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많이 만들어 집안 아이를 시켜 소학교 예배당에 보냈다고 한다.
- 이 소동에 이웃에 계셨던 숙부 충희씨 댁이 가택수사를 받게 되고, 거기서 구한말시대의 불온서적과 권총 등이 발견되어 크게 문제되었다고 한다.
- 이 일로 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 당시의 조사 기록은 이시가와(石川) 검사의 ‘대정8년 보안법 사건’이라는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1920년】
- 4월, 동경 우시고메區에서 성결교회의 노방설교를 듣고 유교를 떠나 기독교에 입신할 것을 결심하고 야라이町 Holiness 성결교회에 들어갔다.
- 입신 후 예수의 산상수훈에 접해 기독교 도덕이 유교 이상 고엄(高嚴)함에 매혹되어 공부자(孔夫子)보다 10년을 단축하여 육십이종심소욕불유구(六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기약, 일야(日夜) 초심(焦心)했다고 한다.
- 6월, 세례를 받았다.
- 11월, 교회의 온건한 시미즈 목사가 반대파의 술책으로 축출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깊은 충격에 반년 동안 교회 출석을 끊고 거취에 고민하다가 당시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였던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그 후 7년간 성서강연에 참석하여 성서를 배웠다.
- 입신과 함께 선생의 진지한 기독교적인 도덕적 노력이 그 후 다시 선생의 한없이 예민한 양심에 의한 죄의 자각과 더불어 내심(內心)에 심각한 이율배반적인 고민을 일으켰으나 철저한 신앙만의 무교회주의의 복음주의에 의해 차츰 깊은 회심(回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당시 우찌무라 성서연구회에서 연 성서 희랍어반에도 출석하였다.
【1922년】
- 4월,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입학, 이듬해 지리, 박물과로 전과하였다.
- 선생은 고등사범학교 시절 언제나 책상 위에 육촌 조부 되시는 김달집(金達集) 선생의 사진을 놓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이 어른은 선생보다 약 20년 연상의 함흥 출신 개화 선각자로서 일찍 일본 메이지학원 법과를 나오고 귀국하여 당시 보성의숙(현 고려대)에서 법학을 가르치다가 27세의 젊음으로 폐환에 의해 요절했다고 한다.
【1927년】
-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 제3부(갑조) 졸업하였다.
- 4월, 귀국하여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 7월, 우찌무라문하의 동지 정상훈(鄭相勳)ㆍ함석헌(咸錫憲)ㆍ송두용(宋斗用)ㆍ유석동(柳錫東)ㆍ양인성(楊仁性) 등 우찌무라 문하 6인과 함께 〈성서조선〉을 동인지로 발간하였다.
- 이해의 국사 주요사건은 신간회 조직(2월), ML조선공산당 조직(12월) 등이고, 세계사 주요 사건은 일본의 중국 출병(3월), 제네바 미ㆍ영ㆍ일 군축회의 개최(6월) 등이다.
【1928년】
- 3월,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하고 주간격(主幹格)인 정상훈을 도와 〈성서조선〉 간행에 힘썼다.
【1929년】
- 남강 이승훈과 교유하였다. 이 밖에 선생의 교유 관계는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원로인 김정식(金貞植)의 남다른 촉망을 받았고, 또 남강의 동지로 일시 오산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동양학의 석학 류영모(柳永模)와는 지기(知己)로 수어(水魚)의 사이였다. 또 우치무라 사후 그의 고제(高弟)로서 일본 지성인의 존경을 한몸에 모았고 2차 대전 후 동경대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다다오와는 각별한 신앙 교우를 지속, 그가 전쟁 중 비전론자로서 동경대에서 추방당한 후에는 내한하여 서울 정릉 선생 댁에서 성서 집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춘원 이광수도 신앙 문제로 한때 선생의 가르침을 청한 때도 있었고, 또 “창조의 생활”로 청년들에게 생활개척의 정신을 심어 준 김주항(金周恒)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1930년】
- 5월, 〈성서조선〉 제16호부터 선생이 주필로 책임편집 간행하였다.
- 남강이 5월에 서거하자 6월, 〈성서조선〉에 남강 특집호를 내었다.
- 서울에서 경성성서연구회 개최, 성서연구회는 이후 매년 일주일간의 동기(冬期) 성서집회와 함께 10여 년 계속하였다. 무교회주의자로 한국교회의 이단자 취급을 받았던 선생에게 교계가 강단을 빌려 주지 않았음은 물론, 청년회 등에서도 선생에게 장소 제공을 거부한 관계로 선생의 성서집회는 대체로 가정집회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회원도 10-20명을 넘지 못했다. 또 집회의 성격도 어디까지나 성서연구에 의한 기독교 진리의 본질 천명, 이의 민족적인 소화에 있었던 만큼 양(量)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때 북한산록 선생 서재에서는 1인 상대의 성서강의가 수년 계속된 일도 있었다. 선생은 기독교 진리와 신앙의 체득이란 수년에 두세 사람, 10년에 4-5명 있을까 말까 한 것이라고 하며 오로지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 선생의 성서연구는 당시에 벌써 루터, 칼뱅, 벵겔, 마이어, 고오데, 만국비평주해, 슈트라크 빌렐베크 등 고전적인 본격적 주해서와 바우어의 희랍어 대사전, 홀렌베르크의 히브리어 문전(文典) 등까지 동원시킨 것이었다.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도 선생 주최의 이 동기 집회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일제의 심한 탄압과 검열 속에서 “성서조선”지에 연재되었던 것이다.
【1933년】
- 7월, “산상수훈연구” 발간, 이 책은 1931년 1월부터 1932년 2월까지 13회에 걸쳐 “성서조선”지에 발표되었던 것으로, 기독교의 중심 진리가 깊은 본문 연구를 통해 간결하게 천명된, 기독교 입교 후 처음 우리의 손에 의해 쓰여진 고전적인 기독교 저작이다. 더욱이 기독교 사상(史上) 성서 연구의 대가들이 대체로 원숙의 경지에서 비로소 손을 대는 것으로 되어 있는 산상수훈에 선생은 겨우 31세의 나이로 손을 댔고 또 1년 정도로 이의 집필을 끝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선생은 연대적으로 또 이 근방에서 수년 동안 소록도의 나환자들에게 “성서조선”을 통해 높은 하늘의 복음과 깊은 동정과 사랑을 쏟아부음으로써 저들의 위대한 신앙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놀라운 많은 신앙 간증을 편지와 원고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성서조선” 지상에 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간증도 “성서조선” 지상에 게재되었다.
【1935년】
- 12월, 제자 류달영을 시켜 ‘최용신 소전’을 지어 성서조선사에서 발행하였다.
- 양정고보 재직시 처음 수년간은 ‘무레사네’(물에 산에)라는 써클을 만들어 주일마다 청년학도들과 서울 근교의 모든 고적, 능묘, 명소를 탐방ㆍ참배하였다.
【1937년】
-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동원체제 아래서 강화된 출판법을 적용하여 〈성서조선〉은 여러 차례의 출판금지 처분을 받았다.
【1939년】
- 12월, 제자 류달영을 시켜 “최용신 양 소전”을 지어 성서조선사에서 간행하였다.
- 선생은 생애 민족의 유산될 만한 모든 사사건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국토와 자연, 역사와 언어, 문화 그리고 인물, 유적 등에 한없는 외경과 경모, 愛顧와 애호를 바쳤으며, 양정 시대 초기 수년간에는 “무레사네”(물에 산에)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주일마다 청년학도들과 서울 근교의 모든 고적, 능묘, 명소를 심방하고 참배하였다.
【1940년】
- 3월,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10년 만에 양정중학교 사임하였다.
- 4월, 함석헌과의 공저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을 출간하였다.
- 9월,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서 교편을 잡게 되나 불온 인물로 낙인이 찍혀 6개월만에 추방되었다. 그런데 선생이 경기에 가게 된 것은 동경고등사범학교 선배인 당시 경기 교장 이와무라의 호의에 의한 것인데, 이와무라는 후일 선생의 애국적인 심지와 교육에 대해 근세 일본의 지사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의 사규칠칙(士規七則)을 무색하게 하였다고 회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1년】
- 10월, 개성 송도중학교에 부임하였다.
- 선생의 교육 생애는 한마디로 당시의 판에 박은 듯한 소위 정치적인 천박한 민족주의 교육을 지양하고,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켜 도덕의 척골(脊骨)을 세우고, 진리애를 발동시켜 민족정신의 토대를 놓으려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이었다.
【1942년】
- 3월 30일, 〈성서조선〉 제158호의 권두언 「조와」(弔蛙 :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가 문제가 되어 폐간되었다. 「조와」가 어떤 추위에도 견디고 살아남는 개구리의 생명력에 비유하여 민족의 희망을 노래했다는 검찰측의 해석에 의해 폐간되었다. 이때 그는 함석헌ㆍ송두용ㆍ유달영 등 12인과 함께 검속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전국의 수백의 잡지구독자도 고초를 겪었다.
- 신앙잡지를 발간하면서도 민족사학의 평교사 생활로 일관했다. 그가 봉직한 민족사학은 함흥의 영생여고보ㆍ양정고보ㆍ개성의 송도고보이다. 이중에서 특히 양정고보에는 10년간 근무하면서 차원높은 애국의 길과 진지한 구도적 자세를 몸소 보임으로써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선생은 일제 말까지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며 일제의 심한 국어 탄압 정책하에서도 대체로 우리말로 수업했고, 검사의 취조에서도 일본 천황도 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황국신민서사는 망국신민서사가 될 것이며,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린애가 호랑이 탄 격으로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대답했다고 전한다.
【1943년】
- 3월 29일, 불기소로 출옥,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신앙동지 격려하였다.
【1944년】
- 7월, 흥남질소비료공장의 노무자들의 교육ㆍ복지ㆍ후생의 문제를 돕고자 취업하여 조선인 노무자 주택인 서본궁(西本宮) 관리계 계장으로 일하였다.
【1945년】
- 4월 25일, 함경도 일대에 퍼진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했다.
【2010년】
-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국내항일 부문)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기독교’(non-church-movement)의 신조
- 공간을 점유하는 눈으로 보이는 회당을 진정한 교회로 여기지 않고 신자가 모이는 예배의 장소 자체를 교회로 인정하는 일이요,
- 성직제도에서 비롯한 갖가지 교회가 가진 권능을 인정하지 않을 것(예를 들면 목사에 의한 세례 등 의식의 의의를 경시하며) 장로ㆍ집사 등의 직분에 의한 신자들의 조직도 무시하며,
-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서해석권을 인정하지 않고 신자 각자가 성서를 통해 직접 하나님과 만나 은혜의 분수대로 신앙의 진리를 깨우침받는 만인사제의 입장을 존중하는 일이다.
-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섭리사관에 입각하여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고유한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자각ㆍ정립하는 것을 중요한 신앙적 과제로 삼는 일이다.
이 이념은 무교회클럽의 민족정신사적ㆍ민족교육사적ㆍ민족교회사적 성격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교신 전집》
그의 신앙논문ㆍ교육수필ㆍ시사평은 〈성서조선〉 전 158호 전편에 나와있으며, 이 글들은 전 6권의 《김교신 전집》 형식으로 그의 신앙적 제자 노평구(盧平久)의 편집에 의하여 1975년 경지사(耕智社)에서 출판되었다. 제1권에는 하나님ㆍ그리스도ㆍ성서ㆍ기독교ㆍ신앙ㆍ사랑ㆍ부활ㆍ기독신도ㆍ전도ㆍ무교회ㆍ자연ㆍ찬미 등의 항목이 그리고 제2권에는 조국ㆍ교육ㆍ학문과 직업ㆍ현실과 이상ㆍ믿음의 생활ㆍ사회시평(社會時評)ㆍ고백ㆍ선언ㆍ가정ㆍ위대한 사람들ㆍ고인(故人)에 대한 추억, 〈성서조선〉의 행로, 생활주변, 회고와 전망 등의 항목이 게재되어 있다. 제3권에는 「성서개요」란 제호로 「구약성서개요」와 「신약성서개요」가 서술되어 있고, 제4권에는 「성서연구」라는 제호로 「산상수훈연구」ㆍ「골로새서 강의」ㆍ「데살로니가전서 강의」ㆍ「시편강해」가 실려있다. 제5,6권은 그의 12년간의 일기이다.
그의 저작 중에서 아주 이색적이며 최고의 걸작은 전집의 제5, 6권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12년간의(1930년 5월에서 1941년에 이르는) 일기이다. 그는 〈성서조선〉에다 거의 매일 시사평ㆍ교육평ㆍ종교평ㆍ생활평을 곁들인 자신의 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일기야말로 일제하에서 교육과 신앙을 통해 민족을 찾던 한 교사의 귀중한 삶의 기록으로서 그 질과 양에 있어서 한국에는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무교회클럽과 일반 교회 신자와의 신앙생활 방식과의 차이점
- 눈에 보이는 회당으로서의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보지 않고,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든 자리가 교회일수 있다고 보았다.
- 교회의 목사, 또는 각 교파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 즉 교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 세례식ㆍ성찬식 등 교회에서 행하는 예식에 별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행사하는 성서해석권을 거부하고 각 사람의 믿음과 은총의 분수대로 성경의 뜻을 깨우침받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위탁하신 귀한 섭리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한국의 쓰라린 역사를 바탕으로 찾아내는 일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수용자세, 종교인 및 교육가로서의 탁월한 행적에 관한 재평가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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